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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기행-어느 여름날, 해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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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기승 1988년 07월 77호
신록이 구름처럼 일어나는 여름의 문턱, 산자락의 솔바람 소리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우리의 얼과 모습을 되찾기 위한 발원에서 창설한 해인상 시상식에 동참하기 위해 해인의 땅에 들어섰다.
가야산 줄기를 타고 내린 봉우리들 사이에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다. 관음의 옷자락 같은 물안개 사이로 비치는 영롱한 아침 햇살은 관세음의 미소이다. 솔바람 소리, 물 소리, 목탁 소리, 이따금 울리는 부연끝 풍경 소리는 법음이다.

(문득 정지된 시간)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일천구백팔십일년 일월 이십일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신 성철 큰스님께서 추대식에 참석하시지 않으신 채 내리신 법문, 바로 그 관음이요, 묘음이다.
보이는 만물, 들리는 소리들은 고향같다. 왜일까! 사유하는 인간은 누구나 두개의 고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연의 고향, 지역적인 고향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고향, 정신적인 고향이다. 자연의 고향은 정해져 있지만 영혼의 고향은 정처가 없다. 생각하는 인간은 그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 문학이, 예술이, 학문이 그것이고 우리에게는 종교가 그것이다. 무명이 들끓는 사바의 모래사장을 헤매이면서도 니르바나Nirvana의 언덕을 향하는 길에서 고향을 발견한다. 우리의 영혼이 전생의 인과 연의 관계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 첫눈에 좋은 인상, 나쁜 인상을 느낄 수 있듯이 법미(法味)와 법음(法音)에서 고향의 모습, 고향의 소리를 찾은 것일까?
법계의 만다라(曼陀羅)가 형상화된 법미의 모습은 어디서 왔는가? 예술이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불교적인 미술은 해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이란 무형 •무상의 순수 체험의내용 즉 형상이 없는 것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불교의 본질은 심오하여 언어사량(言語思量)의 피안에 있으므로, 그 진체를 표현하기 위하여 주로 선험적이고도 직관적인 표현 방법을 쓴다.
불교적인 미술이란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심을 일으키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는 불교적인 것이 예술적인 수단을 벌어 표현되는 것이며, 처음부터 미술품 제작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 미술은 일차적으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꽃만이 꽃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꽃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식물학자는 스스로 꽃이 되어야 한다. 봉덕사 신종의 재작 전설에서 보듯이, 사람의 온 몸을 용광로에 던짐으로써 비로소 신비로운 종소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범종의 주조자가 스스로 범종이 됨에 의하여 참된 범종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음을 전해 주고 있다.
해인의 모습, 법미의 모습은 어디서 왔는가? 해인가람은 화엄 십찰의 하나로 창건되었다는 점과, 해인사의 ‘해인’의 명칭이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가람이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웅전이 주불전(금당)인 데 비하여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을 주불전으로 하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해인가람은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大道場)으로서 화엄경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세계관인 물질적 유기의 세계는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 등의 진입공간으로, 인간들의 세계는 궁현당, 심검당, 경학원 동의 수도생활 공간으로, 정각에 의한 지혜의 세계는 대적광전, 명부전, 웅진전, 대장경판전 동의 예불공간 등으로 표현하여 세개의 세계관을 가진 화엄경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구현시키고 있다. 해인가람의 공간구성 전체를 보면, 주불전에 모셔져 있는 비로자나불Vairoc-ana이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화엄경에서 추구하는 이상세계인 연화장 세계가 있는 서방정토를 향하는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다.
전체적인 이미지 Image의 흐름을 보면 일주문에서 법보전까지는 108돌섬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속(俗)에서 성(聖)으로, 찰라적이고 환각적인 데서부터 실제와 영원으로, 인간으로부터 신성(神聖)으로 도달하기 위한 통과제의의 상징적인 경로이다. 세속의 온갖 시비분별을 떠난 채 일주문에 들어서서 108돌섬계를 밟아 헤침으로써, 중생은 백팔번뇌를 떨쳐버리고 시시각각으로 부처의 세계와 가까와진다. 마지막 108번째 단을 넘는 순간이 바로 해탈의 문턱인 보안문을 올라 지화(地花)가 피는 부처님의 땅으로 나아가는 상징적인 의미를 표명하고 있으며, 법보전의 의미는 종교적 목표인 해탈을 상징하는 가람공간의 이미지의 핵이다.
법계의 모습, 자연의 모습, 높이의 변화에 따라 이중 • 삼중으로 중첩되는 토기와의 선율, 흐르는 것같이 길게 끄는 처마의 곡선은 한없이 호소하는 불음의 상의 상징이다. 아아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법계의 실상일까? 우리네 영혼이 너무나 아름답고 착하고 조금은 슬프기 때문일까? 이 공간이며 분위기까지도 해인의 역사와 함께 영원하여야 하리라고 염원하면서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예배를 올렸다.
산그늘이 내리는 시각에 ‘해인’ 편집위원 스님들과 어제, 오늘을 살피는 차 한잔의 여백을 가졌다. 새불교•새스님의 모습이었다.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오늘의 한국불교는 허무와 초속(超俗), 체념과 도피의 그것이 아니고 참여하고 비판하고 괴로와하며 뭇 삶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모습이다.
무의 감정, 부재의 감정, 무의 앞에 서있는 외로운 실존 언어가 미치지 못하는 생활…
훈습-생선을 매단 새끼줄에는 비린내가 배이고 향을 싼종이에는 향내가 배어든다-이다.
천만 년 이어져 내려 온 우리의 자연, 우리 마음에서 우리 모습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산자락에 배어드는 솔바람 소리, 물 소리, 파아란 하늘빛을 배워 익힌 구도자의 깊은 눈동자에는 우리 모습을 성찰하는 힘이 있다. 오늘따라 잿빛 승복이 그렇게 아름다와 보일 수가 없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체온을 지닌 인간, 깨달음의 길을 얻기 위해 인고의 나날을 보내는 가장 이름다운 참인간의 모습이었다. 물안개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 마냥 청아한 스님네들의 혜안(慧眼)이 빛나고 있는 이상, 해인의 모습은 더이상 은자(隱者)의 마을이 아니다.
진여(眞如)여, 법미(法味)여, 여여(如如)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