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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중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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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안종관 1988년 08월 78호
누군가 교육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했다.
“좁은 다락방에 불이 났다. 불을 끄기위해 급히 달려온 소방대원이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층계 밑으로 그를 옮기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구조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방대장이 와서 말했다. 그를 깨워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구할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자살하고 있다.
문교부의 통계를 보면, 88년도 3월부터 6월 20일 사이에 51명이나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했다고 속여 죄송해서 자살하고, 책이 무섭고 학교에 가기 싫어서, 시험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서, 우등생이 못 되니 살가치가 없어서, 떨어진 성적 때문에 부모의 꾸중을 듣고, 일등을 놓칠까봐, 옥상에서 떨어지고 농약 먹고 쥐약 먹고 자살한다. 우등생만 들어가는 학교 도서실에 나도 들어가자고 말했다가 ‘억울하면 공부하라’는 교사의 핀잔율 듣고 유서를 남기기도 한다.
“오늘에 와서야 모든 것을 알게 됐다. 기계가 아닌데, 기계로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멍청한가를…죽음이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피곤하다. 나는 떠나간
다. 내가 쉴 곳으로.”
어른들은 죽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 놀라고 긴장한다. 문교 당국은 서둘러 그들이 대부분 가정결손, 부모의 과잉기대, 또는 이성관계 때문에 죽었다고 나름대로 분석하고, 가정과 학교와 여론에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일선 학교에 시험 횟수를 줄이도록 지시하기도 한다. 학교는 비록 입시 위주의 현실이지만 자녀들에게 너무 성적 부담을 주지 말라고 학부형들을 설득하고, 학부모는 학교가 감옥이 아닌 젊음을 꽃피우는 배움의 동산이 되도록 해달라고 당부한다. 신문을 비롯한 여론은 인명 경시의 사회 풍조를 개탄하면서 대학 입시제도를 고쳐 창의와 소질을 계발하는 전인 교육을 실시하라고 주장하고, 교육학자는 사회 교육과 가정 교육의 역할을 늘려 인간의 존엄성과 참다운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심리학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자신의 이상 때문에 자아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현실의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진단하고, 청소년들에게 좀더 넓고 멀게 세상을 보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유한다.
여기저기 이곳저곳의 어른들이 저마다 소방수가 되어 불을 끄러 나섰다. 그러나 깊이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깨워서 스스로 걸어나오게 하려는 어른들은 없다. 아이들을, 불을 피해, 이 나라 밖으로 옮길 수도 없다. 그저 다 탄 잿더미에다 물만 뿌리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깨울 줄을 모르거나 아니면 방화범이 무서워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어른들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꼴이 된다.
학교는 결코 아이들 개개의 창조력과 가능성을 개발하지 않는다. 학교는 한치의 착오도 없는 일사불란한 질서가 우선이다. 앞으로 나란히, 뒤로 나란히, 앉아 일어서, 그리고 앞•뒤 •옆 줄맞춤이다. 아이들 스스로의 자의적인 선택이나 독창성보다 지시에의 복종만을 요구하여 개성을 파괴하고 착취한다. 무조건 인내하고 적응하기만을 강요할 뿐, 주위 여건이나 상황을 살펴 의미를 알게 하고 이해시키려하는 법이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점수, 석차, 성적표, 시험에 의해 끊임없이 구속당하고,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친다. 온순하고 착실하고 수동적이고 복종 잘하는 아이들이 살아남는다. 어릴 때 익혔던, 스스로 일어서 걸으려는 의지와 자발적으로 알려고 했던 지식에의 호기심 같은 자율성은 없어지고, 전적으로 남에게, 힘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임을 배운다. 자신을 유능한 인간으로 믿는 개인에서, 타인의 능력만을 믿는 개인으로 개조된다.
학교는 결코 아아들의 자아의식을 눈뜨게 하여 현실을 결정짓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학교는 아이들이 사고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바쁘게 몰아댄다. 끊임없이 정렬시키고 청소시키고 뛰게 하고, 그리고 엄청난 숙제로 얽어맨다. 그것은 앞으로의 사회생활에서 더 커다란 권위에의 복종을 예비하는 것이고, 더 큰 통제에의 순응을 위한 길들임이다. 그렇게 다듬어진 아이들이 승자로 선발된다.
“학교외 선별 기능에 의해 승자가 탄생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자도 또한 생겨나며, 학교의 선별은 인생의 선별로 연장되어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어내게 된다. 더구나 학교에서의 경쟁이란 마치 느린 자 일수록 더욱 무거운 짐을 지고, 빠른 사람일수록 가벼운 짐을 골라잡아서 더욱 빨리 달려 점차로 차이가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묘한 장애물 경주와도 흡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착 지점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정해져 있으며, 거기에 제일 먼저 도착한 자에게 상이 수여되는 것이다.”
홀로 뒤처진 패자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능력도 없고, 그래서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다. 개인이 못난 탓이니까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학교도 문교당국도 이들 자살의 원안을 가정환경의 결손 때문에, 부모의 과잉 기대나 꾸중 및 질책 때문에, 개인적인 신체의 병이나 정신적인 결함 때문에라고 분석한다. 이럴 때 학교는 불을 끄려는 소방수도 아니고 아이들의 잠을 깨우려는 소방수는 더더구나 아니다. 경쟁과 소외에 불을 붙여서 더 많은 아이들을 잠 속으로 밀어넣거나 죽음으로 몰아가는 잘못된 체제 그 자체이다.
우리나라 교사들은 대부분이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열악한 근무 조건, 사회적인 천대, 낮은 임금으로 선생질한다는 부끄러움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결코 나와 같은 낙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을 출세시키고 성공시켜서 나같은 설움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진정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교사로서의 사명이다. 그래서 기성의 규칙이나 기준에 미달하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엄격한 권위로써 명령하고 지시한다.
학생들은 인간적인 주체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번듯하게 포장해서 밖으로 내보내야 할 상품에 불과하다. 아침 저녁으로 훈련시키고 다듬고 교정한다. 하면 되고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다. 철저한 석차로 아이들을 채찍질하여 꼭대기로 꼭대기로 몰아간다. 자연, 위로 높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을, 공부 잘하고 말 잘 듣고 권력이나 부를 배경으로 갖고 있는 아이들을, 선호하고 편애하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끊임없이, 한눈 팔면 선두를 빼앗긴다는 초조와 불안감을 주어 긴장시킨다. 그 긴장을 이기지 못해, 일등을 빼앗겼을 때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우등생들도 자살한다.
가난한 이이들에게는 경쟁에 이겨 출세하는 것이 그 가난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주지시킨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근본인 뿌리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농촌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혼자만 빠져나오게 함으로써, 도피자를 양산하는 교육이 되어 버린다.
이제 교사들은 오르지 못하고 탈락하는 열등생이나 문제아들을, 자기 자신을 경멸하듯.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눈 밖으로 버린다. 교사와 아이들은 서로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서로 소외되어 버린다. 아이들은 자살한다.
나 역시 교사였다. 나는 소외된 아이들을 연민으로 바라보았고, 그 아이들을 구출해 주고 싶어, 열과 성을 다해 공부 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나는 그들이 내 눈 앞에서 낙오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고, 거만한 우등생들을 뛰어넘는 승리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을 경쟁하도록 만들었고, 더 많은 패배자를 만들어 그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교실에서 그들의 잠을 깨워 스스로 걷게 하지 않고, 자가의 처지와 근본을 잊도록 해서 억지로 이동시키려 했다. 인간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모순을 깨닫게 해서 그 불평등을 싸워서 극복할 수 있도록 안내하지 못했다.
나 역시 다른 교사들처럼 잠든 사람을 놓아둔 채로 불을 끄려는 소방수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역시 이이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거나, 직접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들이었다. 이럴 때 교사들은 숙달된 하수인이거나 앞잡이에 불과할 뿐이다.
많은 학부모들 역사 아이들처럼 희생자다. 부모로서 자녀를 위하는 것이 아이들을 낙오자로 만드는 결과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못난 자기 아이에 참지 못하고, 끊임없는 잔소리로 기대와 부담을 주고 상처를 입힌다. 혈연이므로 어떤 어른보다 맹목적이고 단선적이다. 이럴 때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속물이고 소유물이다. 인간적인 유대를 차단당한 아이들은 질식하고 절망한다. 부모들은 자녀를 잃는다.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당하는 부모는 불타고 있는 방 속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과 다름없다.
시인은 죽은 아이들 옆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어린 영혼이여 불쌍한 혼령이여
네가 자리를 비워두고 떠난 뒤에도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으며 어디에 있었는가
교장 선생님들은 학생 지도 소홀을 큰 소리로 이야기했고
선생님들은 너의 평소의 소심한 성격과
가정 환경을 의심한다 하였다
모두가 가여운 너의 영혼 앞에
한 송이의 새하얀 꽃을 바치기보다
피묻은 손을 씻기에 정신이 없었다.
배 창환,
“누가 너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으랴”

아이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라. 그리하여 누가 불을 지르는가를, 누가 자신들을 잠들게 하는가를 보게 하라. 그래서 차라리 증오를 갖게 하라. 아이들은 그때 귀한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이들은 힘이고 역사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방어하고 이웃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우리 어른들을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