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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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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성동 1988년 07월 77호
나는 그해의 여름 한철을 길 위에서 보내었다
내가 산마다 골마다 빈틈없이 박혀 있는 눈부신 금박 단청의 절집을 마다하고 흙바람 부는 길 위에서 보냈던 것은, 그러나, 전혀 나 스스로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소설 때문이었다. 그 전 해의 겨울에 난생 처음으로 써보았던 소설이 어떤 종교 전문지에서 모집하는 종교소설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그 해 일월 일일자부터 연재가 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제적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 소설이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스님네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호출장을 받고 가보니 감찰원 당국자는 전체 이백장 가량해서 이제 겨우 서너번 그러니까 도입부 정도가 발표된 내 처녀소셜의 군데군데에 붉은 밑줄을 쳐놓고 있었다.
당국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불교계에서는 현하 박 정희 대통령각하의 유신 정책에 발맞춰 호국불교로서의 빛나는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 있으며 국가의 새마을운동에 발맞춰 새절운동을 하고 계신 훌륭한 스님들도 많은데, 어째서 하필이면 방황하는 승려, 타락한 승려를 주인공으로 삼아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스님네를 모독하느냐?”
나는 말하였다.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불완전환 존재 곧 중생이고, 중생들이 온갖 모순과 대립과 갈등 속에 싸우면서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리하여 고해(苦海)고 예토(穢
土)인 것이며,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며 세계가 더러운 땅이라는 투철한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되는 것이 바로 문학일 것이다. 인생이 즐겁고 세계가 이미 이루어진 정토(浮土) 곧 아름다운 땅인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문학이라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생이 왜 괴롭고 세계는 왜 예토인 것인가를 극명하게 밝혀내어 중생들을 깨달음과 정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문학하는 자의 사명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와 문학은 본질적으로 서로 같다고 본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고 문학은 또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쇠귀에 경을 읽는 것이었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하였다.
이제 막 미숙하기 짝이 없는 소설 한 편 썼을 뿐이다. 나는 결코 어떤 특정 집단이나 특정 인물을 비방하거나 모독하고자 소설을 쓴 바 없다. 오직 각성하지 못한 나 자신을 꾸짖고 싶었을 뿐, 어떻게 비방하고 어떻게 또 모독할 수 있으랴. 십년 가까이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거기다가 인류가 발견한 최고의 진리를 가르쳐준 내 정신의 근원을. 비난과 비판은 다르다.
어디로 갈까 하고 망설이면서 막막한 심정으로 부산역 대합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누가 어깨를 쳤다. 동업(同業)의 객승(客僧)이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어밀었다.
“김씨, 축하해.”
김씨, 김씨라…. 내 속성(倚姓)이 김가였던가? 잠시 망연해 하고 있는데, 그 객승이 말하였다.
“제적됐더군, 제적. 그것도 무승적제적. 따라서 자네는 이제부터 사문이 아니라 김씨야.”
나는 이런저런 증명서 따위를 제출해야 된다는 것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이른바 도(道)를 구하겠다고 나선 자로서 무슨 ‘쯩’을 갖는다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어서 승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었는데, 감찰원 당국에서는 고민 끝에 “승적은 없되 승적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제적시킨다”는 묘안을 짜낸 것이었다. 이른바 ‘무승적 제적’이었다.
상기자는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스님네를 모독한 해종행위자이며 반종행위자이므로 무승적 제적을 시키는 바 상기자애게 일체의 숙식을 제공하지 말 것임은 물론이고 만약 이를 어기는 자는 상기자와 동일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할 것임.
감찰원에서 전국 사암(寺庵)의 주지들 앞으로 보낸 공문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삼일수하(三日樹下)의 나그네로 격렬하게 방황하였는데, 우스운 것은 내가 파계(破戒)를 함으로써 제적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재적을 당함으로써 파계를 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하기야 사람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의 본바탕 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지계(持戒)를 한다는 것은 한갓 잔나비의 흉내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그 마음의 본바탕 자리를 찾은 상태에서 파계를 한다는 것은 한갓 밥을 먹고 똥을 싸는 일상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누가 꾸짖는다면 할 말은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경상도로도 가고 전라도로도 갔으며 강원도로도 가고 또 경기도와 충청도로도 갔지만, 어느 한 군데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나 또한 십여년의 밥그릇이 있었으므로, 감찰원의 공문을 받았다고 해서 문전축객을 하는 곳은 없었지만, 괴로운 일이었다. 큰절로도 가고 암자로도 가고 깊은 산 속의 토굴로도 갔다. 비록 드러내놓고 나가달라고 하는 곳은 없었지만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회의가 왔던 것이다. 내 엉터리의 중노릇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물아홉 해 동안 살아온 내인생에 대하여.
삼각산(三角山) 골짜기에 있는 이른바 보살절에서,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던 나는 부처님께 삼배를 드렸다. 순천향병원 영안실에서 사흘간 시다림(尸茶林)을 해주고 받은 만오천원으로 남대문시장에 가서 기성복과 기성화를 사다놓은 날 새벽이었다. 그리고 나는 십여년 전에 새벽 산길을 올라갈때 와 똑같은 조건, 곧 무일푼의 상태로 산을 내려왔다. 1976년 늦가을이었다
산을 내려온 지 어언 열두 해가 지나갔다. 열아홉살의 홍안소년은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마흔두살의 장년이 되었다. 생육하고 번생하는 저자의 율법에 따라 남매를 두었는데, 사내아이의 이름은 미륵이고 계집아이의 이름은 보리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