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따로였다. 내가 집에 있었던 어린 시절엔 그가 공부하러 떠나 있었고, 그 뒤엔 나 역시 커 버려 그만을 쫓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아비없는 자식처럼 자랐고, 그 덕분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이학년인가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산사에 머물고 있는 그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토요일의 대청소를 땡땡이치고 그가 머물고 있다는-왜냐하면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만나야할 일이 있으면 그가 간혹집으로 왔고 아니면 큰댁이 있는 그 부근의 팥빵이 특히 맛있었던 빵집에서 만나곤 했기 때문에-산사를 찾아 나섰다.
사촌언니는 숲길을 따라 산중턱쯤 가서 물어보면 만년 고시생인 그를 모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우선 나에게는 그 암자까지 올라간다는 일이 히말라야 등정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험준한 산을 오를 땐 새로운 각오를 다지듯이 나도 기어이 저곳에 올라 보리라 단단히 마음 먹었다. 그곳엔 적어도 나의 자존심이 있었으므로-일본의 와세다 법대를 나오고 남에게 거짓말이라곤 한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법이 없어도 살고 그리고 아주 잘 생겼다는 그가 있었으므로….
내가 헉헉거리며 그가 있는 곳까지 올랐을 때 다행히 그는 있었다. 나는 얼른 세수를 하고 옷매무시를 고쳤다. 어쩐지 그는 우리 학교의 교장 선생님보다도 늘 더 엄격해 보였기 때문이다.
심부름하는 소년이, 곧 돌아오실꺼라며 얼음보다 더 시원한 물을 한 그릇 내게 내밀었다. 그물을 소리내지 않고 얌전히 두손받쳐 마시고 있는데 “우째 왔노!” 하는 깊이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그릇을 내려 놓고 일어서며 “저 공부를 1등 해서예” 하고는 생각치도 않은 말을 해버렸다. 사실 1등을 했다는 것은 내게 긍지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에겐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으리란 생각 때문에 정녕 말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 말이 나왔을까.
“그래, 잘 했구마.”
“아부지예 여는 공기가 좋네예.”
“공기만 좋은 게 아이다. 다 좋제!”
나는 그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공기에 대한, 자연에 대한, 그 속의 인간 삶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뒤로 다시는 그가 있는 암자를 찾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생활을 한다고 해서, 불교에 귀의한 몸은 아니었다. 다만 자연 속에서 공부하고, 공부하다가 싫증나면 부처님을 뵈옵고, 거기에 심취해 불교철학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환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내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의 적극적인 반대 때문에 그는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겠지만, 나 역시 그가 오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우리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혼한 뒤, 참으로 얼마 만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칠년 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온 재산을 다 바쳐 일구어낸 그 훌륭한 글씨로 내게 펀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한번 다녀가라. 빠른 시일 내에”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내게 편지를 하다니. 주변 사람들이 글씨가 좋다며 글씨 한자 써주기를 부탁해도 끝내 거절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철저하게 뭔가를 이 세상에 남기지 않는다는 주의(主義)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저 좋아서 할 뿐, 그것으로 명예를 얻거나 특히 부를 얻는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상당한 모욕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생 단 한푼의 돈도 벌어들이지 않았고, 글씨도 그림도 공부도 오로지 자신의 희열만을 위해 했던-내 독설을 그대로 쏟아 놓는다면-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보고 싶다는 어울리지 않는 말과 함께 다녀가라고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즉시 가지 않았다.
그 표면적 이유는, 시댁 할머니의 제사가 다가와 있었으므로 내 친정 일 때문에 시댁 제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아주 잘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보낸 편지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런 나를 나무랐다.
“어디 편찮으신 게야 빨리 가봐야지.”
그러나 얼마 전 친척이 그를 방문했을때, 그는 여전히 홍안의 소년처럼 젊었고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전했기에 그런 염려는 뿌리쳤다.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은 아카시아 꽃내음이 향그러운 6월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리 미적 저리 미적 하다가 7월에야, 그것도 불볕더위로 온 몸을 땀으로 적시며 그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편안하고 즐거운 기분보다는 뭔가 어려운 터널을 뚫고 가시밭길을 거친 다음에 만나야 할 사람인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잘 찾을 수 있겠어?”
하면서 자청해 나서는 남편을 가볍게 밀치고 마음의 씨처럼 품고 있는 그 암자를 찾아 나섰다.
중학교 어린 시절처럼 산은 높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았으면 할 정도로 내겐 낙낙한 산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올랐을까. 그의 처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이쯤이었는데….”
아! 나는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그는 이쪽 산이 아니라 바로 내 눈앞에 보이는 저쪽 산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급히 발길을 돌려 그를 찾았을 때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초상이 난 것이었다.
내가 저쪽 산등어리를 헤매고 있는 사이 그는 그가 늘 염원하고 그리던 부처님의 나라로 떠났던 것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나를 외면하고, 저 산에서 헤매게 하고, 가슴에 크나큰 못을 박고 떠나간 그가 웬일인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딸 자랑을 하셨죠. 정말 온화하시고 욕심없으시고 늘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어요. 우리들이 모르는 게 있으면 늘가르쳐 주셨구요. 그러면서도 냉수 한그릇 심부름 시키시질 않으셨죠.”
젊은 대학생의 하얀 치마는 7월의 하늘에 더욱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조금이라도 괴로운 일이 있거나 욕심이 일어 마음이 어지러울땐 그가 있었던 그 곳을 찾곤 한다.
‘연필 한자루 사준 적이 없는’ 그였지만 혼탁한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고, 그리고 그가 자랑스럽게도 내 아버지인 것이다.
그를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어디에 그곳처럼 훌륭한 실락원이 있단 말인가. 여행처럼 그를 찾아보는 식구들 곁에서 나는 언제나 내 돌아갈 본향의 거룩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삼복더위가 내려오면 나는 다시 그곳을 찾을 것이다.
그곳은 늘 고행 뒤에 기쁨을 주고, 내 욕심의 나무에 가지치기를 해주는 곳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