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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식과 민중의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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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07월 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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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가을. 서울 인왕산 중턱의 자그마한 사찰에서 있었던 진산식(晉山式)은 필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진산식은 주지 취임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때 열린 진산식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무척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역동적 축제의 마당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새로 취임한 주지가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께 예경드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도 대중과 더불어 신앙과 놀이와 회의와 대중 공양이 어우러져 진행되는 대동의 집회였다.
진산식의 준비는 스님과 신도들의 공개적 회의와 열기어린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부처님에 대한 예경은 지극한 정성과 엄숙함 속에서 진행되었다. 예불 후 절 마당은 새주지 스님의 범패 소리와 회심곡과 민요, 신도 대중의 풍물놀이와 판소리와 민요, 서로의 성불을 기원하는 풍성한 덕담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그것은 바로 승과 속이 하나되어 ‘지금 이곳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엄숙한 제의이면서 동시에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대동의 축제였다.
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기쁨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잃어버리고 망각한 민족불교, 민중불교의 참모습이었다. 그것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수행의 성스러운 시간이었다.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민중 삶의 현장에서의 체득이었다. 그것은 산사 선방에서의 개오(開悟)가 아니라, 승과 속이 하나되어 온 역사적 산물로서의 민중불교의 참모습을 확인한 기쁨이었다.
그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교 이데올로기에 밀려난 채 천시받으며 할 수 없이 무식한 신도들과 더불어 놀아나는 푸닥거리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민속과 승합되어 ‘법등명자등명’이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배반한 불교의 타락이나 변절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엄숙하고 경건한 부처님에의 외경이 있었으며, 서로의 성불을 격려하고 다짐하는 용맹정진이 있었으며, 잠재된 불성의 씨앗을 키워내는 열기가 있었다. 그곳에는 해방이, 곧 해탈이 현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혼자의 해방이 아니라 모두의 해방을 기원하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바로 그것은 불교와 대중이 탁월하게 결합된 환희의 도량이었다.
이는 아마도 과장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민중불교의 잠재적 역량이 현재화되어, 현재에 정토가 구현될 가능성을 제거당한 채 반도의 근•현대사가 격은 수난과 아픔을 되새기며 그려본 영상회상일는지도 모른다. 또 이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구성체에 어울리지 않는 봉건시대 민중불교의 잔영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이후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85년 인왕산 기슭에서의 환희는 이후 어디에서도 겪을 수가 없었다. 인왕산의 그 사찰에서도 다시는 그와 같은 대동의 제의와 축제를 볼 수 없었다. 또 연재 3회에서 언급한 전북 부안 내소사의 지금 모습은 전혀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못했다. 올해 정월 대보름의 내소사 답사 때, 사찰과 지역 대중과의 결합이란 민속학자들의 답사 보고서에만 존재함을 확인했다. 다만 내소사 경내의 할아버지 당산과 절 입구의 할머니 당산만이 예전의 민중불교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의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절의 스님들은 지역 주민들의 당산제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입암리(立岩里)의 촌로들은 예전에 내소사와 긴밀했던 관계를 단편적으로 회고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6월 l0일 서울 봉원사(奉元寺)에서 있었던 ‘주요 무형 문화재 제 50호 영산재(靈山齋) 보유 단체 지정 기념 대법회 및 서울 올림픽 원만 성취 기원 영산대재’도 이러한 안타까움을 더해 줄 뿐이었다. 대중의 참여를 유도해낼 수 있는 각종 방식이 생략되거나 간소하게 치루어졌으며, 박제화된 관제 문화재로나 존속될 수밖에 없는 제반 제약 속에서 치루어져서 행사를 위한 행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소멸되어가는 중요한 불교문화를 보존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 시대 불교의 긴급한 과제, 즉 좀더 자주적인 힘으로 불교가 대중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과제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은 바로 중세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었던 호국불교, 호정권불교의 맥을 잇는 비민중적 국가의례의 전형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불교의식은 오늘날 삶의 현장 곳곳에서 다시금 그 민중적 친화력(親和力)을 회복해 가고 있다.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산화한 열사들을 추모하고 천도하는 전국민적 49재 속에서, 노동 현장에서의 해방 공간을 쟁취하려는 많은 대중 집회 속에서, 불교 의식은 그 민중적 특성을 부분적으로 다시 새롭게 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불교 의식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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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의식의 본질과 그 역사적 전개는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불교사의 올바른 서술뿐만 아니라 오늘날 불교와 대중의 결합에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불교계의 관심은 주로 교리사나 종단사에 치우침으로써, 불교의 총체적인 면모를 파악하지 못하는 편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
흔히 창시자, 교리, 교단의 세 요소가 갖추어져 있으면 종교로 인정되고 있으나, 이는 종교를 종교 내적으로만 바라보는 단견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그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배제하고는 결코 옳게 서술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정치 권력과의 관계’와 ‘민중의 신앙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종교와 정치 권력과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창시 이후로 변혁적 기풍을 상실하고 제도화된 종교, 특히 종단이 어떻게 존속될 수 있었는지를 밝힐 수 있다.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중세 봉건시대에 있어 지배 집단과의 밀착 속에서 물적 토대를 확보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중세 종교 특히 종단의 반민중성을 규명해내는 일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종교와 종단에 대해서도 면밀하고 냉철하게 따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이는 이미 중세기의 종교사 연구에서 상당 정도 규명되어 있다.
둘째로 민중의 신앙 형태에 대한 분석은 종교의 진정한 사회적 영향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교리가 아무리 뛰어나고 세련된 종교라도 민중이 지닌 현실적인 관심사와 만나지 못하면, 단지 고립적 관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 분석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분석의 틀은 한국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도에서 불교가 민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며 그 신앙의 형태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연구한 성과는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그저 단순히 기복불교라고 매도하거나, 아니면 대승불교 이래의 다양한 의타적 불보살 신앙을 경전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분석은, 실제 사회의 주요 재화를 모두 생산해내면서도 그 온당한 노동의 몫을 취하지 못한 채 착취와 굴종의 삶을 이어왔으며 그러면서도 노동 주체로서의 긍지와 생산노동자로서의 공동체 의식 그리고 계급 의식을 다져온 민중의 역동성과 활력과 전투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분석이다.
물론 불교 내적 자료에는 민중의 불교 수용과 실천을 민중의 언어로 기술한 것이 거의 전무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광활한 민중 언어의 바다속에 녹아 있는 불교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설과 민담을 포함한 각종 설화에서, 속담에서, 탈춤의 대사에서, 판소리에서, 그리고 민요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교리와 선수행과 종단에 얽매여서 무시하고 평가절하해 왔던 ‘불교 의식’에서도 민중의 불교관과 불교 수용 형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불교가 대중과 결합되기 위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갈고 닦아온 불교 내적인 노력의 결정물이며 민중의 한과 소망을 받아내온 탁월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교리와 선수행만을 중시하는 스님들은 이 불교 의식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종종의 계율에 의거해 이를 금지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만해스님도 재공양의 번잡성과 민중오도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며 자기 수행을 위주로 하는 의례의 간소화를 역설했다. 그러나 종교는 관념체계(legomenon)로만 존재할 수 없으며, 행위 체계(drome-non)와의 결합이 없을 때는 대중과 만나는 중요한 통로를 잃게 된다. 만해스님의 불교의례 비판은 마땅히 정권이나 국가 권력과의 결탁하에 민중을 우민화하는 국가 의례로 그화살이 돌려져야 한다. 그럴 경우에는 일제하에 있었던 ‘천황폐하천추만세’를 위한 영산법회나 오늘날의 ‘나라와 국가 원수를 위한 기원법회’ 등이 그 대표적인 표적이 될 것이다.
불교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와 변호는 물론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지배 집단의 영속과 안녕을 비는 국가 의례는 차치하더라도 한국 불교는 그 장례 불교적 특성과 내세주의적 신앙이 두드러지며, 이는 만해스님이 갈파했듯이 민중을 오도하는 기능을 해왔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는 지배 권력 내지 종교 엘리트들의 시각이며, 민중적 신앙 실천의 건강성을 무시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 주변의 대사찰에서 치루어진 거대한 불교 의식만이 불교 의식의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얘기한 인왕산 기슭 자그마한 사찰에서의 진산식도 매우 중요한 불교 의식이다. 오히려 더욱 민중과 탁월하게 결합된 불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1985년의 그 진산식은 지극히 예외적인 것으로 민중 불교의 한 편린이었으나, 한 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그것은 반도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마을 뒷산 절마당에서, 마을을 굽이도는 강가에서 그것은 야외 법회의 형태로 진행되던 일상사였던 것이다. 또한 그 절들은 대개 봉건적 질곡을 부수기 위해 변혁을 꿈꾸는 자들의 은신처였으며, 사당패 •탈춤패 •마을풍물패 들이 즐겨 연회를 하거나 머물던 마당이며 터전이었던 것이다.
불교 의식은 그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비난 그리고 비민중적 종교 엘리트의 시각을 넘어 다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며, 오늘날의 대중과 결합하기 위한 포교 전선에서 뜨겁게 부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