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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산사(山寺)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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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최채경 1988년 07월 77호
퉁겨나오듯 골목길을 빠져 나와 건널길에서 잠깐, 서둘러 버스 오는 대로 얼른 승강 계단 위로 뛰어 오른다. 빈 좌석뿐이라 순간 주춤. ‘종점도 아닌데…’ 운전기사석 바로 뒷자리에 손가방을 쥔 채 앉는다. 조금 전의 일들이 아득한 옛일처럼 여겨진다. 맞아도 맞는 것 같지 않은 실비 탓인가. 온세상이 온통 흐뿌연히 떠있듯 가라앉듯 형체가 풀어져 있다. 가방 안엔 몇권의 책과 한벌쯤 갈아입을 수 있는 여벌의 옷이 돌돌 말려진 채 들어 있다.
이불장, 옷장이 단칸 방을 거의 반 이상 차지한 나머지 공간에서 두이레쯤 나는 거의 꼼짝 않고 누워만 지냈다. 네 식구가 제대로 몸 펴고 잘 수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등이 배겨오면 옆으로 모로 돌이누웠다 하면서도 허리를 일으키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 비는 참말 억수로 쏟아졌다. 잠들다 깨다 하는 눈열림 틈틈으로 코끝에 닿는 장지문을 밀어 놓고 나는 하늘을 보았다. ‘양동이로 퍼붓듯 하다’는 말을 실지로 보았다. 하늘이 터진 듯 밤낮 계속 비를 흘리고 있는 서울 산동네의 하늘.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물난리 겪는 얘기뿐. 남은 세 식구 몸 펼 공간을 아랑곳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듯 누워서 지난 38년간의 삶이 흩어지는 대로 풀어져갔다.
들어와 눕기 며칠 전 이나라의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한 남기고 떠나는 젊은 주검을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 죽음은 정감(情感) 떨쳐내는 듯한 시멘트 콘크리트 길바닥, 열화로 진득거려지는 아스팔트 길바닥, 푸석한 흙바닥 어디에서고 배어 있었다. 머리통에 와박힌 그 처절한 아픔과 온몸의 절절한 한맺힘을 그나마 풀어주려고 소복한 여인네는 하늘로 날 듯 땅속으로 기어들 듯 무언(無言)의 놀림으로 탈진되었다. 씻김, 풀어짐.
서있다가도 휘청하여 곧잘 발목을 겹질리기 일쑤인 나에게 족히 두세 달 앞당겨 계획하는 일이 영겹결에 맡겨졌다. 월간 불교 잡지일이었다. 4.13 성명이 발표된 날 오후에 그 엮음방에 문패가 붙었다. 발표는 마침 금호대교를 지나 터널로 드는 진입로에서 차 속의 라디오를 통해 들었으나 당시의 이곳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나로서는 그 뒤에 무슨 일이 뒤따를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이 땅을 더 위한다는 얘기뿐인 시방 소식도 한 귓전에 누구하나 일러줌 없이 일 익혀 가며 배워가는 잡지 엮는 일에 쫓겨다녔다. 일에 온통 비끌리어 매인 듯한 나날. 나는 압구정동 강동네 15층 아파트 숲속의 맨 꼭대기에서 갔다.
그런 어느날 모처럼 우리 네 식구는 미아동 달동네 반칸만한 방에 모였다. 그리고 훌훌 털 듯 나와 버린 이튿날은 일요일. 나는 문득 사람 얼굴이 그리워서 혜화동으로 나간다. 주유소 옆 언덕길따라 쉬이 갈 수 있는 곳 빨간 벽돌집 이층 위에 ‘길책방’이 있다. 해맑은 주인 얼굴은 안보이지만 책방 안은 정갈하다. 갓 펴낸 「통문관(通文館) 책방비화」 표지가 우선 눈에 들어와 접어든다. 은잿빛 바탕 위에 목숨 ‘수(壽)’자 흰 문양은 나도 지난 6월호 단오절 특집의 삽화로 사용한 적이 있는 낯익은 그림글씨이다. 이미 나는 오는 9월호에 실릴 ‘바람〔願〕이 가져다 준 바람〔風〕’ 항목에 실릴 칠, 팔매의 원고를 이 멋진 책을 펴내신 이 겸노님께 부탁드렸던 바이다. 차라리 따로, 인사동길을 한 평생 동안 지켜오신 긴 얘기를 기획해서 부탁드릴 것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스스로인지라 기특하다고 한번 까닥머리 인사쯤 해주고 싶기도 하다.
언젠가 권하던 책방 주인의 조심스러운 소리가 기억나서 철학하는 사람 김 용옥 저서들도 뒤적여 보다가 남쪽 화순땅 운주산사에 관한 시조가 실려 있는 「절차탁마 대기만성」을 접어든다. 지난 4, 5월 합본호의 겉표지는 운주사의 연화탑이었다. 일 시작해서 달포도 안된 사이에 내가 엮어 낸 첫호이다. 김 박사의 그 책 표지는 땅색이 주조인데 가림없이 펴진 두 손이 그려져 있다. 그 두 손은 공손히 이 책을 내보이는 듯, 올리는 듯한 손짓이다. 몽글하게 손끝이 달았고, 흙일의 애환을 겪고 겪었고 겪을 사람의 손. 두 권의 값을 치르고 챙겨받는다.
그리고 인파의 웅성거림이 가득한 대학로 안으로 들어간다. 대학병원 뒷담길을 따라 천천히 남쪽으로 발을 옮기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든다. 지척엔 어울려 춤추는 듯한 인파뿐인데, 향내음과 정적이 감돈다. 대학병원 뒷문을 바로 들어서니 향로가 보인다. 향로대 위엔 검은 리번 둘린 한 젊은이의 사진과 그의 사망진단서가 놓여 있다. 눈에 들어오는 수치를 본다. 지금 내 나이 때 어머니는 이 젊은이만한 아이가 있었구나. 잠시 묵묵히 그 앞에 서 있는다. 그러다가 내 나이의 깊이가 갑자기 깊어진 듯한 어지러움에, 휘청거리듯 강동네로 가서, 8월호 ‘만남 그리고 삶’면에 실릴 내 글을 쓴다. 이것만 내일 넘기면 일단 편집일은 끝난다.
다시 들른 산동네의 반칸방에서 네 몸이 한덩어리로 엉긴 듯한 잠자리를 나누고서 일보러 나선 길. 미아리고개를 지나 안국동으로 가야 할 코스를 북악터널, 신촌을 지나 안국동으로 향하는 코스의 버스를 탄 것이다. 알았으면 빨리 가까운 곳에 내려야 할 터인데 내 몸은 자리에 파묻히듯 앉아만 있다. 옆선 기사끼리 차를 나란히 하고 차길 소통 정보를 나눈다. 이미 서울 한복판은 차단되었단다. 신촌쪽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단다. 버스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대학로에서 본 사진의 주인공, 그 젊은 주검을 광주 고향길로 메고 떠나는 날, 이 한열군 장삿날이다. 일터로 가는 것은 오늘 쉬자. 전화를 걸기에도 이미 너무 시간이 흘렀다.
인적은 드물고 햇살만 가득한 과천대공원 버스종점에 내려 주차장 옆 빈 나무벤취 위에 나는 몸을 눕힌다. 쓰고 있던 모자로 얼굴을 가린다. 깐깐히 들리는 잔디 손보는 아낙네들의 무심한 소리를 귓전에둔 채 잠이 슬며시 들면서 하늘 아래 땅이 넓다고 여기고 있다.
문득 곤양 다솔사 수덕전 법당 안의 탱화가 기억난다. 여름방학만 되면 어김없이 가서 지냈던 봉명산 다솔사. 환하고 길어서 어떻게 여름방학을 떼울까 막막했던 철없음의 나날, 나는 그 환한 대낮 시간에 가끔 혼자 슬며시 적당히 어둑하고 서늘한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두려움이 사라지고나서부터는 울긋불긋 만화경 같은 이 세상 얘기로 가득한 그 탱화 보기를 즐거워했다. 울타리로 빙둘러 쳐진 세계 하나하나를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한쪽 상단 벽에 기댄 채 바라다보기도 했다. 과연 울타리의 의미를 얼마큼 이해했을까. 나는 그날 밤 이름모를 여인숙에서 보냈다.
그리고 8월호분 끝마무리와 그 후의 일을 대충 일러 놓고 일터를 떠났다. 그리고 반칸방으로 들어가 무더위 속에 쪄지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나 가방 속에 짐을 채워 넣고, 다시 허물어지듯 누운 채 점점 허접대기 쌓임처럼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되어 갔다. 그러던 한순간 벼락치듯한 내 어머니의 감정 폭발 덕분에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배낭을 둘러멘 채 획 빠져 나왔던 것이다. 고마운 분. 꽤나 계속될 그 변화무쌍한 천기는 선희(善希)라고도 불리웠다는 여섯살 손 위의 언니몫으로 고스란히 다 겪겠지.
버스는 어느덧 서울역을 지나 남영동길이다. 주머니 안에서 나침판을 꺼내 뚜껑을 연다. 바늘침이 하늘거리듯 바들 떤다. 흔들어 본다. 그렇다, 다음 용산역에 내리자. 그리고 남쪽 광주땅으로 향하자. 거기에서 도암(道岩) 중장터행 버스를 타고 다탑동 골짜기로 가자. 그리고 천불산에 누워 계신 두분 부처님을 가 뵙자. 주는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그대로 보면서 흔들림없이 그대로 늘 누워 계시는 두분. 이제 나의 좌표는 정해졌고 나침판이 가리키는 위치는 정남향.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지난 여름, 무덥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속을 걷는 길 떠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8년 된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던 길떠남의 시간은 이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