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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여성화에 대한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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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정숙 1988년 06월 76호
불교 인구의 3분의 2가 여성 신도라는 점은, 신도의 노령화만큼이나 불교 발전의 장애 요소로 문제시되곤 한다.
사회적으로 활동이 제한되어 있는 여성과 힘이 약한 노년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펴가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활동적인 청장년층 남성에 대한 교계 흡수가 미약한 현실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기된 지적이라는 점에서는 의미있는 출발이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 사이에-그가 여성이든 남성이든-보면적으로 퍼져 있는 의식 속에는 이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인력 편재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여성 또는 노년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와 구분을 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일면이 있다. 이런 잘못된 태도는 문제 제기의 출발점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게 한다. 더구나 그같은 무성의한 문제의식은 출발점에서의 안타까움이 얼마만큼 진솔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진정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널리 펴 이 땅에 불국정토를 이룩하려는 신심있는 불자라면, 쉽게 논의되고 당연시되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는 검토를 해야할 것이다.
문제 제기는 반드시 문제 해결의 방향을 가늠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확실한 상황 인식이 전제되어야 함에도 우리는 다소 건성으로 문제를 바라본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면서, 여성 불자의 역량을 재고하기 위하여 여성 불자의 신앙생활과 불교에 대한 인식 그리고 불교의 여성관에 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훑어보고자 한다.

1. 여성 불자의 신앙생활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분석의 작업으로서 불교 신앙의 내용을 크게 수행, 교학, 포교로 어림해 보는 것은 조금 거친 분류이긴 하지만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먼저, 우리에게 쉽게 떠올려지는 수행은 역시 기도라 하겠다.
신앙 형태로, 또 수행법으로 기도만큼 대중들에게 쉽게 접해질 수 있는 것은 흔치 않다. 그런 한편 잘못된 불교 신앙의 형태로 지적되는 문제점 역시 기도에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기도의 내용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합리적인 기도의 형식이 야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은 그 내용의 변화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 영락과 복을 구하는 기도-이것이 바로 불교의 여성화와 연관되어 바른 불교의 정착을 저해하는 미신적 기복신앙으로서 문제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복의 바른 의미를 되새김과 아울러 대다수 여성들의 기도 내용을 신중하게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기도는 비록 한 민족, 온 인류, 만 중생의 행복을 기원하고 참된 도를 구하는 원대한 뜻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지라도, 순전히 ‘나 한 사람을 위한 이기심’에 근거한 것은 거의 없다. 우리 자식, 우리 남편, 우리 가족들의 안녕을 기구하는 소박한 바램이고, 때로는 지혜의 짧음으로 인하여 부작용도 없지 않으나 그 바탕에 흐르는 애정과 정성, 그리고 절실함은 바로 중생 구제를 실현하려는 대승보살의 대비심에 근원하는 ‘이타행’인 것이다.
이처럼 절실한 대비의 원동력에 사회에 대한 바른 인식과 가르침의 방향이 주어진다면, 그대로 중생 구제를 서원하고 불교적 참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와, 연기적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극복하려는 진참회로 기도의 내용을 채우게 되리라고 본다.
보시나 인욕, 그리고 지계 수행에 있어서도 여성의 실천은 그렇게 부정적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더구나 여성의 주체적인 참여가 두드러지게 보이는 보시행의 경우, 연기적 삶의 구조를 바르게 깨달음으로써 삶의 방향에 일대 전환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도 작용한다. 따라서 대다수 여성 불자의 지대한 관심과 의욕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마련되고 그와 더불어 바른 지도가 이루어진다면, 여성 불자의 실천력은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불자의 교학에 대한 관심이나 열의도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부족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다수 노년층은 문자 자체가 지닌 어려움 때문에 의욕은 있으나 뜻과는 달리 깊이 공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노년층이나 여성 불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경전 강의나 불교 교회 및 사상 강좌 등이 마련되는 곳을 찾아다니는 적극성과, 빈약한 수준이긴 해도 서적을 뒤적이며 한 두 구절이라도 바르게 익히려는 꾸준함과 진지함이 나타나는 것도 현실의 한 모습이다.
교리 학습이나 대승 경전의 오묘한 내용, 그리고 학문적인 사상 강좌에 이르기까지 수강생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불자들에 대한 편견에 찬 의구심-과연 얼마나 알아듣겠는가. 다수 여성보다는 어리숙한 한 두 명의 남성들이 훨씬 빨리 이해할 것이라는 등-을 버리고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좀더 쉽고 실천 가능한 내용의 교리 학습의 체계를 세우기에 힘쓴다면, 무수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여성 불자들 속에서 뛰어난 이론가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포교 활동을 살펴보자. 사실 우리는 포교를 신앙 생활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익숙치 못하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 절반 이상이 ‘가르치는 행위’ 즉 전법 교화의 삶 자체로서 우리에게 그 내용이 전달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법 교화없이는 중생을 구제할 수 없으며, 중생의 구제가 없는 성불은 성불이 아니기에 포교란 불자의 당연한 의무이며 권리인 것이다.
포교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이점에서도 여성 불자에 대해 부정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비록 대규모의 포교 사업을 기획하고 진행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어도-이것 역시 교계의 전위적인 지도층이 여성에게는 중요한 역할을 분담하지 않는다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시작된 사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고 끝까지 마무리하는 여성 불자의 힘은 우리가 조금만 생각하고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내조의 차원이 아니다. 현재 우리 불교의 상황에서 단위 사찰이나 단체별 사업 진행을 볼 때, 전체 회원 사이에 뿌리를 두지 못한 남성 불자가 이름뿐인 대표자로 유명무실하게 사업 주변을 맴도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이런 경우에, 실제로 내조라고 일컫는 공앙과 허드렛 일에서부터 섭외, 기획 등 제반사업을 추진하는 일까지, 여성의 열의로 진행되는 경우가 흔치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과 아울러 여성 불자의 수가 많다는 사실, 특히 젊은 층에서도 불자의 증가 추세가 여전히 여성에게 치우친다는 사실도, 한편으로는 여성 불자의 포교에 대한 실천성을 반증하는 면이라고 하겠다.
중생 구제의 보살행을 자각한 적극적인 실천은 아닐지라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포교가 바로 여성불자들에 의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앙 생활을 모두 도외시한 채, 여성 불자의 역량이 기복적인 측면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불국정토의 실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되고 있다고 하겠다.

2. 불교의 여성관에 대한 여성 불자의 이해
이처럼 긍정적인 역량을 지닌 여성 불자가 다수 있으면서도 불교 발전에 여성이 스스로, 주체적으로 앞장서 나이감은 잘 허용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여성 불자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여성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그 원인 규명과 해결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
부처님께서 천명하신 이 말씀을 접하고 우리는 흔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고귀한 가르침을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아무런 스스럼 없이 확신에 차서 이 한 귀절을 자신에 대해 적용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궁극적으로 부처의 씨앗-불성을 지닌 일체 중생 모두가 성불하여 이 땅이 불국정토된다는 확신이 불자를 자처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가?
당신도 나도 불성을 지닌 중생으로 스스로 보살임을 자각하고 부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가르침의 소리가 크게 울릴수록 어둡게 움츠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사실 불자라면 누구나 만 중생의 불성을 확신함으로써 신앙의 출발을 이룰 수 있는데, 중생을 믿지 못하고, 인간을 그리고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우리의 포교에 힘이 없고 중생 구제 역시 적극적으로 실천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열등성을 강압받아온 여성에게는 불성의 내재에 대한 자신감이 쉽게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여성 성불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있지 못함을 짐작케 한다.
‘부처님도 여성 출가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는가? 여성은 늘 수행의 장애로 등장했으나 나의 여성 또한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기존의 생각들로 미리 움츠러들기가 일쑤다. 아무리 실천력이 뛰어나고 이론이 밝은 여성 불자에 대해서도, 그 능력과 자세를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여자이면서도 어떻게 저렇듯 잘 해낼까? 그렇지만 어떻게 그녀에게 설법을 시킬 수가 있겠어? 결국 성불할 수 없는걸. 수행을 열심히 해야 기껏 다음 생에 남자 몸을 받아, 그때에야 성불할 텐데…’
이러한 생각이 일반적인 남성 불자의 의식에 깔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남성에게는 스쳐가는 생각이라면 여성에게는 벗어 버리기 힘든 장막처럼 의식 전반에 드리워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여성에게 종속성과 열등성을 강요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우리 사회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세는 교단에 대한 이해에도 잘못된 시각을 제공한다. 하나의 동등한 공동체로서 승가이기보다는 출가 중심, 특히 비구 스님 중심의 사고가 일반적이며, 혹 비구니 스님이 중심이 되는 경우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바라보며 미덥지 않은 눈짓을 보낸다.
이런 상황은 많은 여성들에게 스스로 ‘여성’으로 인정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의식을 조장한다. 여생 불자의 경우, 그 의식의 표출은 일면 소극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숨어서 일하는 미덕을 보호막으로 삼아 혼자만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을 안 내보이는 것. 물론 숨어서 일하는 대다수 여성의 성실성을 모두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는, 어쩔 수 없이 ‘여성’임을 드러내서 들려오는 칭찬 뒤에 깔린 멸시를 알게 모르게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하겠다.
승단의 체제가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현실 때문에, 이 출가 중심, 비구 스님 중심의 신앙은 결국 개인적 유대가 지니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시킨다. 개인적 유대는 포교와 신앙생활의 정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 됨으로 해서 일어나는 폐단은 수없이 지적되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심각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여성 불자의 자각을 위한 전제인 단합, ‘우바이로서의 공동체의식 형성’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 스님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승려의 타락을 눈감아 주듯,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을 말할 때, 우리에게는 스스로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더불어 안고 있는 문제를 피해 가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여성이면서 인간이고 중생인 것이다. 회피하는 것은 개별적인 행위이며 일시적인 눈가림일 뿐이다.
이 ‘여성’이라는 울타리가 지니는 다양한 성격은 공업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공업력으로 깰 수 있는 것이다. 불법 안에 모인 여성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모여서 함께 일하는 것으로 ‘인간인 여성’임을 자각해야 한다.
부처는 주체적 인간이다. 부처의 씨앗을 지닌 우리 여성들 역시 누가 뭐라고 해도 주체적인 인간이다. 더 이상 스님의 신도로서, 행사의 꽃으로서가 아닌 스스로 책임지고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확고한 인간을 보여야 한다. 여성이 성불할 수 없다면 남성 역시 성불할 수 없으며,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성불은 여성의 성불을 포함하고 있으며 미륵의 성불 수기는 여성 성불의 예견을 알려준다.
문제 제기가 진정 해결을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현상 속에 흐르는 변화의 맥을 짚어볼 필요가 있기에, 투박한 대로 그 가능성에 대하여 시선을 돌려보았다.
진정으로 인간 해방과 불국정토의 실현을 이룩하려는 불자라면, 이처럼 역량을 지닌 여성 불자를 비하하고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