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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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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여연 1988년 06월 76호
오월의 숲은 마치 이 대지의 온갖 푸르름을 다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초록빛을 더해 가고 있다. 그런데 서천에 뜬 초생달은 석탄의 축제에도 불구하고 창백하기만 하다. 또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번지는 어두운 회색 하늘이 우울하게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엊그제 통일의 한을 안고서 저 구천의 어느 하늘 자락으로 나부껴간 조 성만의 어린 영혼이 되살아나길 바라듯 바람이 숲들을 뒤흔들고 있다. 뒤집어져 꺾어진 잎새들은 다시 살아나서 진한 귀촉도 그 피울음 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꽃다운 그의 함성, 통일에의 절규, 그 메아리의 뒷길을 따라 내 마음도 실려간다. 차라리 그 울음을 따라서, 이 넘어져 다시 살아나는 숲의 가장자리에라도 엎어지고 싶은 심정, 그런 청청한 가슴이 무색하기만한 하늘이다.
우울한 회색 하늘은 작년 이때쯤 미국의 시골 덴버의 구름 낀 산 기슭에서 읽은 기사를 생각나게 한다. 뉴욕 타임즈의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콜로라도의 어느 집회에 내려 가서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더니 호흡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어떤 승용차 기사에게 가서 자동차의 엔진을 돌려 달라고 부탁하여 십 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배기가스를 실컷 마셨더니 숨통이 확 트였는데, 그는 이러한 경험을 몇 차례나 했다는 기사이다. 뉴욕의 혹독한 매연에 찌들어 길들여진 그의 폐가 콜로라도(록키산 주위의 시골도시)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 호흡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참으로 넌쎈스한 일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더욱 건강해져야 할 폐가 오히려 배기가스의 혼탁한 공기를 마셔야 정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사회가 당면한 현실 속에서 비쳐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미국 칼럼니스트의 폐처럼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버린 이 땅의 현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당한 일이 몰상식한 일로 매도되고, 어처구니없는 비정상적인 일이 당연시되는 풍토가 생긴 것은 이 땅에서 이미 오랜 일이다.
그러한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가장 크게는 민족통일의 일이 그렇고, 민주화의 물결, 자유의 바램이 그렇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민중의 생존권 투쟁인노동 쟁의가 그렇고, 군부 독재의 포로가된 양섬수의 석방이 그렇다. 또한 분단 44년의 깊은 모순과 질곡을 피로써 증언한 광주 오월 항쟁의 은폐된 진실을 역사 속에서 밝히려는 일이 그렇다.
근원적인 치료를 요구하는 상처로서 우리 민족의 인간 해방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민족의 분단 문제임에도 그 갈라진상황을 하나되게 하려는 조국 통일의 노력을 ‘상식’의 탈을 쓴 어처구니없는 ‘비상식’이 허물어내고 있다. 서울 올림픽을 우리 역사에 일찌기 없던 민족 제전으로서 민족의 평화통일의 디딤돌로 삼고, 일그러지고 폐쇄되어 있는 대화의 장을 활짝 열어젖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분단 올림픽을 고착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서로 신뢰하는 평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극단적인 군의 대치를 완화하고 휴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대치해야 하고, 우리 민족을 다 함께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핵무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는데도, 그러한 일을 위한 노력들을 반미주의로, 반국가 행위로 몰아 세워서 이 땅의 모든 젊은이들을 레드 콤플렉스의 강물로 익사시키고 있다.
지난 양대 선거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농민, 도시 기층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공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수세, 부조리한 관권의 농조(農組) 해체, 수입 개방, 잘못된 수탈 구조의 의료 보험 제도 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정당한 요구가 확산되는 것을 온갖 수단으로 막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도 KBS는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왜곡 보도를 일삼아서, 농성 노동자의 지극히 정당한 방어를 폭력으로 몰아 부치고 대기업만을 옹호해서 구사대 백골단을 덮어 주고 있으며, 이러한 부조리한 모습들이 이 사회에 넘치고 있다.
비리에는 성역이 없다는 정부가 5공화국의 비리를 척결하고 광주항쟁, 부정선거를 다시 조사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바램을 겉치레뿐인 낡은 옛 법의 틀에 맞춰 무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어찌 6.29선언의 그 빛바랜 민주화의 허구를, 그 도깨비 방망이 같은 허깨비를 들먹이며 내세우려 하는가.
오월의 숲에 다시 바람이 분다. 이 땅의 오욕을 쓸어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정말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도 체하지 않고 부드러운 하늘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그러한 건강한 폐를 갖고서 쓰러진 잎들이 다시 일어선다. 바람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