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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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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 박용길 1988년 06월 76호
‘남방불교’ 붐(?)
요즈음 나는 달마다 거의 거르지 않고 보리수잎을 한닢씩 우편으로 받는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 보리수 잎들은 그 빛깔도 선명한 초록빛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인도땅의 어느 신새벽, 전날 갑자기 마음이 변한(?) 고행자 싣드하르트하Siddhartha가 그 밑둥치에서 실로 온 세상에서 ‘으뜸가는 진리’를 깨달은 덕분에, 종종 ‘부처 그 자체’, ‘불교 그 자체’로 상징되기까지도 하는,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 가운데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그 보리수 The Bodhi Tree’ 또는 그 이외의 진짜 보리수잎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리랑카Sri Lanka의 불자출판회 Buddhist Publi-cation Society에서 간행된 「보리수잎Bodhi Leaves」이라는, ‘남방불교’의 전법지(傳法誌)를 우리 말로 옮겨적은 소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소책자를 꾸준히 번역, 배포하고 있는 ‘고요한 소리’에 의하연, 「보리수잎」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간행되고 있는 ‘남방불교’ 문헌의 매월 발행량은 거의 일만권에 달하는데, 완만하기는 하지만, 그 양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독자층은 기존의 한국불교와도 그 인연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청장년층이 대부분이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남방불교’의 성전어(聖典語)인 파알리Pali어를 배우는 대중적인 모임이 출범하였고, 아울러 그 문법서와 회화(會話)책이 선을 보였으며, 일찌기 1930년대에 간행된 일본과 영국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이 영인(影印)되어 유포되기도 하는 한편, 빈번한 양국 불교인사들의 교류 끝에 마침내 스리랑카의 파알리대학 분교가 한국에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남방불교’에 대한 대중의 열기가 점차 그 도를 더해가리라고 짐작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흔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남방불교의 매력적인 요소들-간결단아한 경전의 문체, 구체적으로 전달되어오는 메시지, 사원 조직 및 수행 제도 등에서 엿볼 수 있는 엄격한 무소유, 그리고 승가의 뚜렷한 대(對) 사회적 기능 따위-은 자신의 흐트러진 수행 자세를 다잡으려 하는 이나 또는 방만하게 운영되어 왔던 기성 불교교단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강한 구심력을 형성시켜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자각에서 비롯되는 반성과 수행이 결여된 채로 일방적인 기대만 하는 것은 결코 어느 곳에서도, 말하자면 ‘남방불교’계서든 ‘북방불교’에서든 자신이 설 곳을 찾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남방불교’계 대한 위와 같은 기대와 현상의 올바른 전개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동안 학계 또는 교계의 전문가들이 적지 않게 ‘남방불교’의 여러 면모를 연구하여 소개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학술적이고 원론적이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너무 단편적이고 위아적(爲我的)이어서-위아적이라 함은 대승과 소승을 비교하여 말할 때 gms히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남방불교’의 전체 모습을 그런 대로 넓고 또 깊게 알고 싶어하는 일반 대중의 구미에는 그리 사근사근한 요깃거리가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방불교’와 남방샤쓰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이 글을 써오면서 남방불교라는 어휘에마다 모두 홀따옴표질을 해놓아 ‘문제 있음’이라는 나름대로의 의사를 표명하면서도 여전히 미결 처리인 채로 사용해 왔다.
남방불교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문제란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를 풀기 전에 우리는 지금도 여름이면 너도 나도 즐겨 입는 ‘남방샤쓰’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남방불교 이야기에 남방샤쓰가 대체 웬 말이오?” 라고 의문을 제기할 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남방샤쓰’란 말은 ‘남방(南方)’이라는 말과 ‘샤쓰’라는 두 낱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샤쓰’는 물론 간편한 속옷을 뜻하는 영어인 셔츠shirts의 일본어화된 발음-샤쯔シャツ-을 다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라 부르면서 변하여 굳어진 말이다. 복식에 관해서는 문외한인지라 이에 대해 섣불리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이 글의 논지를 벗어나는 일일 뿐더러 정작 그리 문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문제는 바로 ‘남방’이라는 말에 있다. 물론 ‘남방’이라는 한말로 ‘남방샤쓰’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남방’이란 ‘남방샤쓰’라는 복합어가 본디의 구성 단어로 분리되었을 때 기능상 하나의 독립된 어휘로 존재하는 그 ‘남방’을 말하는 것이다.
‘남방(南方)’이란 무슨 말인가? 그것은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치하에 있었던 남방제국(南方諸國)을 가리키는 그 ‘남방’과 같은 말이다. 남쪽, 남쪽 지방, 남부라는 뜻의 이 말은 지리학적으로 다소 어폐가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말하는 ‘남방제국’은, 남태평양상의 일부 섬들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사실 일본열도로부터 남서쪽에 위치한 동남아시아-이도 서구 중심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용어이다-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기야 세계 제패라는 기상(?)으로 전쟁을 시작한 그들에게 동•서•남•북이라는 국지적인 어휘가 뭐 그리 중요하기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인들은 아열대로부터 열대에 걸친 기후 분포를 보이고 있는 이곳 원주민들의 팔 짧은 평상복 상의를 또는 그것을 흉내낸 반팔 여름옷을 ‘남방샤쓰’라고 이름붙였다는 사실이다.
‘남방’이라는 어휘 자체가 일본 것이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옛날부터, 서방이니 북방이니 하는 말과 더불어, 방위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사용되어 왔으니 말이다. 다만 문제는 일본인들이 ‘남방샤쓰’라고 할 때의 그 ‘남방’과 같은 뜻의 쓰임새로-어쩌면 별 생각없이-’남방’이라는 말을 ‘남방불교’라는 말에 그대로 적용하여 사용해 왔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이 말이 우리나라 불교계에 그대로 유입되어 무비판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렇듯이 어휘 하나의 사용에서도 우리는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앞서 나아가는 일본의 불교학계를 부분적으로 맹종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반성이 결여된 한국 불교학의 서글픈 현실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좌부 불교
‘남방불교’의 ‘남방이라는 말에는 현실적인 오류도 적지 않다. ‘남방불교’의 종주국인 오늘의 스리랑카가 과연 ‘남방’에 포함될 수 있는지, 그리고 비에트남도 ‘남방’에 속하는지, 만일 비에트남이 ‘남방’에 속한다면 그곳의 불교가 ‘남방불교’가 아닌 ‘북방불교’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는지 모르겠다. 한편 ‘남방’이니 ‘북방’이니 하는 접두어로 불교라는 하나의 유기적인 신앙 체계에 국지성(局地性)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왜소화시키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것 같다. 그리고 그 두 접두어로 수식된 용어만을 볼 때에는 필연적으로 불교의 인도적인 배경과 그 전통이 퇴색되어 버린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남방불교’라는 심정적인 용어는 새롭게 정비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으로?
오늘날 ‘남방불교’의 나라로 지목되고 있는 나라들-스리랑카, 버어마, 라오스, 캄보디아, 타일랜드-의 불교 교단이 내세우고 있는 교설은 모두 이른바 ‘소승이십부파(小乘二十部派)’ 가운데의 한 부파인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에 속한다. 유럽과 미국의 불교계에서 ‘남방불교’를 ‘Theravāda Buddhism’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물론 상좌부에도 여러 부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힌다Mahinda에 의해 세일론(1972년에 그 이름이 바뀌기 전의 스리랑카의 국명)에 전해진 불교는 ‘상좌분별부(上座分別部)’에 속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세일론 내에서 그로부터 다시 다섯 파가 분열되어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것은 ‘대사파(大寺派, Mahāvihara)’라고 부르는 파인대 보수-정통의 경향을 견지하며 오늘날까지 번성해 오고 있다.
필자 생각으로는 ‘남방불교’보다는 오히려 ‘상좌부불교’라는 명칭이 스리링카를 비롯한 동남아각국의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 더 타탕하다고 본다. (아니면 그 전파 경로로부터 비롯된 ‘남전불교(南傳佛敎)’라는 명칭도 무방할 것이다.)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남방불교’라는 용어가 가진 모호한 개념으로부터 빚어질 수 있는 적지 않은 혼란과 왜소감을 말끔히 씻어 버릴 수가 있어서이다. 여기에서 대중부(大衆部)와 맞섰던 인도 대륙의 ‘본상좌부(本上座部,Theravāda)’와 오늘날의 ‘상좌부Theravāda’를 이어주는 본질적인 동질성 여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최초로 세일론에 전해진 상좌부불교의 교설 및 실천론에도 그동안 세일론의 역사와 더불어 다소 변화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통 상좌부의 본질적인 면모를 거의 다치지 않은 채로 오늘날까지 ‘남방불교’가 존속해왔다는 객관적인 믿음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된 믿음일 것이다.

만원버스와 ‘프라이드’
먼저 ‘프라이드 Pride’라는 특정한 차종을 선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다만 그것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이용하고 있는 승용차 가운데에서 크기가 가장 작은 차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리고 그와 반대로 크기가 가장 큰 승용차인 버스와 좋은 대비가 될 것 같아서 잠시 인용하는 것일 뿐이다.
버스의 유용함이야 자가 승용차가 없는 이들에게는 거의 절대적이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싣고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 그 효율성 또한 ‘프라이드’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만원버스에 시달려 본 이라면, 버스라는 대중 교통수단의 그 효율성을 새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차’보다는 ‘큰 차’를 타고 다닌다는 억지 자위 대신, ‘프라이드라도 좋다, 자가용만 있어다오’라는 간절한 기원과 함께, 혼잡한 길거리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그 작은 차의 또 다른 효율성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거꾸로 작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다. 크건 작건 나름대로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이렇듯, 다소 무미건조한 논리지만, 느닷없이 차를 비유하여 말하는 까닭은 ‘북방’의 대승불교도들이 ‘대승’의 참뜻도 알지 못한 채 ‘남방’의 소승불교도들을 우습게 보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이다. 마치 버스를 탄 이가 ‘프라이드’를 탄 이를 보고 억지 자위하는 것 같은 그런 일 말이다. ‘남방불교’ 교단이 그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그 고유한 기능과 실질적인 기여로부터 비롯된-에 대해 다소라도 아는 바있다면, 대승불교도들은 기꺼이 그들로부터 ‘참대승행’을 배우라는 말이다. 그리고 ‘소승’이라는 말만으로 그들의 심량(心量)을 재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두어야겠다는 말이다. 버스 탄 이가 아전인수격으로 내뱉은 ‘큰 차(大乘)’니 ‘작은차(小乘)’니 하는 구차한 분별은 실로 신중히 분별하여 써서 스스로 우쭐해하지 않고 남도 업수이 여기지 않는 마음으로 그저 한길〔正法, Dharma〕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자는 말이다.

다음 호에는 “상좌부의 이모저모”가 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