비구들은 갖가지 더러움 보고
단정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막아 보호하네
탐욕은 모든 물을 머금은 바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는 오근을 지키네
가시 끊고 사랑의 구덩이를 고르고
또 무명의 구덩이를 메우고
홀로 청정한 장소에 노니나니
좋은 코끼리 길들인 것 같구나.
부처님 귀의하는 모든 사람들
마침내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세계 인간의 형상 버리면
하늘의 청정한 몸을 받으리.
세상에는 아는 것과 이런저런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지식을 충분히 갖추고 경험이 충분한 반면 순박한 인간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금력과 권력의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이름난 인물을 만나 보면, 대부분 공연히 목에 힘주고 자기를 내세워 과시하는 허세를 부리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섬길 수는 없다. 그러나 대문 하나 허술한 울타리 하나 없어 개울 하나 건너면 바로 뜰과 마주하는 곳에 살면서 누구나 찾아오면 반기며 맞아주는 그런 분이 있다. 뜰앞에는 돌 하나 매여 있고, 떠놓은 물에는 산이며 법당의 부처님 형상까지 비치는 가운데 한가로움이 모여 백천삼매를 이루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자유자적하는 삶을 영위하는 분이라면 온 우주를 그 속에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처님께서는 “눈 있는 자는 보라” 하시고 “귀있는 자는 들에라” 하셨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보고 들음으로써 이해하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꽃이 피고 잎이 푸르른 것을 보면서 인생무상을 깨우치게 된다. 여름이면 으례히 장마가 지나가기 마련이다. 개천에 호르는 흙탕물이거나 도시의 더러운 하수구물이거나 더러는 바위를 굴리는 폭포수라도 넓은 바디에 들어가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선지식도 그런 분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알아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여도 흩어짐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선지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잊혀지지 않는 감동어린 추억이 간직되어 있듯이 극히 작고 보잘 것 없은 단순한 일에서도 영원히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한 선지식에 대해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는 언제나 홀로 외로와야 한다. 마치 골짜기를 흐르는 연기처럼, 언덕 위를 감도는 구름한 조각처럼, 호숫가나 나무 그늘 어느 곳에도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 여름날의 무거운 숲속에 깃들은 고요함과 저녁 울창한 산속에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리고 따스한 맑은 향기가 깃들은 꽃봉오리처럼 되어야 한다.”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제 마땅히 공경하고 순종하여셔
부처님의 법을 세우기 위해
이 악무리들을 마땅히 무찌르라.
마치 코끼리가 꽃덤불을 부수는 것 같이.
생각을 오로지 하여 방일이 없고
깨끗한 계율을 두루 갖춘 이.
뜻을 정하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 뜻을 잘 보호하여라.
만일 바른법 가운데 있어
능히 방일하지 않는 사람은
곧 늙고 죽음의 땅을 건네어
길이 모든 괴로움의 근본을 다스리라.
모든 재자는 이 말을 듣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을 더 하라.
모든 탐욕을 뛰어 건네어
하나로 움직이지 말라.
그런 무리들이 가장 훌륭하리니
그는 큰 지혜와 명예가 있고
그 재자들은 다 용맹스러워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으리라.
어느 날인가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만신창이 된 감정을 가지고 우연히 눈을 들어 황혼의 석양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산사의 범종 소리에서, 때론 지워 버릴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산사의 예불에 참여한 스님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싱싱함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선지식은 이처럼 언어를 떠나 바로 곁에 서 있을 수있다. 모든 물은 흘러 바다에 모인다. 그래서 바다는 위대한 포용이다. 승가는 각종의 성씨를 가진 이들이 모인 곳이다. 또한 갖가지 직업을 가진 이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나 일단 승가에 참여하면 화합승이 된다.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부귀빈천은 더구나 있을 수 없다. 비판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한번 승가에 들어오면,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놀라운 진리에 눈을 뜨기도 한다. 그리하여 외로운 삶을 지난 사람들에게 깊은 마음의 벗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비구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이웃하며 한 벌의 장삼을 벽에 걸어 놓고 살아 간다. 비구의 선지식은 부처님이다. 그 부처님의 가피를 믿기 때문에 두려움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이웃과 인류를 정성과 자비로 감싸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를 믿는 이들의 선지식은 화합승일 수 밖에 없다.
일년 중 어느 하루를 택하여 선지식을 생각하는 것은 일년내내 하루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 하겠지만, 그 하루만 생각해 무엇을 바라겠는가? 선지식은 우리의 가정과 사회가 올바른 진리를 찾아가게 하는 이이다. 그러므로 일년 365일을 하루같이 선지식을 희망해야 한다. 이는 믿음이다. 좀더 사람답게 살려는 희망이다. 어느 시대이건 하나의 방향을 뚜렷하게 설정하여 밀고 나가는 행진이 있다. 그 물결을 옳게 타기만 하면 흥하기 마련이고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는 망하게 되는 것이 역사요 인생이다. 15세기 후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날틀의 모델을 스케치하면서 먼 훗날에 하늘을 나는 꿈을 키웠고, 미국 인디아나의 라이트 형제는 새들처럼 날고 싶어서 그 꿈을 실현하여 오늘날 점보 시대의 막을 열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을 확증해 준다. 믿음만이 삶의 현상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아무 일이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해야할 일과 할 만한 일을 최선을 다해 정성껏 해야 하는 법이다. 이러한 역사의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이를 선지식이라 하겠고, 그런 이를 만나 벗하는 삶 또한 어찌 행복한 삶이 아닐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