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도인을 숨기려는 듯
청산은 깊고 또 깊고
복사꽃은 일없이
고불古佛의 마음을 붉게 토하네
경허스님이 영원사가는 길에 읊은 시다. 그러나 그가 더듬었던 길이 차가 다니게 만든 이 길은 아닐 것이다. 산짐승이 낸 걸, 그 길의 흔적을 쫓아 사람이 지나다니게 되는 길은 에둘러 나지 않는다. 헛된 품 팔 리 없으나 남천 넘어 외지로 통하는 산길 지름길은 따로 있다.
산속 절은 갑자기 나타난다. 늘 그렇다. 선인들이 내놓은 길, 그 위로 제 발자국 찍으며 두발 옮기면 되는 일이련만, 제 마음에 난 길이 없어 그런가 한치 발 앞이 낯설다. 고개 박고 걷다가 문득 고개 들면 거기에 절은 있게 된다.
이 산중이 어떤 산중인가, 지리신의 주맥에서도 연하천 산장이 있는 명선봉 약수암을 거쳐 실상사에서 끝난다.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이 중기가 가장 높이 뿜어 올린 산이 삼정산, 영원사가 업고 있는 산이다. 절은 900미터 고지에 있으나 “학이 둥지를 트는” 길지로서 바람이 세지않고 볕이 바른 곳, 오십 평 법당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에 당호를 적은 편액조차 없다. 그러나 일자로 버티고 선 품이 팽팽하게 마주보는 산들과 겨룰 만해 보인다.
대일(석주)스님, 한시간 남짓 되는 거리로 떨어져 있는 상무주암에서 십 년이 넘는 세월 보내고 난 뒤에 이 곳 영원사로 내려온 것이 72년이었다. 그때에 이 곳은 귀 떨어진 청매스님의 부도탑뿐, 먼저 살던 스님이 치던 벌통 열 하나와 흙 토담집 한 채뿐이었다. 한 삼년 싸리꿀, 밤꿀 등을 땄다. 그러나 가을부터 봄까지 꿀통을 따뜻이 덮어주어야 할 만큼산도 깊고, 나무가 자라면서 지운 그늘에 밀원마저 시원찮아지면서 그마저 접었다.
그런 가운데 세운 불사 원력 끝에, 완공되기까지 십 년 가까이 걸린 법당 건물말고도, 요사채 세 채와 오십 평 식당을 비롯하여 편의를 위한 갖가지 시설장 등 열한 채의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섰다. 가흥교 건너에서 부려진 자재들을 놉을 해서 이고 지거나 목도로 실어 나르면 꼬박 한 나절이 걸리던 길, 그 길이 실덕, 하정, 삼정으로 버스종점이 연장되어 들어오면서 조금씩 짧아졌었다. 정면 7칸으로 작정했던 법당이 5칸으로 줄고, 함석지붕이 고령 기와로 바뀌어 얹히고, 대중은 둘이다가 서넛이다가, 혼자 있는 날도 숱했던 지난세월, 그 세월은 도량끝을 지키고 섰는 느티나무가 다 지켜보았을 터였다. 수령이 육백 년은 좋이 되어 보이는 훤칠한 느티나무다. 서울 남산의 대원사로 가기로 되어 있던 법화사의 대세지보살이 인연 따라 이 곳으로 이운되던 것도, 제게 오려던 법복 시주를 형상은 거룩하나 입성은 초라했던 “노랑 할배” 개금 불사로 돌리던 일도 흡족히 지켜 보았을 것이다.
제 목숨이 삼겨지기 전의 일은 알 수 없겠으나, 잎을 피우고 가지를 벌이어 드리운 그늘 아래, 그 아래서 펼쳐지고 사라졌을 갖가지 일들은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터였다. 산라경문왕 때에 영원 조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갔는지, 영원사에 보관되어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은 서산의 법사인 부용 영관을 비롯한 일백아홉 명 조설이 이 곳에 좌중했다 전하니 그들 모두를 고스란히 친견했을 터였다.
그 가운데서도 청매 인오, 지켜보는 대중 한 사람 없이 열반에 들 적에, 당신이 바람벽에 칠한 똥이 황금으로 화하면서 그믐날 어두운 삼정산을 온통 환히 밝히었다는 그의 방광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지금 현재 절 뒤켠에 모셔져 있는 그의 부도탑은 몰려 드는 객이 성가실 만큼 자주 방광을 했다는데, 해방 이후 어지러운 시기에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가 다시금 두어 번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던 기막힌 꼴도 말없이 두고 보았을 것이다. 제 몸을 어루만지던 서산과 사명의 손길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금산사에서 베풀었던 화엄 법회에 모인 학인이 일천사백, 그 일을 두고 혹세무민으로 무고를 당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던 환성 지안, 그가 이 곳에 머물었을 때, 제 그림자를 드리워 땀을 식히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설파 상언, 화엄에 특히 밝았던 그가 이 해 주석한 뒤로는 유명 강원으로서 호를 떨치기도 했거니와, 말년을 염불로써 정업을 닦았다 하니 그가 외던 염불 또한 밤낮으로 들었을 터였다.
일제 시대 때 찍은 사진에는 너와로 지붕을 인 거대한 선방과 법당을 비롯한 아홉 칸 당우에 흰 옷 입은 사람들로 도량이 가득하건만, 실화로 영각만 남기고 다 타버리던 날을, 여순 반란 때는 반란군이 아지트로 삼은 이 곳을 진압군이 불을 질러 초토화시키고 말았던 날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느티니무가 오늘 “도반의 눈으로”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침부터 홀로 일어나 개울가를 거니나니 칠십 평생 지난날이 거울 속에 되비치는”(기암 법견) 나날 보내고 있다 할 대일스님의 일상일 것이다. 불사로 기진한 하루의 끝에서도, 드문 일이나 수월한 출타길이 될 수 없었을 날에도 정진의 자세를 누그러뜨린 적이 없었다.
사십 년을 뿌리라도 내린 듯이 지내온 끝이면, 지리산이 깊고 넓다 하나 주 등산로쯤은 꿰어서 길라잡이 노릇도해 줄 만하건만, 어느 해에 그에게 사형이 되는 해인사 혜암스님을 모시고 길 안내를 나섰다가 “망신만 당한” 산맹山盲이다. 어떤 꽃이 어느 철에 장하게 피는지도 모르고, 숱한 산짐승이 산다 하나 산에 잘 안 쫓아다녀 보아 한겨울에 절 가까이로 마른 시레기 먹으러 내려오는 순한 짐승정도만 눈에 띄어 보았을 따름이다. 무슨 일에 골몰하여 그렇게 주위에 무심하였나.
올에 세수 일흔, 인곡스님을 은사로 해인사로 출가한 것이 스물한살 때, 그러나 그에게 산문 안 생활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유학자이던 속가의 부친이 아내와 사별하고 출가, 당신이 창건한 경주 법흥사 등에서 이미 수년의 세월을 보낸 뒤였기 때문이다. 강원은 한 철이나 살었나, 공양주 삼년을 살었던 원적사, 묘적암, 동래 척판암 등을 거쳐 이 곳 지리산으로 왔다. 보조스님이 대혜어록을 읽다가 깨친 곳 상무주암,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일념 회광으로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디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부처임을” 알게 된 곳이다. 염송 설화 서른 권을 지은 구곡 각운에게 제 몸의 털을 보시한 족제비가 사리를 남겼다는 곳이다. 수승한 수행터이나 스님 둘만 살아도 범이 한 사람을 물고 가버리고 마니 혼자 공부할 수 밖에 없는 혹독한 수행터, 그곳에서 삼십대를 꼬박 바친 십 년 세월이 영 허망하지는 않았으련만, “통 밑 빠지는 소식커녕, 아래 위 ‘따까리’가 아주 꽉 막히어 동인 줄도 서인 줄도 모르고 살았을뿐”이라 말한다. 말로써 드러낼 일 아니나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음을 서운해 할 바 아니다. 그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知者不言)”는 이치로나 짐작할 일이었다.
나무가 많으니 목물木物이 유난히 성한 곳이기로, 봄이면 절산에서 똥땅똥땅 나무패는 소리가 나도,그저 위에서 연장 뺏으러 간다아, 소리나 한번 질러 보고말곤 했었다. 어려운 시절 함께 보내면서 그저 마을사람에게 인심이나 잃지 않고 지낸 세월이라 했다. 옳은 공양주도 없이 손수 밥 익혀 먹기 일쑤이던 나날, 거의 독살림이다시피 해 온 나날 보내는 동안, 저도 알 수 없는 사이 제 맘 닦는 각오가 눅어질 법도 했겠건만, 오늘 그가 댓돌 위에 벗어 놓는 신발 두 짝이 흐트러지는 법마저 없다.
“말에는 채찍이 필요하고, 활에는 트집난 활을 바로잡는 활도지개가 필요하다” 했다. 그러나 제가 갖춘 채찍과 활도지개가 없지 않으나, 가두어야 할 엇맘이 없으니 힘을 강제할 것들은 이미 저와 한 몸이 되었을 터였다. “소리와 모습이 분명한 곳에 말없이 앉아 있는 주인” (청매 인오)으로서, 그저 산에 부는 바람처럼 거칠 바 없고, 흐르는 물이 내는 소리처럼 자연하다.
그것이 금생에서만 이룬 바인가. 부친이 꾼 태몽, 지리산에서 왔다며 노장 한사림이 예를 올리는 꿈을 꾸고 얻은 몸이라 했다니, 전생에서도 “꺼벙하나마” 중노릇을 하긴 했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이 곳에서 이리 오래 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날마다 새롭다 하니, 그가 전생에 공부 짓던 곳도 이 곳 영원사였으리라.
금생에는 안 되어도 후생에서는 성불 가능성이 좀 많다 카대. 그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좀 좋대. 일생이 퍼뜩 하잖아요, 그제, 일생이 퍼뜩하거든.
그저 이런 큰 집에 나 혼자 이리 오래 실었다 카는 기 미안하지. 앞으로 공부하는 스님들이 여기서 몇이 좀 모여 살아야 할낀데.
그러고 보니, 편액을 걸어 당호를 적어 두고 있지 않음은 그의 이런 안타깝고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던가 보았다. 앞산에 견줄 만한 당당한 기상이 풍기는 이 건물은, 앉아 있으면 태산을 깨부실 용맹심으로 공부가 지어지는 곳이라야 한다는 그의 마음이 실린 곳이다.
구산선문 가운데서도 도량이 척되고 난 뒤로 가장 저 선풍을 떨친 실상사는 여기서 날등으로 한나절 거리에 있는 곳이다.
포행 삼아 다닐 만한 거리, 전해지는 기록이 없는 앞머리 세월에는 아마도 좌복위에서 도를 닦는 수행자들이 메꾸었으리라 그는 짐작한다. 비롯됨이 그러했던 바, 그리고 이 어름에서 사십 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살림은 아무리 했더라도 놓치지 않고 애쓴 것 있었던 바, 그가 이 해 달고싶은 당호는 “두류 제일 선원”이다.
화순 운주사에서 공양주 노릇을 하던 젊은 아낙이 어린 남매 물을 데리고 이 곳에 왔다가 도량에 반해 눌러 앉은 곳이다. 어미를 닮아 눈썹이 똑같이 짙은 두 아이가 산 아래 마천초등학교까지 두 시간 걸려 내려가는 길, 그 길 되짚어 나가자니 비가 내렸다.
땅에 내려앉아 잔뜩 무겁더니 하늘은 기어히 물방울로 제 무게를 땅 위에 부려 놓는다. 개울물 위로도 혼적 없이 내리고, 해 바른 두렁을 조심조심 푸르게 덮어 가는 풀 속잎까지 적시는 저것, 가뭄으로 잎 끝이 타들어 간 보리 싹 위에도 내리는 저것은 비가 아니라 얼음기 섞인 눈인가 보았다.
반쯤 번 산수유꽃망울도 비에 젖으니, 막 눈물 그친 아기 속눈썹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