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식과 민중의례 1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기획연재 - 진철승
1988년 06월 76호
한국민중사, 혹은 민중불교사에 관한 일반적인 서술을 접하면서 항상 느끼게 되는 의문이 있다. 왕조사나 지배권력 사는 논외로 치더라도, 대부분의 역사 서술이 주로 사건사나 운동사 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도식적인 틀에 따르는 분야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아마도 민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라는 새로운 역사 인식을 획득한 근래에 이르러서도 민중들의 삶에대한 모든 것이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중사는 기본적으로 생산노동자들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 생산노동과 관련된 ‘세계관’과 ‘조직’에 의해 꾸려진 삶의 역사이다. 그러나 민중의 삶은 무기록성, 익명성, 생활성, 실천성 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에는 거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민중의 삶의 참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민중의 삶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내는 역사적 상상력과 올바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충분히 다가섰을 때 비로소 민중들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대동의 집회였던 ‘민중의례’의 중요성에 눈뜨게 될 것이다. 민중의례는 민중의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요구와 바램을 담아내면서 더욱 정교하게 그 틀을 다듬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100여 년 사이에 제국주의의 침탈과 자본 제도의 이행에 따른 생산 방식의 변화 때문에 많은 변질이 있었지만, 그래도 민중사 서술에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민중의례는 ‘대동굿’과 ‘불교의식’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고 하겠다. 먼저 대동굿의 세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굿은 순수한 우리 말이다. 우랄알타이어계에 속해 있는 퉁구스어의 ‘Kutu’, 몽고어의 ‘qutug’, 터키어의 ‘qut’ 등과 ‘굿’은 모두 같은 어원을 갖고 있으며, ‘행복’이나 ‘행운’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굿은 재액을 물리치고 행복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굿은 역사 속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먼저 계급 분화로 인한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던 고대 사회에서 굿은 전체 사회가 공동으로 행하던 공동의례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군취가무(郡聚歌舞)의 제천의례(祭天儀禮)였던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이었다. 물론 부여나 고구려 등이 고대 노예제 사회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굿이 이미 지배 집단의 필요에 의해 치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때까지는 외적과 자연의 위협 앞에 공동으로 대처하던 원시공동체 사회의 특성도 많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굿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가무음주로써 하늘에 제사지내는 전통을 산천제(山川祭), 농신제(農神祭), 기우제 등으로 계속 이어가는 한편,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영향과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신라의 화랑도와 같은 집회방식에 밀려 그 중심적 위치를 내어 주게 된다. 이 시대에는 중세적 봉건 지배가 정착되고 생산력이 아직 저급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좀더 주체적이고 조직적인 민중의례가 발전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원시•고대 사회의 농경의례로서만 굿이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굿은 지배계급의 형성과 유교, 불교 같은 새로운 이념체계 및 의례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중심적 의례에서 밀려난 채 피지배 생산대중들의 즉자적 농경의례 및 무굿과 같은 개인굿으로 전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배계급에 의해 주도되는 국중(國中) 행사와 피지배 생산대중의 즉자적 농경의례 및 개인굿으로 분화가 여전히 지속된다. 단지 불교가 좀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서 연등회나 팔판회 등과 같은 불교적 외형의 국중의례가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연등회는 전통적인 (광명)신앙 및 용신신앙 등 생산노동과 관련된 의례와 불교의 등공양(燈供養)이 결합된 행사로 정착됨으로써, 단순한 지배계급의 국중 행사로서의 범위를 넘어 민중이 주체가 되는 의례로서도 가능했던 점이 주목할 만하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마을 공동체의 형성과 매향(埋香)의례의 관련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나 이는 6회의 ‘민간신앙과 미륵’에서 상세하게 다루었기에 생략한다.
매향의례의 주도집단이 군(郡) 단위에서 마을 단위로 전이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단적으로 마을 단위의 노동력이 필요할 만큼 생산력이 발전하였으며, 생산과 관련된 민중의례가 더욱 조직화되어 노동대중 중심의 의례로 정착되었음을 증명한다. 이 민중의례는 바로 민중 주체의 대동굿을 의미하며, 또한 성숙한 민중의 역량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은 마을 공동체가 고려말, 조선초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은 마을의 신목(神木)인 당목에서도 확인된다 역사적 기록이 모두 소멸되어 흔적도 없음에도 의연하게 마을의 형성과 발전을 증언해 주는 당목은 대개 육백년에서 이삼백년 전에 심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 당목이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이며 신성 공간이자 회의 장소이며 휴식처임은 이미 4회에서 설명하였다.
당목을 비롯하여 당산, 솟대, 서낭당 등을 중심으로 마을굿은 벌어진다. 마을굿은 고대로부터 풍농과 재난방지를 천지신명께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기본적 특성을 갖고 있지만 이전의 즉자적 농경의례와는 달리 생산노동자로서의 농민들에 자기 해방을 예비하는 집단성과 조직성, 전투성을 확보하는 기본 토대이기도 했다. 이 마을굿은 대개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벌어지는 세시풍속이기도 하다.
마을굿이 신년을 맞아 벌이는 상징적인 농경의례라면 두례굿은 생산노동과 좀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노동의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두레굿은 이조 후기에 이앙법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자 그에 따라 공동노동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형성되었다. 즉, 직파(直播)할 때와는 달리 한정된 시간 내에 모내기와 김매기 등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공동노동조직인 두레가 생겼던 것이며, 그 공동노동의 과정이나 전후에 행하던 의례가 바로 두레굿이다. 이 두레라는 조직은 생산조직이자 의례조직이며, 놀이조직이자 회의조직이었으며, 이조 후기에 각종 민란이나 변란, 혹은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하부 전투 단위로 재편되는 예비적 전투 조직이기도 했다.
마을굿과 두레굿은 민중들이 해방의 의지를 제고하고 계급의식을 다지는 틀이며, 동시에 실천적인 역량을 강화시키는 저수지였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의 크고 적은 모든 일이 이 의례의 시간과 공간에서 해결되며, 또한 갈등이 해소되고 집단적 동질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 모두를 일컬어 대동굿이라 하고, 그 구조적 특성을 살펴보자.
먼저 대동굿은 산신, 농신(農神), 조상신 등 생산의 풍요나 재액의 방지 및 마을의 수호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의 신격(神格)에 대한 제의(祭儀)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제천의례가 마을 단위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생산력의 발전과 마을 공동체의 형성 등에 따라 좀더 생산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기능신(技能神)에 대한 제의로 변모된 것이다. 마을굿에서는 마을의 수호신격에 대한 제의가주가 되며, 때로 무당이 신격과 교류하는 사제자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유교식 제의가 행해지기도 한다. 두레굿에서는 주로 농신(農神)을 모시며, 성인 노동력 조직인 두레의 성원들에 풍물을 치며 굿을 진행한다.
둘째로, 대동굿은 집단적 신명으로써 갈등을 풀고 집단적 동질성과 계급의식을 확보하는 마당굿이자 대동놀이며 축제이다. 이는 지배집단이 생산대중의 맺힌 한과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기 위해서 제도적으로 허용한 공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민중들이 현실에 대해 지닌 잠재적 인식이 그 구체성을 확보하게 되는 열려진 해방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정초의 마을굿에서는 지신밟기 등에 이어 마을 마당에서의 뒷굿이나 줄다리기, 석전 등 예비전투적 집단놀이로 진행된다.
두레굿에서는 음력 7월 보름을 전후하여 만두레, 즉 세벌김매기가 끝나는 백중의 호미씻이가 가장 성대하다. 이는 백중(百衆, 白踵), 호미씻이, 세서연, 꼼배기참놀이 등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나 모두 고된 논농사를 일단 마감하고 추수를 기대하는 노동에서 해방된 축제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세째로 대동굿은 마을의 크고 적은 모든 일을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대동회의이다. 굿을 치루기 위해서는 마을의 중심 노동력인 성인 남자들이 모두 모여서 경비, 역할 분담, 진행방식, 금기 등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마을 공동체의 당면 문제가 논의되며 정치 •사회적 이슈들이 거론되고 교육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대동굿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나, 일반적으로 굿이라고 하면 무굿으로 여기게 된 역사적 과정도 살펴보아야 하겠다. 무굿, 즉 무의(巫儀)는 본래 고대 제천의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삼국 시대 이후로 지배계급이 형성되었고 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불교 및 유교가 도입됨으로써 점차 민족의례의 중심에서 밀려나 보다 기복적인 의례로 전화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봉건적 착취에 신음하던 대중에게 주술적 기복의례로 뿌리를 내렸으며, 특히 사회적으로 지위가 열악했던 여성의 현실과 결부되어 여성 위주의 개인굿으로 정착된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아직도 어촌의 풍어제나 농촌의 마을굿을 주재하거나 참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부분적이거나 주변적인 기능에 머물고 있어, 생산노동과 관련된 민중의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굿은 역사 속에서 천대받고 소외받는 민중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그 한과 소망을 받아내 왔기 때문에, 그 의례의 진행 방식이나 표현에 있어서 민중적 틀로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관건은 민중해방의 의지를 얼마나 그 내용으로 삼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동굿을 중심으로 민중의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역사 속에서의 진보적 역할과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은 전혀 색다른 장벽에 부딪친다. 이는 굿이 중세봉건사회의 해체와 제국주의의 침략 이래로 거의 한세기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제 산업노동으로의 변화가 기본적인 요인이겠으나, 그보다는 일본제국주의와 기독교, 그리고 근대화개발 지싱주의자들에 의한 반민족적•반민중적 파괴 행위가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문화, 전통문화의 계승이 거대한 구호가 된 요즈음도 생산자문화, 민중문화의 핵심이었던 굿이 미신이나 푸닥거리로 치부되어 경멸받고 무시되고 있음이 그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민족자주의 문화 건설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민족•민중문화의 역사적 연속성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