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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심절(老婆心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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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지광 1988년 08월 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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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비구•비구니의 문제는 승려 상호간에 존중하지 못하는 풍토로까지 심화되고 있다. 세간에서도 남녀 모두의 인간으로서의 동등함을 인식하여 성차별을 탈피하는 즈음에, 오히려 불가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비구가 나이 육십이 넘는 비구니에게 절을 받으려 한다.
절이란 상대방에게서 투영되는 모습을 통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일이요, 불법을 추구하는 불제자로서는 하심(下心)의 표현이 아니던가.
실력이 월등하고, 신심이 장하고, 신도간에 신망이 두텁고, 공부를 많이 해서 자타가 모두 인정하는 품성을 지녔다면 굳이 비구와 비구니를 구분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이거늘, 마치 비구라는 위치가 비구니보다 높은 양 여겨 하대하고 ‘예’를 갖추어 주길 강요한다면, 부처님의 본래 뜻이 아닐 것이다.
스님이 스님으로서의 모습만을 옳게 나타내도 만인의 공경이 자연스레 우러나고, 절을 아니 받겠노라 하여도 절로 우러나 삼배를 올리리라.
‘늦깎이’ ‘올깎이’ 등 승기에서만 일컫는 단어가 있다. 바로 법랍(法臘)이란 것으로 이것이 항시 우리의 곁을 맴돈다. 얼마나 ‘중노릇’을 해왔느냐를 따지는 것으로 이 법랍을 따지는 일이 불교의 발전에 큰 이익됨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라 여겨진다.
사람의 됨됨이는 승기에 입문하여 5년 가량만 되면 족히 알 것이다. 됨됨이를 아니 그 사람이 설 자리도 알아서, 혼자 이루지 못하는 일을 힘을 합하여 이룰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아견(我見), 아계(我計)가 심하여 우리들이 자기를 보는 눈은 너그럽고 남을 보는 눈은 비판적이며, 올깎이를 보는 눈은 너그럽고 늦깎이를 보는 눈은 부드럽지 못한 점은 수행자로서의 대아(大我)적인 혜안에서 크게 벗어난 시각이다. 그래서 승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 위해서 언젠가는 이 벽도 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더욱 바람직한 가람의 모습은 한 승려가 한 절 지키기보다는 대가람에서 자기 능력에 맞추어서 많은 신도들이 모이는 것이다. 또한 도시의 휴식 공간이 넓은 데서 신도들이 마음 비우고 스님들과 인생 문제를 깨우치도록 하고, 스님들은 특기대로 실천할 때 비로소 불교중흥이 가능하리라. 신도들은 절 살림해 주고 스님들은 자기 기량껏 일하고 공부하고 경보고 참선하는 것이 본래의 승가 모습이지, 절 살림 늘리기에만 세월을 보낸다면, 어느 세월에 나를 제도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한국불교에 꽃을 피우겠는가.
이러한 모습은 학력에서도 나타난다. 교육열이 과다해져서 어린 학생들에게조차도 배움을 닦는 것이 마치 무거운짐을 짊어진 꼴이 되어 버린 것이 요즈음 속가의 현실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탓인지 승가에도 일반 교육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 같다. 고학력만이 중생 제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님을 잘 알면서도, 일반 학교 교육에 대한 집착을 젊은 스님들일수록 많이 갖고 있다.
학사가 되고,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야만 승려의 자질을 갖춘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하고 있음은 물론 아닐 것이다. 공부도 많이 하여 높은 학력을 갖고서 속인들을 지도하는 성직자상도 좋은 것이 사실이겠지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할 것은 승려로서의 잘 닦여진 기본 자세라고 본다.
대교과(大敎科)를 마치는 승가대의 졸업과 다섯 차례의 하안거만으로도 부처님 법을 추구하며 자기 완성에 매진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나 불편함이 없다.
스님에게는 스님의 공부가 더 할 나위 없이 시급하다. 성불의 바탕이 되는 내실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시정(市井)의 길목에서 만에 하나도 거침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한 두 글자 더 풀겠다고 마음 닦는 일을 소홀히 하여 천추에 한이 될 잘못을 저지르거나 불가를 손상시킬까 걱정스러움은, 비단 노파심 때문만이 아니다.
요즈음, 시골에 본사를 둔 젊은 스님네들이 속가의 자취방에서 기거하며 학교 공부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물론 그 개인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종단 차원에서 학승을 위해 공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도량을 만들어 합숙케 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절집도 아닌 자취방에서의 승려 생활이 주위의 세인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를 묻고 싶다. 학교라는 제도 교육을 핑계삼아 승려에 관한 불신이나, 성직자에 대한 가치 하락 등의 물의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스님이 거처하는 방도 그렇다. 어느 사찰이든 자고 먹고 공부하며 생활하는 방에서 손님을 맞는다. 그야말로 다양한 기능으로 활용되는 다용도실인 셈이다. 여러 가지 여건상 어렵더라도, 응접실 혹은 사무실을 마련해서 취침하는 방만은 신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게 좋다. 이를 쓰잘데 없는 권위주의로 본다면 큰 오해이다. 개인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철저히 구분해야 절 집안의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리라 생각되며, 또한 흐트러진 모습을 굳이 내보일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
사찰의 운영을 스님들이 하는 시대는 지나가야 할 것 같다. 불가에서 빚어지는 고질적인 병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러하다. 사찰의 재원 조달의 실담당자는 바로 사찰 신도라는 점을 망각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사찰의 운영은 사찰에 참여하는 모든 불자 대중에 의한 공개 • 공영 체재로 되어야 한다. 사원의 재정이 공개됨으로써 자신이 낸 시주금의 쓰임새를 확인하여, 불사를 위해, 불교의 부흥을 위해 더 큰 신심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규모있게 쓰여진 재정을 확인한 신도들은 보람과 긍지를 지닐 것이며, 사원 운영의 어려움도 실감하게 되어 자발적인 협조를 해나갈 것이다.
모든 조직에 있어 그 기본은 재정이다. 원만한 재정 운영이 이루어질 때 그 조직은 실질적인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다. 또한 자급자족의 방법으로 공동체 의식을 갖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찰의 재정을 공개하고 그 운영은 재가자에게 맡기며, 스님은 법을 전하는 성직자로서의 본분에 힘쓰는 것이 진일 보한 한국 불교를 형성하는 일임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전 기독교에서 연간 ‘100교회 짓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모든 성직자와 교인들이 똘똘 뭉쳐 개척교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불교에서는 ‘포교원’이 채 10개가 안되던 10년 전만 해도 포교원이란 단어조차 생경하게 여겼다. 요즈음에야 우후죽순처럼 빌딩가에, 주택가 부근에 절과 포교원이 들어서고 있다. 뾰족뾰족한 십자가가 세포가 분열하듯 불어나 밤이면 온통 붉은 십자가의 군상을 이루는 데 비하면 정말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다.
‘승려 하나에 하나의 포교원’ 식으로 늘어가는 마당에, ‘먹고 살기 위한 포교원’인가 ‘포교를 위한 포교원’인가 하는 진지한 질문부터 던져보고 싶다. 포교원의 문을 열고 신도들을 모아 불법을 홍보하기 전에, ‘나의 성의와 지구력과 실력과 신심’에 대하여 곰곰이 저울질을 해볼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도 하나가 늘어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찾아온 이들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바탕을 마련해 주고, 자기 발견을 통해서 무한히 자기를 성숙시킬 수 있도록 이끄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자질을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후에 전역으로 포교원이 펴져 나가도록 애쓰는 일이 중요하겠다. 그래야 ‘포교원의 명실상부한 본래 소임을 다할 수 있을 터이다.
사찰을 순례하며 느끼는 점은 어디에서건 한결같다. 법당이나 그밖의 전각은 정리가 덜 되어 있고, 청소의 상태도 매우 불량하다. 참배하는 이로서는 못내 찜찜한 일이다. 반면, 스님의 방에 들어서면 참으로 화려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법당에는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 있고 그밖의 비품들이 불쾌감을 줄 정도인데도 요사가 빛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버릴 것 다버리고 떠나 온 이 몸이야 한 평 남짓한 방에서 등 따스하고 밥 굶지 않으면 될 일이다. 허나 부처님의 궁전은 천년만년을 두고 이 세상에 남아야 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장엄해야 할 곳을 장엄하게 하는 작업에 마음 쓰는 일, 그것이 우리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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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이 책을 한 권도 출판하지 않으면 스님의 체모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세월이 왔다. 큰스님이 되려면 글을 써야 하고 책을 내야 하는 줄로 여기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법력있는 스님으로 유명해지려면, 책을 내야 하는 세상이다.
각 사암마다 만든 법요집만 해도 ‘너무 하구나’ 싶은 경우가 많다. 종단에서 오랜 연구와 실험을 해서 단 한권의 법요집으로도 만불자의 의식 절차와 선행에 귀감을 이룰 수 있는 ‘황금같은’ 법요집을 출간해야 하는데 그러하질 못하다 보니, 목마른 이가 먼저 우물 파는 식으로 사암들이 각기 만들어 임시 방편으로 쓰고 있지만, 활용하기에 부적당하고 신심에 영향을 미치기에 부족함이 많은 실정이다.
불교계의 언론 또한 그러하다. 손꼽을 정도로 나오는 잡지와 신문을 반갑게 얽어 보던 때는 오래 전의 일이다. 많은 잡지와 신문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은 반갑기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기존의 신문도 행사를 알리는 게시판 역할 밖에는 하지 못했는데, 또 몇개의 신문과 회보 형식의 사찰 소식지가 쏟아지고 있다. 문서 포교의 중대한 역할을 알고 있다면 그분야에 능력있는 스님과 신심 돈독한 불자들이 만들어서 그 내용을 충실히 채워야 한다.
출판물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우선은 기존의 것이 질 높게 만들어져서 알차게 읽히는 그런 내용으로 꾸며지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