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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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8월 78호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성격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왕족이였다든지, 천태종의 개조(開祖)였다든지 속장경(續藏經)의 편집자였다든지 하는 겉으로 드러난 위치도 중요하지만, 먼저 우리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할 사항은 그때까지 줄기차게 사상의 맥(服)을 이루어 온, 의상(義湘) 중심의 화엄철학 전통에 새로운 이견을 나타내었다는 것과 특히 화엄사상을 토착적이며 민중적이며 민족적인 것으로 수용하였던 균여의 사상에 일대 수정을 가했다는 점일 것이다.
대각국사는 서기 1055년 문종(文宗) 9년에 문종의 넷째 왕자로 태어났다. 속성은 왕씨이며, 위(諱)는 후(照), 자는 의천(義天)이었다.
11세 때 영통사(靈通寺)의 난원왕사(爛圓王師)에게 출가하였으며, 스승에게 화엄학을 비롯하여 대소숭(大小乘)의 경(經) •율(律) •론(論) •소(疏) 등을 배웠다.
스님은 총명하고 슬기로와서 화엄의 논소(論疏)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종파의 교리를 섭렵하였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사상에도 통달하여, 그의 학문은 깊고도 넓었다고 한다. 13세 때 이미 화엄경을 문도들에게 설하여 이에 감동한 문종은 그에게 우세승통(祐世僧統)이란 직위를 주었으며, 15세 때에는 스승 난원왕사가 돌아가자 홀로 스승없이 화엄학에 매진하였다.
대체로 대각국사가 살았던 시대는 광종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한 전제군주제의 중앙집권으로 정치가 안정되었으며, 북방의 오랭캐 거란의 침략도 물리치고 난 뒤인지라 사회적으로도 안정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려 초기에 이미 화엄종과 선종 그리고 법상종(유가종)은 가장 중요한 종파였으며, 특히 균여대사 이후의 화엄종은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 900-975)과 원융국사 결응(圓融國師 決凝, 964-l053),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 999-1066) 등을 배출하였다. 그래서, 이미 신라 이래로 큰 맥을 이루어 온 화엄종은 이러한 국사들에 의하여 그 극성기(極盛期)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선종도 광종 후기에는 새롭게 대두되었으며 특히 오월(吳越)의 영명연수(永明延壽) 선사에게 유학한 법안종(法眼宗)의 고승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이들은 교학 가운데 천태종을 중시했으므로 대각국사도 후에 천태종의 성립에 법안종의 고승들을 포섭하기에 힘썼다.
그리고 유가종은 현종(顯宗)의 후원으로 현화사(玄化寺)의 창건 이후로 급속하게 확대되었으며 특히 한강 유역의 토호이며 왕실의 외척이었던 인주 이씨(仁州李氏) 집안에서 유가종의 승려를 배출하였다. 유가종은 천태종의 성립과 균여대사의 성상융회사상에 큰 영향올을미쳤을 뿐 아니라 특히 혜덕국사 소현 (慧德國師 詔顯) 같은 여러 국사를 배출하는 등 고려 불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인주 이씨의 세력은 그 당시 변방사찰이었던 해인사에 내려와 칩거하며 저술 활동을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대각국사가 살았던 고려 중기의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첨예한 대립은 없었지만 교종의 이론을 바탕으로 삼아서 성립한 선종이 차츰 독자적인 세계를 펼치려고 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수용은, 곧, 대각국사가 주창한 천태종이 성립해 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대각국사가 출가한 사찰이 화엄종이었으며 그의 스승 난원국사 역시 화엄종의 승려였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각국사는, 균여 이래로 화엄종이 순수학문이기보다는 상당히 신비적이고 토속적이었으므로, 균여대사의 화엄학 중 많은 부분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좀더 화엄학의 근원적인 모습을 공부하기 위하여,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당시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여, 송과 거란 그리고 고려는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처음으로 대각국사가 송나라로 유학을 결심한 것은 부왕인 문종 때였다. 그러나 이를 문종은 허락하지 않았고 그 뒤 선종(禪宗)에게 다시 청하였으나 왕의 아우인 몸으로 험난한 바다를 건널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으나, 사실 그런 이유보다는 미묘한 국제 관계가 더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구도에 대한 열의가 컸던 대각국사는 송의 유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그전부터 그 당시 화엄학의 대가인 송나라의 정원(淨源)의 저서를 보고 그를 흠모하여 서로 서신 연락을 해 오고 있었다. 마침내 30세 되던 선종 2년, 서기 1085년 4월에 제자 수개(壽介) 등 두 사람과 함께 왕실의 허락없이 송나라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떠났다.
이러한 대각국사의 밀행을 안 송나라의 철종(哲宗)은 융숭한 대접과 모든 편의를 베풀어 주었다. 그는 대각국사를 송의 수도인 판경(汴京) 계성사(啓聖寺)에 머물게 하고 수홍전(垂拱願)으로 불러 극진한 예우로 맞았다. 국사가 중국 불교를 배울 것을 청하였을 때에는 철종은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양걸(楊傑)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으며, 국사가 여러 절에 이르면 모두 왕에 대한 산하의 예로써 영접하고 환송하였다.
이러한 일은 대각국사의 명성과 그가 왕죽이라는 품격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시 거란에 쫓기고 있던 송나라로서는 고려와의 제휴가 절실했던 국제 정세가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각국사는 중국의 불적과 명산을 순례하면서 수많은 고승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침이 없이 그가 평소부터 존경해 오던 정원, 유성(有誠), 선총(善聽) 등을 만나서는 화엄학에 대하여 담론하였고, 사명지례(四明智禮)의 정계(正系)로서 자변(慈辯)이란 호를 가진 천태종의 고승 종련(從諫)을 만나서는 천태학에 대하여,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종장(宗匠) 택기(擇基)와 소원(炤元)을 만나서는 율종과 정토종에 대하여, 또한 종본(宗本) 요원(了元) 회련(懷璉) 등을 만나서는 선(禪)에 대해 담론하였다. 특히 운문종(雲門宗)의 고승 회련에게서는 대각선사라는 호를 받았으며 그리고 천길상(天吉祥)을 만나서는 범어학(梵語學)에 대하여 문의하는 등 14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여러 곳을 편력하였는데,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에서는 정원대사의 강석에 나아가 강의를 받고 화엄학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이제까지 의심을 가지고 있던 의상계열 화엄사상에 대하여 그는 법장현수(法藏玄首) 화엄교학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대각국사는 의상 계열의 화엄교학의 설천적인 면보다는 현수의 이론적인 면을 중요시하였으며 나아가 학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학의 통합적인 이론을 중요시했던 원효(元曉)를 높이 받들었다. 그리고 대각국사는 희랑(希朗), 균여(均如)로 이어진 고려 초의 화엄종 고승들의 이적(異蹟)을 강조하면서, 실천면을 중요시한 고려 전기의 불교 전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