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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산방 수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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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8년 07월 77호
축서암 당우의 한곁.
정갈한 한지를 바른 미닫이로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청동 화로 위에서는 다관이 김을 내며 끓고 있다.
조금 있으면 작설차의 그윽한 향이 퍼질 이 곳 잡화산방(雜畵山房)에 지금은 짙은 먹 내음이 가득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잘라 놓은 여러 장의 한지와 붉고푸른 물감 그릇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다. 정돈되지 않은 이 방의 주인은 학(鶴) 그림으로 유명한 선화가(禪畵家)인 수안(殊眼)스님이다.


그림 구상에 여념이 없어 통 말머리를 못 잡다가 ‘방 한번 치우려면 힘들겠다’고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였더니, ‘어지를 줄 아는 이가 깨끗이 치울 줄도 아아는 법’이라고 일침을 놓으신다.
강렬한 원색과 담백한 먹빛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스님의 크고 작은 그림들이 사면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스님은 그림 도구들을 한켠으로 밀어놓고 손수 차를 준비하신다. 그러는동안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날개짓하는 학, 붉디붉은 감, 환희심에 젖은 동자, 그리고 소반위에 놓인 잣잔. 또 한창이 흐른다. 그러나 스님의 손동작이며 자아내는 그 분위기는 말없는 가운데의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 배경 없이 단순한 선만이 꿈틀거리는 여백 많은 스님의 그림이 그렇듯이. 차를 따라 주시는 스님을 보니 그림 속의 동자의 해맑은 모습과 사뭇 닮았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습이나 성정(性情)을 화폭에 어떻게 잘 담아내느냐에 달려 있지않나 싶다.
“우주와 충만한 기운 중에서 일부가 잠시 이 화선지를 스치고 지나가고 있는거야. 상이 바로 그림이지. 나는 그 기운을 드러내 모습을 만들어 주는 매개자일 뿐이라네.”
스님의 말씀에서, 그림 그리는 일이 종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무한의 세계를 구가하는, 또한 삶과 철학과 우주관을 드러내는 작업임을 가늠한다.
“더러 그림공부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 먼저 불교공부 열심히 하고, 선수행 제대로 하고 오라 이르지. 선화는 지식하곤 달라. 남에게 가르치거나 또 남에게서 배워서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거든. 정신을 한가롭게 쉬면서 머리를 말끔히 씻을 줄 알 때 그림이 나오지. 선법을 모르고는, 흉내는 낼지언정, 결코 선화가 될 수 없어.”
누구에게서도 사사받지 않고, 선의 세계를 독특한 필치와 우리의 색채로 펼쳐보이는 스님은 ‘부처님 말씀’이나 ‘선의 경지’나 ‘자연의 오묘함’이 합일된 세계에서 보고 느낀 것을 그린다고 하신다. 항시 지니고서 읽곤 하는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을 토대로 무(無)자 화두를 통해 빚어지는 세계가 곧 수안스님의 선화인 셈이다.
수도생활에 정진하는 수행자로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고통스럽도록 어려운 일이었다고. 스님은 초지일관으로 피눈물나는 정진을 통해 힘든 과정을 극복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수도생활과 선의 일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님께서 그림 그리는 일과 인연을 맺기는 우연한 계기로 전각에 손을 대면서 비롯되었다. 통도사의 극락선원에서 경봉선사를 모시던 중에 큰스님께서 낙관을 탁틱하시기에, 전문가를 찾아가 그의 작업하는 양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뒤에 따라 해본 것이 계기가 되어 전각(篆刻)을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운여 김 광업 씨에게서 전서와 전각을 배우면서 전각의 묘미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면서 전국 각지의 사찰 현판과 주련을 도맡다시피하여 조각하는 솜씨를 보였다. 전서 자체가 상형문인지라 글씨를 쓰다가 자연스럽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원을 찾아 선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결제를 마치면, 며칠씩 앉아 그림을 그렸다. 한동안은 탱화나 벽화 따위를 스케치하는 것 외에도 학을 사진 찍는 일에 열중하였다. 한번은 강뚝에서 며칠동안 황소를 관찰하다 ‘소도둑’으로 의심받아 지서까지 다녀온 일화도 있을 만큼, 스님이 그림에 쏟는 열정은 대단하였다.

1979년 전라북도 이리에서 기차가 폭발하여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때, 스님은 석진스님, 기석스님과 함께 뜻을 모아 부산에서 이리 이재민 돕기 선묵(禪墨) 전시회’를 일주일 동안 가졌다. 그리고 수익금은 모두 조계종 총무원에 전달하였다.
“좋은 일 한다는 게 그저 신명났었지. 차비도 안 남기고 톡톡 털어 전하고는, 차비를 벌어서 내려왔어. 바보처럼 차비쯤은 얻어 쓴다는 것도 몰랐거든.”
그 일을 회상하며 껄껄 웃으신다. 그 뒤로도 스님은 ‘재소자 가족 돕기’, ‘노인복지기금 마련’과 같은 불우이웃돕기 행사나 전국의 크고작은 사찰 불사를 위해 수많은 그림을 출품해 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던가. 수안스님의 선화는 프랑스에서도 격찬을 받은 바 있으니, 선화로서의 스님의 독창적인 화풍은 세계의 화단에서 종교화, 한국화를 넘어서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프랑스 한국문화원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각국의 화가와 미술 애호가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보좌르 미술학교’에 초빙되어 선화에 관한 실기 지도와 강연을 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스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냐고 물었다.
“나는 노동자가 삽을 들고 흙을 파는 심정으로 붓을 삽이라 여기고 그림을 그린다. 삽질을 거듭할수록 숙달되어 흙흘 잘 파게 될 따름이지, 그밖의 생각은 없다. 그 노동자에게 흙 파는 일이 의미있듯이, 내겐 붓을 잡는 게 의미있는 일이다.”
‘노동하며 산다’는 신념은 스님의 수행생활 전반에 잘 드러난다.
“종교인은 적어도 마흔살까지는 종교적 수행을 깊이있게 해야 해. 마흔이 지나면 어떻게 살아가겠노라 하는 것이 이미 눈에 보이거든. 수행 속에서 노동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아야 할터인데, 어찌 된 절 집안이 콩나물부터 온갖 것을 죄다 사다 먹고 있으니.”
스님이 구년째 머문다는 통도사 축서암에는 엄청난 규모의 가마솥 네개가 아궁이 위에 나란히 걸려 있다. 콩 일백이십 가마를 삶아 메주를 만드는 작업장이다. 늦가을이면 가까운 마을의 보살들까지 이 일을 도우러 온다. 장작불을 계속 지펴 그 많은 콩을 삶고, 다시 찧어서 모양을 곱게 빚어 요사채 뒤켠에 한줄로 매달아 발효시킨다. 신청한 신도들이 찾아가기까지, 한 한달쯤은 이렇게 메주 만드는 일에 매여 지낸다. 스님의 원력과 신심때문인지, 축서암의 메주 맛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만큼 훌륭하다. 더 많이 만들 것을 부탁하는 신도들도 있지만 돈 벌 욕심이 아닌 까닭에 양을 늘리지 않고 있다. 이렇듯 노동을 통해 스스로 생활을 꾸려나가려는 스님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잠시라도 들러 즐겨 일손을 덜려고 한다.
재작년에는 메주를 만들어 판 돈을 불교신문사에 전했다. 좀더 많은 스님들이 노동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심정에서였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반응은 냉담했다. ‘돈 버는 데 환장한 중’이라나 ‘그림이나 그리지 뭣하러 그 짓 하냐’는 등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어찌하였든, 메주를 통해 들어오는 수익금은 현재 부산의 정박아수용 사찰인 정수사에 꼬박꼬박 전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스님의 신념처럼, 스님의 손바닥은 내내 흙과 씨름한 덕분에 딱딱한 못이 박인, 농민의 손이었다.

몇해 전부터 축서암의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두르거나 급히 할 일이 아니라는 스님은 몇 차례 개인전을 통해 불사 기금을 모아 공사에 들어갔다. 이 불사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불사에 동참했으면 싶어 싼 값의 소품으로 많은 작품을 준비하였다. 평소에 ‘무슨무슨 불사’를 위해 수십장씩 그림을 얻어간 스님들은 전시회장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밥도 사서 먹고 잠자라도 사서 자면서 느낀 것은 ‘스님들이 너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넉넉한 마음으로 진리를 쫓아야 하지 않는가. 사랑하는 마음, 서로 돕고 사는 마음이 없으면 죽은 목숨과 무엇이 다를꼬. 품앗이 정신이 사라져 버렸으니 무슨 재미가 있겠소.”
언젠가 스님이 불국사에 갔더니 기와불사를 위해 모금중이었다. 스님도 동참했다. 접수를 맡은 처사가 ‘이 곳에 오래 살았지만 스님이 시주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더란다. 이는 ‘정화’가 낳은 최대의 피해라고 스님은 분개하셨다.
“정화 전에는 큰스님이 살고 그 상좌가 살고 또 손자 상좌가 대를 이으며 살면서 돌 하나, 나무 하나, 보잘것없는 물건 하나까지도 ‘이건 우리 스님이 아끼던 것’이라고, ‘노스님이 어릴 적에…하며 소중히 여겨 보물처럼 전해 왔거든, 헌데 정화가 시작되고는 소홀히 보관할 뿐더러 자기하고 관계 없으면 내다버리기까지 하는 풍토가 보통이야.
음식도 그래.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같은 큰 사찰에는 그 사찰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어 왔지. 별좌스님이 맥을 이으며 전해 온 덕분이었지. 이젠 없어. 절마다 공양주 보살들이 화학조미료로 음식을 만들어 맛이 어디나 한결같애. 상추나 배추도 수확이 신통치 않다며 그 정성이면 차라리 사다 먹겠다는 게야.”
육십년대 말, 밀양 표충사 뒤에 한계암을 짓고 그 안에서 육년 동안 수행하였다. 암자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정신병자 요양원’이라는 팻말을 내걸었다.
“중생 자체가 다 정신병자야. 부처님만 빼고는. 증세의 더하고 덜한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곳에서 하루 여덟 시간씩 공부하고는 손에 흙 묻히며 일했다. 암자 뒤에 폭포가 있고 양쪽으로 높은 산이 솟아 있어, ‘콸콸 쏟아지는 폭포수 물줄기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그냥 해도 될 이야기를 고함지르며 해야 했던’ 시절의 감회에 젖는 스님에게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흔히 지니고 있는 다혈질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울고 싶을 때 눈물 흘리고, 사랑하고플 때 뜨겁게 사랑하는 ‘더운 피’의 심성 말이다.

교만스럽고
방자하고
거만하고
잘 웃고
성 잘 내고
잘 웃기고
울리며
성질은
뾰족하고 표독하고
독살스럽고
용심은 심술이 딱지딱지
술술 흐르다가도
애기같이 헤헤 웃고

‘잡화산방 중맷돌’ 이란 시 중에 나오는 스님의 자화상처럼, 스님과 만나고 있는 동안 화가 나 언성을 높이다가도 신이 나서 환한 표정으로 말씀을 잇는 스님의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림을 통해 포교 효과를 얻으려 애쓰지는 않아. 부지런히 정진하고 진리를 위해 참되게 사는 법, 내 그리살려고 하지.”
밀어놓았던 한지를 펼쳐놓고 그 흰바탕을 마주한 스님의 모습이 더없이 정연하다.
먹물을 담뿍 먹은 붓을 드셨다. 스님의 온몸의 기운이 붓으로 쏠리는 순간, 두 마리 학이 하늘을 날고 있다. 푸른 해가 떠 있는 하늘을 가르며 학이 나는 동안, 중맷돌 수안스님도 선경(禪境)을 날으는 한 마리 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스님은 자기를 ‘또라이’ 라고 한다. 자꾸만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