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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균여대사(均如大師)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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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7월 77호
균여대사의 저술이나 사상이 광종 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의 정치적인 변수와 사회상과의 연관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상의 측면에서도 그것이 배태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
한국사에서 보면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사회적 변화는 고대사회가 붕괴되어 중세사회로 전환해간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불교사에서는 이 시기를 선종(禪宗)의 이 입(移入)과 그것이 끼친 영향 때문에 중요한 시기로 꼽는다. 선종 사상의 확립은 화엄 사상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화엄 사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선종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 그와는 별도로, 법상종이 통일신라 이래로 신라 사회의 중류 이하의 지식인이었던 군소 토호층에 의해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의상(義湘) 계열의 화엄 철학과는 또 다른 화엄 철학의 바탕을 지닌 중국의 법장(法藏)이나 원효 계열의 화엄 철학과의 융회는 사상적인 면에서 필수불가결한 종교 및 학문의 진행방향이었다.
그동안 자주 인용되었던 균여대사의 성상융회(性相融會)사상은 광조 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자주 대두되곤 하지만, 사실 그러한 정치, 사회적인 의미에 앞서서, 성상융회의 사상이 출현한 것 자체를 화엄 사상의 한 발전으로 평가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상융회 사상이 그 무렵 화엄학계에서 두루 통일되게 수렴되거나 널리 퍼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순수교리적인 입장에 서 있던, 정수(正秀)를 비롯한 승려들로부터는 이정수행(異情修行)으로, 다시 말해, 이단으로 취급받았거니와, 특히 개보(968~975) 연간에 균여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귀법사의 승려인 정수에 의해 관(官)에 참소당한 적도 있었다. 사실 균여대사의 화엄 사상은 순수교리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화엄 사상 외척인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곧, 법상종이나 선종 계열의 법안종(法眼宗) 그리고 북종선(北宗禪)의 이론이 첨가되었으며 원효와 자장 같은 이들의 화엄교학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의상 계열의 순수교리적 태도를 고수한 화엄학자들에게는 이해되기가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물론 이러한 융회적 특징이 균여대사에게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고 화엄교학 가운데 남악과 북악의 대립 이후 고려 초기의 불교 사상은 이미 융회적 경향을 띠고 있었으니, 고려 통일기의 교선(敎禪) 융합의 사조나 광종 대에 선종과 교종의 융회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 천태학의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모두 고려 초의 불교가 지닌 융회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불교의 융회 사상은 당시의 정치 상황과도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곧 후삼국의 통일을 완수한 고려의 건국이 당면한 과제로서의 정치적인 통합은 바로 불교 제종파의 융회적인 방향과 그 궤적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으니, 정치 쪽에서는 광종에 의하여 통합을 이루게 되며 불교 쪽에서는 균여대사가 그러한 역할을 완수하였다는 점에서 정치와 사상의 그러한 융회는 역사적인 만남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균여대사의 저술과 행적은 신라 말과 고려 초의 불교적인 상황을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일 뿐더러, 화엄 사상 및 불교 제종파의 관계를 밝혀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 것이다.

지난 호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해동 화엄의 초조(初祖)인 의상대사로부터 시작된 화엄종의 큰 흐름은, 균여대사에 의해 계승되어 그 뒤로도 계속 명맥을 이어나가긴 하였으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 이르러 그 기세가 크게 꺾이게 된다.
의천은 균여대사의 성상융회를 비롯한 그 이전의 화엄교학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였다. 특히 균여대사의 화엄교학의 이론이 상당한 부분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과 비합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 대해 의심을 품고 송나라에 유학하여 법장현수(法藏玄首)의 화엄교학을 공부한 뒤부터, 의상대사의 화엄 사상 성격인 일원적(一圓的) 화엄 사상을 비판하면서, 화엄 사상이 원융한 교학의 최고봉임에는 틀림없으나 이에 이르는 여러 교리적 단계를 설정하고 소승에서부터 유식(唯識)에 이르는 모든 교학이 단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천은 따라서 모든 교학의 포용을 바탕으로 하는 화쟁사상(和諍思想)을 폈던 원효대사를 성사(聖師)로 여기고 스승으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은, 그리하여, 뒤에 그때까지의 불전이나 고승들의 장소(章疏)를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저술할 때에 균여대사의 저술은 제외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제자에게 균여대사의 저술은 억설이 많고 학문이 정박(精塼)하지 못하므로 읽을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이로써 균여대사의 화엄교학은 의천에 이르러 수정기를 겪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의상 계열의 화엄학은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이것은 그 뒤로 의상학파에 대한 화엄학의 연구가 지속될 수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균여 사상의 영향으로, 한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공로이다. 또한 그 무렵 순수하고 고답적인 화엄 이론보다 신비적이고 토속적이며 융회적인-곧, 민중이 좋아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진-성상융회 사상은 민중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상적 지반은 성속무애(聖俗無礙) 사상으로 연결되어 무차대회, 수륙제, 제위보와 같은 현실세계를 중시한 실질적인 불교 행사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나타난 구결(口訣)과 향가는 균여대사가 대중 포교에 얼마나 힘썼던가를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위에서 알수 있듯이 균여대사의 성상융회 사상은 한국적인 화엄학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중국의 법장, 징관(澄觀)과 같은 사상가의 화엄 사상과도 서로 연결되는 면이 있다. 균여대사의 전기인 균여전(均如傳)에 의하면, 그는 화엄학에 대한 책을 많이 저술한 것을 알 수 있다. 곧 공목장기(孔目章記) 6권, 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 4권, 탐현기석(探玄記釋) 28권, 교분기석(敎分記釋) 7권, 지귀장기(旨歸章記) 2권, 삼보장기(三寶章記) 2권, 법계도기(法界圖記) 2권, 십구장기(十句章記),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등의, 대부분 화엄학에 관한 저술 목록이 보이는데,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교본기석, 삼보장기, 지귀장기, 십구장기, 법계도기 등이다

지금까지 균여대사에 대한, 개괄적이며 극히 일부분이 지나지 않는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해인사와 연관된 인물, 해동 화엄불교의 변천-특히 의상에서 시작된 의상 화엄학파의 변천-과, 그리고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정치 및 사회의 혼란 속에서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민중의 삶과, 다른 종파의 영향 등의 무수한 가닥 속에서 균여대사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기란 결코 쉽고 단순하지가 않았다. 불교학계에서 지금까지 균여대사가 중요하게 다루어진 적이 별로 없지만 신라말과 고려초의 불교사를 아는 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의상 계열의 화엄학계에서는 더구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해인사 인물열전’을 꾸려감에 있어, 처음에는 균여대사가 해인사에 머문 행적이 없기에 건너뛰려다가, 그가 의상화엄의 계승자라는 사실과 실질적으로 의상 화엄의 마지막 횃불이었던 점에서, 화엄학에서의 그의 의미를 나타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리하게 이 글을 전개시켰다. 짧은 글 속에서나마 균여의 사상적 편린을 수집, 정리하는 데에 김 두진박사님의 「균여화엄사상 연구」(일조각)과 허 홍식 교수의 「고려불교사 연구」(일조각) 외에 여러 논문이 참고 서적으로 인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