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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칠월의 산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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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정만 1988년 07월 77호
1981년 7월의 초입, 나는 가슴 속에 덩그런 절 한 채만 지닌 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서울을 떠나 하나의 산과 만났다. 충청도 중원(中原) 땅에 자리잡은 월악산(月岳山)이 그곳이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등허리에 짊어진 배낭 하나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간단한 취사 도구와 알약 몇개, 그리고 「숫타이파타」라는 경집(經集)한 권이 전부였다.
6월이 끝나고 7월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갑자기 만난 여름 산은 너무나 눈부시고 푸르러서 차라리 슬픔을 느껴야 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나의 삶은 얼마나 지치고 피폐해져 있었던가. 온갖 소음과 매연과 아귀다툼이 들끓는 서울에서, 온갖 비리와 폭력과 불법이 한 마당 판을 쓸고 가는 서울에서, 민주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제물로 바쳐지던 그 잘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나’는 왜 그토록 철저하게 부서지고 망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당시 나는 필화 사건이랄 것도 없는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정부의 모 기관이라는 곳에 끌려가서 한바탕 타작을 당하고 나온 뒤였다. 이제 와서 그때의 그 가공할 만한 공포와 분노조차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아마 그해의 5월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잊지 않으리라. 내 몸뚱이에 꽃잎처럼 찬란한 문신을 새겨 놓았던 그 가증스러운 군화 발자국과 물과 전기의 세례를.
아뭏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나는 두 달 동안 굴신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 마침내 서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풀 한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돌멩이 하나 제대로 놓일 곳에 놓이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 싫었던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싫었다. 죽고 싶기까지 했다. 타고난 떠돌이의 기질 탓도 있었겠지만 배낭 하나에 간신히 의지한 채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포에서 내려 진도나 홍도 쪽으로 가든지, 해남의 두륜산을 돌아 소록도를 거쳐 순천의 송광사나 불영사나 동화사, 아니면 울산으로 해서 동해안쪽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조치원에서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열차가 천안역을 통과할 즈음, 서해안 쪽으로 빠질걸 그랬다하는 생각과 함께 불현듯 지승(智勝)스님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승스님은 속가에 있을 때부터의 친구로서 수안보에서 문경 새재로 넘어가는 월악산 근처의 세계사(世界寺)라는 곳에 기거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렇잖아도 얼마 천 며칠 쉬어가라는 전갈이 왔던 것이다.
나는 조치원에서 내려 곧장 청주를 거쳐 충주로, 충주에서 다시 수안보행으로 버스를 갈아타고 세계사를 찾아갔다. 스님은 출타 중이었다. 주지 스님과 몇 마디 인사를 건넨 다음 한 바퀴 절을 둘러보았다. 뭐랄까 세계사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절터만 있고 절의 모양새는 전혀 없는 그런 절이었다. 그저 찌그러진 초가 위에 기와를 얹어 개비만 한, 대웅전은 커녕 산신각 하나 없는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절이었다.
다만 경내의 동남간 노천에 서너 길 높이의 미륵 입상(立像)이 북방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랄까. 주지의 설명에 의하면, 신라 말기에 세운 절인데 임란으로 죄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이 미륵불만 남았다는것. 북향을 하고 있는 이유는 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 미륵 부처님은 우리의 땅이 저 요동 벌의 끝간 데까지라는 것을 두루 살피시어 알고 계시리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당간석(幢竿石)에 앉아 무심히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워물었다. 경내 화단에 피어 있던 꽃들은 남김없이 지고, 만지면 금세라도 푸른 물이들 것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노천불 위의 느티나무 위에서는 매미만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산빛은 푸르다 못해 차라리 감청빛이었다. 그런 산에서 이따금 풋풋한 풀내음 섞인 바람이 녹색 치맛자락을 끌고 내려왔다.
스님이 돌아온 것은 석양이 설핏 기운 무렵이었다. 아직 바늘귀를 놓치기에는 한참은 이르른 시각,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난 스님과 나는 산자락을 타고 새재〔鳥嶺〕쪽으로 나아갔다. 용트림하듯이 솟은 소나무 줄기 사이로 잡목숲이 울창하게 뻗쳐있고, 그 잡목숲 어디쯤에서 청아하게 뻐꾸기가 울었다.
“원래는 절이 꽤 컸던 모양이야.”
스님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당간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닌게아니라, 반쯤은 돌밭으로 일구어진 넓은 산자락 이곳저곳에 주춧돌쯤으로 보이는 커다란 반석과 거대한 암석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어떤 곳에는 깨어진 석탑 옆에 돌부처가 거꾸로 처박혀 두 발을 허공에다 뻗대고 었었다. 꿈이, 인간의 꿈이 이처럼 부질없었던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이 귀한 문화 유산을 왜 이렇게 방치해 놓은 채내버려 둔단 말언가.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울분과 배반감 때문에 더 이상 그 드넓은 사지(寺址)를 바라다볼 용기를 잃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숲속 여기 저기서 반딧불이 날았다. 그것을 보며 스님은 ‘여신들의 월경’ 이라며 웃었다. 어디선가 밤부엉이가 울고, 은빛의 작은 종이 울리듯 멀리 가까이서 풀벌레가 울었다. 그 소리에 섞이어 간간이 개울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 참으로 신선하고 산뜻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싱싱하고 보드라운 대지의 휘장이 소리없이 내 몸뚱이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다음날, 절간 방을 쓰라는 스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한수 쪽으로 나가는 월악산 처마 밑에 텐트를 쳤다. 흑비리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인가와는 한 마장도 더 넘게
떨어져 있어서 사람은 물론 밤이 되어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선 참깨처럼 무수하게 흩뿌려진 별이 보였다.
나는 문득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 영혼이 깨끗한 한사람이 죽으면 저 하늘에도 별이 하나 더 늘어나겠지. 하지만 별은 지금의 수효만 가지고도 충분히 아름답다. 제발 이 땅에서 더 이상 무고한 목숨이 살해당하지 않기를.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쓰라리다 못해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거의 석달간을 그곳에서 났다. 때로 내 좋은 스님도 찾아오시고, 내 좋은 산꿩과 다람쥐와 풀벌레도 찾아와 주시었다. 간혹 비도 내리시고, 먼 곳을 헤매다 돌아온 나그네처럼 흰구름도 내 거처에 들르셨으며, 작은 밥풀꽃도 제풀에 피어서 상한 내 마음을 달래주시었다. 작은 자갈돌도, 억새풀도, 그리고 수풀 속의 찌르레기도 제각기 다 제자리에 놓여서 대자연의 은혜에 봉헌하고 계셨다.
나는 그런 속에서 장엄하게 뜨고 장엄하게 지는 햇님에게도 참배했으며, 외로운 밤과 고통과 눈물을 주신 분에게도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내 분수에 맞게 내가 있을 자리에 꼭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으며, 이 우주의 질서에 내가 이바지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한수로 돌을 주으러 나갔다가 돌밭에 앉아 일없이 돌만 쓰다듬다 돌아오곤 했던 때도 그 무렵이었고, 단양의 희방사와 영주 부석사, 속리산 법주사와, 문경의 금룡사와 윤필암, 봉암사 등지를 돌아다닌것도 그 무렵이었다.
좋은 산자락 아래에는 언제나 좋은 절이 있었고, 좋은 절이 있는 곳엔 의례 안행(雁行)의 기러기같이 좋은 산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 풀 하나, 나무하나, 돌맹이 하나라도 제각기 제자리에 놓여서 자연의 섭리에 거스름이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내것 아닌 게 없었다.
지금도 가끔 산사를 찾는 것은 내 삶의 유일한 기쁨. 올해도 7월이 오면 이 각박한 서울을 벗어나 어디 깊은 산사로 들어가 산간수로 이빨이라도 하앟게 닦으며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