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논리, 화합의 논리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시론 - 목우
1988년 07월 77호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거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사람이 어찌 적은 숫자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또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우리는 지난 양대 선거를 통해서 너무나 큰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배신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오랜 세월 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온 분들이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대세를 그르치고 스스로를 욕되게 했다. 만약 그분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양보를 했더라면 역사는 바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양보를 한 분은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길이 추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들은 스스로 지도자이기를 거부했다.
「금강경」에는 이런 귀절이 나온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만약 보살이 스스로 보살이라 생각한다면 진정한 보살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소이는 보살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반어법은 대승불교의 윤리적 실천이 공(空)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심오한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바,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히 보편성을 띠는 살아 있는 금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지도자란 오직 ‘나만’이라는 아집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고서라도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지난 양대 선거의 결과는 민족 화합의 차원에서 볼 때, 시대를 역행하는 매우 우려되는 사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야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권에 집착한 나머지 역사의 바른 노정(路程)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파당을 짓고 적전분열을 일으키는 바람에 민족사를 엄청나게 후퇴시켜 버렸다. 여기에 운동권의 일부가 역사를 오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천만의 일이 아닐 수없다.
‘민통련’의 특정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민중 운동권의 분열과 함께, 보수 야당의 한쪽 당사자로 하여금 그것을 빌미로 하여 분열주의 노선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구실을 주었다. 그 결과 선거 국면을 범민주연합세력 대 군부독재정권과의 대결 구조가 아니라 경상도•전라도 그리고 충청도의 각 지역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사실 지난 선거에서 첨예하게 드러난 지역 감정은 물론 과거에도 지역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처럼 이 나라 전체의 운명과 결부하여 깊이 우려할 만큼의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역대 군부독재정권이 조작한 가장 커다란 죄악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지난 양대 선거에서 이토록 격화된 것은, 순전히 기성 정치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 것으로 자신의 개인적 야심도 한몫을 담당하여 지역 감정을 더욱 심화시킨 결과였다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야권의 분열은 정책적인 차별성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지역적 연고를 등에 업고 대권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군정을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감과 민족사적 대의를 망각한 채 어제까지 함께 민주화 투쟁을 해왔던 동지들끼리 서로 물고 뜯는 추악한 싸움을 벌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국민들의 염원과 기대를 배반하고, 국민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반동강이 난 이 땅의 현실도 서러운데, 좁은 땅을 몇 동강이로 갈가리 찢어 놓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사실은 이러한 오류가 범민주 세력을 약화시켜 군부정권올 합법척으로 인정해 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이다. 그토록 많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피끓는 젊음을 바친 숭고한 죽음,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며 싸운 투쟁의 결과, 가까스로 쟁취한 직선제 개헌이 두 김씨의 개인적 야심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그 대신 5.l7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세력의 도덕적 정통성을 정당화시켜 주는 들러리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이라고 할 것인가. 이에 관하여 당사자인 두 김씨 자신들은 집권 세력이 정보 공작 정치를 하여 둘 사이의 힘의 균형이 깨뜨려지지 않게 원격 조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김씨는 결과적으로 공작정치가 바랐던 구도에 가장 충실하게 대변해 주었다.
또한 불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은, 세간에서의 이러한 오류를 냉철히 지적하여 깨우쳐 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향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출세간의 승려운동가들이 도리어 여기에 편승하여 ‘진흙탕 속의 개싸움’ 〔泥田鬪狗〕으로 비유되는 지난 선거에서 앞장서서 선봉장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중불교운동이 대중 속에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과오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이 사실은 민중불교운동의 부분적 과오가 민중불교를 대중 속에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커다란 결점으로 남겨질 것이다.
지난 선거에 있어서 화합이 아니라 상대적 차별성을 내세워 분열의 논리를 택한 적지 않은 불교운동가들의 과오는 철저히 비판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그것을 막지 못한 우리 모두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면책될 수는 없다. 그렇다. 우리 모두가 참회하지 않으면 안된다. 권위는 도덕적 정당성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일부 불교운동가들이 행한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땅에 떨어진 불교운동의 공신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사참(事懺)의 형식을 빌어 공개적인 참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참회없이 어찌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원효성사는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에서 “깨달음은 광명(光明)한 것이며, 깨달음의 철학은 바르고〔正大〕 그 이론을 실천하는 사람은 화합(和合)해야 한다”고 갈파하신 바있다. 실제로 성사는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사상을 설하여 삼국에 하나로 합쳐져야 힘을 역설하고 만법(萬法)이 한 맛〔一味〕의 대해(大海)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삼국이 하나의 민족으로 화합하여 이 땅에 전쟁이 없는 이상 사회인 불국정토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염원했다. 그리하여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온 몸을 던져 창조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보살의 원형(原形)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오늘날 우리 겨레는 본래 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잘려 남과 북으로 갈리어 분단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겨레가 겪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인 모든 피해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불교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 땅에 정토를 구현하는것’이라 한다면, 마땅히 우리는 분단된 이 땅을 하나로 합치는 분단극북운동, 통일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지난 양대선거 이후 불행히도 우리 사회 내부에서조차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격화되어 갈가리 찢어진 상황은 우리를 한없이 우울하게 한다. 통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과 북의 우리 겨레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단일민족이라는 대의(大意)로서 사상과 이념, 그리고 제도를 뛰어넘어 한 겨레로서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업임에 틀림없다. 그 길에 어떤 어려움이 중첩되어 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 반쪽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을 외적 모순이라 한다면, 보이지 않는 국경선으로 깊은 골이 패어 있는 지역 감정은 내적 모순이라고 발 수 있다. 통일은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동시에 추구하여 모순의 두 축이 만나는 극점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지역 문제와 분단 문제는 감정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서로 양태가 다른 것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한 민족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대의(大意) 아래 서로가 마융의 문을 열어 화합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맞물려 있다. 내부적인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집약되기 어렵고, 또한 전국민적인 힘의 뒷받침이 없이는 외세의 지배를 배제하고 진정한 민족의 자주화를 이룰 수 없다.
그렇다. 통일은 민족의 대화합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 내부의 분열을 방치한 채, 통일을 말하고 민족의 화합을 논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우리 자신도 화합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보다 훨씬 어려운 남과 북의 화합을 어찌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중요한 사실은 말로만 통일을 말하고 화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내부의 지역 감정의 앙금을 털어내 버리고 분열을 극복하여 화합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남과 북의 화합을 결단코 이루기 위해서라도 동과 서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 대화합이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화합해야 한다고 해서 잘못된 판단으로
역사를 그르친 사람들의 엄청난 오류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적 과오를 범한 당사자들이 국민 앞에서 참회하고 자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를 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무엇보다 먼저 지역적 편차를 제도적으로 극복하고, 지역을 볼모로 하여 정치적 입신을 기도했던 장본인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비판없이는 극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비판은 어디까지나 진실에 이르기 위한 수단임에 그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객관성을 잃고 단순히 감정적, 파당적인 차원에서 비방으로 흘러서는 안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어떤 노선이 정당한 것이었고 어떤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던가. 지난 일들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갈등과 반목을 벗어나 민족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분열을 극복하여 진정으로 화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불교의 실천 윤리인 중도 사상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킨 원효성사의 화쟁(和諍)사상은 이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온갖 이론들〔百家之異諍〕을 하나로 회통(會通)하여 양극단에도 치우치지 않고〔離邊中道〕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離邊非中〕이 화쟁의 논리이다. 하나 됨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고 하는 이원론적인 흑백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개울물이 흘러 강물이 되고 강물은 흘러 바다로 나아가듯, 만법(萬法)은 결국 한 맛〔一味〕의 바다(大海〕로 돌아간다.
감정과 편견, 사상과 이념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은 본래의 한겨레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겨레의 실존적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