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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감상법과 비교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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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04월 206호
불교와 기독교가 한 공간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게 된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불교와 기독교는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다른 지역에서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불교나 기독교나 모두 ‘종교’라는 점을 빼고 나면 같은 점을 찾기란 도대체 쉽지 않다.
그러나, 놀랍게도, 불교와 기독교를 함께 논하는 학자들 중에서 두 종교의 차이점에 눈을 돌리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종교의 공통점에 주목한다. 이처럼 비교종교학은 여러 종교에 대한 비교작업을 통해 공통점이나 보편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인 것이다. 비교종교학자들이 쉽사리 눈에 드러나는 수 많은 차이점들을 제쳐 두고 어렵사리 공통점을 찾아 나서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드리마 감상법
감상법은 아마도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드라마 관람의 재미와 관련된 오락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드라마의 예술적인 의미를 평가하는 작품성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관람할 때 그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 동장 인물들의 희로애락에 공감하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한다. 드라마에 아주 흠뻑 빠져 들게 되면 감정만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몸짓까지 따라 해가며 거의 일치의 경지에까지 이른다. 작품과의 일치감과 재미에 대한관객의 만족도는 정비례한다. 비 오는 장면에서 소방 호스를 생각하고, 피 흐르는 장면에서 토마토 케첩을 생각한다면 드라마 재미는 반감될 것이다. 장면마다 카메라의 위치를 생각하거나 주변에 자리잡고 있을 스태프들을 상상한다면 작품이 주는 재미에 빠져 들기 어렵다. 드라마의 재미를 느끼려면 내용 속으로 완전히 몰입해 들어가는 공감과 일체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거꾸로, 드라마의 작품성을 평가하려면 드라마의 내용에 너무 몰입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드라마의 내용에서 한 발을 빼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의 의중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앞부분을 보면서 뒷부분을 예견해야 하고 뒷부분을 보면서 앞부분을 기억해야 한다. 갖가지 요소의 전체적인 배치에 관한 균형과 조회를 헤아리고, 또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감각과 가치 기준을 동원해 작품의 예술성을 평가해야만 한다.
곧, 드라마를 감상하려면 ‘공감적 이해’와 ‘주관적 평가’가 동시에 모두 필요하다.

다른 종교의 이해
종교 학자들 사이에는,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인 비교종교학을 위해서라면, 신앙을 갖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아예 아무런 신앙도 갖지않는 것이 나은가’하는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양분되어 있다. 이미 자기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러한 편견이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여 온전한 비교종교학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이 있다. 비교종교학을 하기에는 차리리 아무런 신앙도 없는 사람이 더 낫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신앙도 없는 사람은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는커녕,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자기 종교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종교를 알 수가 있느냐는 뜻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망고 맛을 모르는 사람이 망고 맛을 이해하려면 복숭아라도 먹어 보는 것이 더 낫다는 식의 논리여서 전자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필자는 불교 신앙을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불교학을 오랫동안 공부한 상태에서 기독교를 배웠다. 그런 처지에서 처음으로 복음서를 읽었을 때, 내 느낌은 오로지 의아함과 놀라움 뿐 이었다. 도대체 불교와 너무 달랐다. 불자가 읽는 복음서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인격은 붓다와 너무나 달랐다. 나는 매순간 ‘아, 기독교는 바로 이런 점에서 불교와 다르구나. 이것은 도저히 불교에서 용납할 수 없겠구나. 그래도 이런 점만은 불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하고 판단해 가면서 읽었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의 복음서를 불교의 안목과 시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읽어 나갔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고 있었지만 기독교 공부를 한 것이 아니고 불교 공부를 했던 것이다. 드라마 감상법으로 말하자면, 나는 ‘공감적 이해’가 아닌 ‘주관적 평가’만을 일삼은 것이다.
이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종교학을 전공한 뒤에야 깨달았다. 비교종교학은 평가가 아니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종교를 몸소 실천하는 종교가라면 다른 종교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피할 수 없겠으나, 비교종교학을 하는 학자는 평가를 유보하고 이해를 선행시켜야만 한다.
비교종교학을 논하는 사림들이 종종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점에만 주목하는 것을 본다. 대개의 경우, 이해는 물론 실천까지 하고 있는 자기 종교에 견주어,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는 턱없이 부족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비교종교학이 되려면 비교하려는 대상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똑같이 알아야 한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고 자기 종교를 옹호하는 학문행위는 비교종교학이 아니라 신학神學이거나 교학敎學이다.

공감적 이해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어 된 듯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다른 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한다는 뜻이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더구나 공감적 이해 없이 결코 다른 종교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비교종교학을 하려면 평가가 아닌 이해, 곧 그 종교를 믿는 사람과 일체가 되는 공감적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 그렇기에 비교종교학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에 주목한다. 비교종교학은 그러한 공감적 이해 위에서 모든 종교의 보편적 요소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하여 비교종교학은 불교의 이해 또는 기독교의 이해에 국한하지 않고, 궁극적으로 종교적 인간의 이해를 목표로 삼는다.

비교종교학은 자기 신앙의 편에 선 주관적인 가치 판단에 함몰되지 않는 것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비교종교학은 드라마 감상법으로 말하자면 후자가 아닌 전자를 강조한다. 종래에는 후자를 아예 금기로 여겼으나 최근에 들어 일부 학자에 따라 그 필요성을 겨우 인정하는 정도이다.

갈등의 현대사회와 비교종교학
오늘날 세계 시민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대립과 갈등, 반목과 알력이 다. 심지어 종교마저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합류하고 있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다름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否定과 편견에서 비롯된다.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가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림에 대한 부정과 편견이다. 만일 종교인들이 비교종교학적 방법, 곧 공감적 이해라는 방식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의 알력과 반목을 불식拂拭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성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인들만의 성취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온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국가적 반목 세력들에게 화해와 일치, 공존과 공영의 모범이 될 것이다. 불자들의 손에 그 기회가 주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