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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가 보는 사주팔자론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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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진열 1988년 06월 76호
아마 독자는 이 글의 제목을 찾아 펴면서 호기심과 놀라움이 뒤섞인 웃음을 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대체로 그 부류를 나누어 보면, 첫째, 그냥 관심을 갖는 사람, 둘째, 전문적인 이해를 가지고 상당한 지적까지 하는 사람, 그리고 세째로 쓴 미소를 지으며 항의하려고 하는 이른바 서양식 색안경을 끼고 바라다보는 사람들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와 둘째는 긍정적 시각이요 세째는 부정적 관점이다.
우리는 어떤 사상(事象)을 놓고 긍정적으로도 혹은 부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삶과 자연은 다원적 가치와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저 앙굴리마라 같은 살인자가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거룩한 부처님 같은 성자도 될 수 있는 속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인간을 대우주에 비해 소우주라고 하듯이, 인간의 모든 현상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속성의 표출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두 나름의 존재성과 당위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수 있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면 삼라만상은 일심진여(vairo•cana)의 화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나타난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다. 같은 물이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마시면 젖이 된다고 하듯이, 모든 대상을 대할 때의 내적인 태도 여하에 가치와 진리의 관건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칼을 가지고서도 과일을 깎을 때는 유용한 진리이지만 사람을 찔러 죽일 때는 반진리의 행위가 되는 이치대로, 우리는 모든 대상거리를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여 진리화하느냐라는 문제에 심혈을 기울일 일이지, 무턱대고 외물을 백안시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강의해 나갈 사주팔자론도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주팔자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역리(易理)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 있는 것이다.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사장(事象)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혹자는 물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천민화(?)되어온 사주팔자를 굳이 변명하고 설득해가면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이렇게 질문하는 데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 자체부터가 편견과 선입견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사주팔자론같은 역리를 개괄적으로나마 연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주팔자론 같은 역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역리학을 천시해 버리는 것이 현대 교육과 교양을 두루 갖춘 엘리트의 처신인 양 생각한다. 또한, 역리는 미신의 대명사요 역리를 경멸하는 것이 교양을 갖춘 지성인의 처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누가 사주팔자를 이야기하면 그 앞에서는 비웃음조로 웃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마음이란 반드시 과학적이고 지성적인 것만은 아니므로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역리에 대해 결코 비웃을 필요는 없으며, 모르면서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 알고서 생활에 유용한 참고가 되도록 힘쓸 일이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는 배우고 나서 의논할 자세를 갖출 일이다.
한편, 이 강좌를 마련한 동기와 목적은 첫째, 동양적인 우리의 문화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둘째,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분수를 지켜가며 자기의 길을 바르게 가기 위해서, 세째,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해서 등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더 부연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과연 ‘미신’(迷信)인가.
‘우리 것’을 지키는 한 방법으로 ‘미신’이란 개념과 그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원래 ‘미신’이란 메이지유신 시대의 학자들이 서양을 배우고 나서 서양의 Superstition을 ‘迷信’(멍청하게 믿는 행위)으로 번역한 데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Super(beyond-어긋난, 벗어난) +stition(state. 일상적인 상태, 상식)에서부터 비상식적인 행위, 정상이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일본 학자들이 미신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러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서구에서 전통적으로 기정사실화된 일반적인 상식과 정상적 인식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기저로 하는 상식과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신관체계와 맞는 것이면 정상에요 거기에서 벗어나면 비상식, 비정상이다. 이를 종교적으로 번역하면 기독교의 신관체계에 속하는 것은 바른 믿음〔正信〕이요 거기에 맞지 않으면 삿된 믿음〔迷信〕이다.
기독교의 신관이란 “자기〔Yahweh〕외에 다른 어떠한 존재도 신앙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연역된 헤브라이즘 Hebraism 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헤브라이즘말고도 많은 주의, 주장들이 있다. 헤브라이즘이 다른 사상체계보다 월등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헤브라이즘보다 더 가쳐있는 신념체계들도 많다. 가령, 동양사상은 편협성을 지닌 헤브라이즘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가치체계 중의 하나인 헤브라이즘을 절대 신조로 삼고, 다른 전체를 무시해 버리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는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서구의 열강이 동양을 식민지화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줄곧 서양식, 더 정확히는 미국식 교육풍조 아래서 길들여져 왔다. 미국과 서구 정신적 기저는 헤브라이즘이므로 동양의 사상(事象)들은 자연히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요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양의 뭇 전통은 켸켸묵은 야만적 유산이며 원시적 미신이다’라는 동양 능멸인식의 주입이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불교와 유교를 우상과 미신의 온상으로 매도하여, 그들의 사회적 토대를 견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의 으뜸가는 공로자는 주한 서양인 선교사들이며, 다음이 그들에게 배운 기독교계의 성직자들이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의 사상(事象)과 뿌리를 거부했던 기독지성인들은 적어도 70년도 후반까지는 ‘한국 전통 거부운동’을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맹렬하게 전개해 나갔다. 그들의 한국(동양) 전통 근절운동의 첫 작업은 불교와 불교 주위에 있는 사상(事象)들을 모조리 ‘미신’, ‘우상’으로 싸잡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공간을 기독교의 신앙체계로 메꾸는 일이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사주팔자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이처럼 우리의 것을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식당해 왔음을 이제라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공정하지 못하게 냉대받아온 우리의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이 글의 두번째 목적이기도 한 바른 길로의 지침으로 참고하기 위해서는 긍정적 시각에서 사주팔자론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흔히 우리의 이성과 감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예수교인은 ‘신의 뜻에 의해서’, 불교인은 ‘다 인연이다’, 이슬람교도는 ‘모두 알라 Allah의 뜻에
따라서’라고 얼버무리며, 전통적으로 동양인은 ‘그건 운이다’고 해석해 버린다. ‘신’과 ‘알라’와 ‘하늘’과 ‘인연’과 ‘운’은 모두 같은 궤적을 밟고 있다.
그래서 ‘신의 뜻’에 의한 신학체계, ‘인연법’에 의한 교학체계, ‘천명(天命)’에 따른 유교철학 등이 있으며, 또한 ‘운’에 따르는 역리학이 있다. 이처럼 역리학은 다른 종교, 철학과 차원을 같이하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종래의 ‘운’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모조리 버리고 새로운 차원에서 현대적인 재조명이 있어야 한다.
다음 불교를 홍보하기 위한 외연적 구조를 보자. 역리학의 ‘운’은 우리의 인식구조 속에서 비하된 개념으로 남아있지만, 실상은 불교의 업론과 연기설에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서양의 상당심리이론도 있으나, 동양의 인생상당이론, 학설이라 할 수 있는 역리학은 서양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특징과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만큼, 불교 속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공존해 왔던 이 이론을 잘 활용한다면 인간의 삶에 큰 덕이 될 것이다. 업설과 연기법에 관계되는 이론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큰 스님네들은 그것을 응용보제(普濟)하였으며, 지금도 항간에는 으례히 스님네는 그것을 잘 아시는 것으로 믿고서 의탁, 질의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것이 사도(邪道)인 양 배척해 버리고 신장전이나 관음전에 절이나 하라고 한다. 그 중생을 이끌어야 할 성직자가 그 책임을 마냥 신장전이나 관음전의 절과 발원으로 때워 냄겨 버린다.
「금강경」에 ‘불법에는 일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다. 잘쓰면 정법이요 잘 못쓰면 사도인데, 무엇이 정이고 부(否)인가!
요컨대, 인간이 저지른 잘못과 해독은, 그 책임이 역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행위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유용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인간의 양심과 종교적 양식에 달려 있다.
앞으로의 강의는
1. 역리의 기초입문
2. 사주의 중급원리
3. 사주의 고급응용 으로 나누어 진행하려고 한다.
원래 역리는 수학의 체계와 비슷해서 기본적인 공식과 원리를 모르면 전혀 그 윗단계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처음부터 보조를 함께 하기를 바란다. 아무쪼록 계속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지도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