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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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5월 171호
백장白文 회해悔海스님은 당나라 중기에 태어나서 크게 활약한 선승이다. 남종선의 중홍조라 일컫는 마조 도일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어느 날 스승이 귀청이 떨어질 만큼 크게 대갈일성 하는 소리에 개오 했다. 백장스님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불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선원의 규범인 백장청규을 만든 분이다. 곧 보청작무普請作務라해서 선원에서 날마다 수행 하여야할 일과를 제정한 분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하루 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어라\' 는 뜻에서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 라고 하는 조목이다.
조선시대에 숭불억유의 시책으로 불교가 한참 어려웠을 때, 모든 사찰이 자급자족의 체제를 확립해서 기사회생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보청작무에 바탕을 둔 운력 동원 때문이었다. 실상 불교의 모든 율장에서는 노동을 금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는 땅을 한 자만 파도 지옥에 떨어지느니 하는 무시무시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노동을 기피하고 구걸로 연명을 하면서 오직 구도에 전념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데 반해 백장스님이 혁신적인 작풍을 일으킨 것이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은 전라남도 영광에서 1891년에 태어났다. 비록 탁발승은 아니었지만 그의 일평생 동안의 행적은 백장스님을 닮은 데가 있다. 초창기의 원불교, 그러니까 1920년대의 불법연구회 시절 작무운동을 바탕으로 교단이 일어섰기 때문이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른바 광혹편재狂感騙財라해서 \'남을 속이고 재산을 빼앗는다\' 는 말까지는 하지 않을지라도, 종교 단체의 재산 형성 과정에는 얼마큼 신자들로부터 의혹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향리인 영광땅의 갯벌을 일구어 옥토로 가꾸고 교단의 기초를 세운 박중빈은 남다른 데가 있다. 박중빈이 간척 사업을 시작하는 1918년쯤에는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경제 수탈을 병행하던 때이다. 그 무렵이 관서 지방에서는 남강 이승훈이 물산장려운동을 일으켜 민족 경제의 갱생을 도모
하던 시절이었다. 기미 독립운동의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한 분인 백왕성 스님도 뒤에 만주에 가서 간척 사업을 벌인 바 있다. 다시 말해서 192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 민족의 갱생과 독립 지존은 정신적인 혼으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인 조건의 확보가 그에 못지 않게 뒤따라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 듯하다. 그것은 당시의 우리나라와 처지가 비슷했던 인도에서 간디가 늘 물레를 옆에 두고 돌리면서 민중에게 자력 갱생의 이상을 펼치려했던 것과 일맥이 상통한다.
물론 박중빈이 내세운 영육쌍전靈肉雙全이나 이사병행理事拉行의 교리가 독립 국가의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실천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은박중빈이 간척 사업을 일단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뒤 현재 원불교총본부와 원광대학이 있는
전라북도 익산으로 본거지를 옮겨서 불법연구회를 만든 뒤 처음 내세운 지침이다. 오늘날에도 원불교 교리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 할 수가 있다. 먼저 영육쌍전 이라는 말은 정신과물질의 조화라는 뜻이 담겨 있고, 또 한편으로는 정신과육체의 일치라고 볼수 있다. 앞의 경우처럼 정선과 물질의 조화라고 해석한다면 또한 산업제일주의 신시대의 흐름에 적극 부응하자는 사고 같다. l9세기까지만 해도 산업이나 물질적인 생산관계를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물질에 너무 집착하면 고결한 뜻을 훼손한다\' 는 뜻에서 완물상지玩物喪志를 되뇌이던 모습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 발달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영육쌍전을 가지고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고 하는 해석이다. 지난날의 지식은 결코 정신과육체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20세기 들어와서 서구식 생각, 말하자면 근대적인 사유의 영향인 게 분명하다.
어떤 이는 이런 뜻에서 원불교의 근대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서구의 근대화가 정신과물질의 조화, 그리고 세속적 가치를 인정하는 청교도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비롯했다는 뜻을 염두한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기에는 원불교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원불교는 60년대이래 우리나라에서 신흥 종교 러시아워의 현상에 보조를 맞추어 중앙으로 일컫는 수도권 지역과 비 호남지방으로 진출하였을 뿐이다. 창교 당시의 왕성한 개척 정신과 신시대적 감각이 해방 이후 특히 실업계나 교육계에 번져 가기에는 지방교단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이제 이 이사병행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다른 종지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조선시대 불교에 理判이판과 事判사판을 구별하려 했던 노력을 연상시킨다. 곧 수도에 전념하는 이판승과사찰의 행정에 전념하는 사판승을 구별해서 교단 운영의 효율화를 꾀했다. 원불교의 이사병행은 아마도 조선시대이래 전통 불교에서 이루지 못한 과업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단일 종단으로서의 원불교의 거대한 체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보면 실로 조선시대이래 불교의 숙원인 이사병행의 목표를 달성해 가고 있는 듯도 하다. 따라서 실천 불교이자 생활 불교로서 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측면이 돋보인다.
누구든지 종교가 세속화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나 후기 산업화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세속화야말로 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다. 산 속에 숨어서 일사적逸士的 구도만을 고집하는 불교는 결코 대중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일원상一圓相의 동그라미는 그런 뜻에서 세속화의 상징으로 본다. 일원상은 아마도 한국 불교의 기축인 화엄종의 종지를 세속화한 모습 같다. 일원상의 동그라미는 원만구족과 장엄법신의 화엄세계를 간단한 도형으로 그려내려 한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찰라 이면서도 영원한 것, 그런가 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또 하나의 티끌 가운데 온 시방十方이 머물고 하나가 모두이자 전부가 하나라고 하는 의상스님의 법성계가 생각나는 대목이기도하다.
이 일원상은 분명 박중빈이 제일 먼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선풍을 크게 떨친 조사 스님들의 그림에는 어느 것이든 일원상의 동그라미가 들어가 있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사사무얘事事無碍라고 하는 화엄종의 종지가 뭉뚱그려져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 세상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저 그 모습대로, 원불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사태인 것이다. 아마도 박중빈과 그의 후계자인 송규宋奎는 이러한 진공묘유의 실상을 개오했을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생활 속에 파고드는 대중 교화의 실천 불교의 도량을 건설하려 했다고 해도 빗나간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결코 박중빈이나 송규가 깨우친 진공묘유의 실상에 연연하지 않거니와 생활을 합리화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도 주저주저할 뿐이다. 연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민중은 늘 석가모니와 아미타불, 그리고 약사여래의 무소불위의 원력이 소망스러운 법이다. 신도들은 결코 도를 닦으려 절에 가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교단 간부들이 일원상반을 그려 놓고 제물(공양)을 차려 놓지 않는 원불교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걱정하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원불교의 세속화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원불교가 기복 신앙을 탈피해서 생활을 합리화한다는 대승적 견지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몰라도 민중의 간절한 소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므로 전통불교의 위세에 맞설 처지가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