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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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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경당 바람결 - 영덕 1996년 05월 171호
새벽 숲을 지나 물가에 내려서면 물보다 먼저 물소리를 만난다. 씻어도 씻은 자국이 없지만 귀가 서늘하다. 물살에 구르며 제 몸끼리 뒹굴어진 하얀 돌들도 깊이 침묵한다. 오래 두고 보아도 싫은 기색이 없는 톨들을 지음知音으로 느끼며 돌위에 앉아 아침 기도를 한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골짜기마다 굽은 대로 돌아서 스며들 줄 아는 물길, 허공을 떠돌다 구름으로 피고 비가 되어 인연처를 적시고 이쯤에서 다시 어우러져 흐르기까지 물 한 방울의 생로병사에서 자신을 본다.
내일 다시없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 하루가 마지막 날 같이 살아지이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지 못한 군더더기나 미련을 걸어두지 않게 하소서. 날아가는 새도 자취를 흐트리지 아니하는데, 자연이기에 앞서 수행인으로의 하루, 쌓고 모음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어느 사이 수북이 쌓이는 살림살이 좌복 한 장, 죽비 한 자루, 남창에 밝은 빛이면 족한 그런 삶이 되게 하소서. 스스로 아는 자는 밝고, 스스로 자기를 이기는 자는 강하다 하였습니다. 밝고 강하게 살아지이다. 병들어 아파하며 불행으로 허덕이는 이들의 땀 젖은 돈으로 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엄청나게 눌러오는 타성의 무게를 편안히 합리화하는 양심이지 않기를 이토록 바랍니다. 제 갈 길을 찾았다고 믿기에 어떠한 짐도 능히 져야 하리
라 생각합니다. 중생과 더불어 하는 삶 속에서 어렵고 무겁다고 물러나는 비겁한 자 되지 않도록 더 많은 용기와 지혜를 내리소서. 지금 살아가는 이 자리, 이 뜻, 이 말, 이 행동, 이 눈빛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하루가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않도록 시시로 경만한 저의 마음을 부처님전에 바치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자신의 상에 걸려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무관심 무표정하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소서. 한 맺힌 소리, 그리고 한을 넘어서야 하는 소리이듯 회향을 향한 절대의 신념을 잃지 않도록 늘 보살피소서.
산 너머 또 산이 있겠지만 그러나 외길을 가는 고집이 저를 살렸음을 알게 되겠지요. 길이 있어 길을 걷고 어차피 이 생의 누구나 길 위에 선 사람들l 가고 또 가다 그 자리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묵묵히 걷는 일밖에는 없는 세상살이 자기 삶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부처님을 향한 지순한 향심으로 사는 날까지 행자며, 사는 날까지 학인 이고자 합니다. 아무리 쏟아 내어도 또 이어지는 참회와 서원 오늘 아침 저의 기도는 여기서 마치고 숲을 돌아 채경당에 이르르면 그 곳에서의 하루가 보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무불 나무법 나무송.

바랑 하나 메고 나선 만행길이었다. 길은 길에 연이어져 끝이 없고, 그 길을 걸음걸음 참회진언을 바치며 걸어나갔다.

아석소조제악엽 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 皆由無始貪眞癡
종신구의지소생 從身口홉之flf生
일체아금개참회 一切牙今皆懺每

제가 옛날부터 지어온 모든 악업은 끝없이 오랜 옛적부터 익혀온 탑. 진, 치 삼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신. 구. 의 삼업으로 해서 생긴 모든 것들을 이제 진심
으로 참회합니다. \'옴살바못자모지사다야사바하\'.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몇 날 며칠을 걸었는지 모른다. 강원도 깊은 산중에서 달이 바뀌어 동짓달이 되었다. 한 때 무성하던 것들이 스러져 가는 들녘의 적막은 그대로 무진법문 이었다. 하루는 날이 저무는데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산사람들을 위한 움막이라도 하나 있을 듯 하건만 도시 아무것도 만날 수가 없었다. 종일토록 흐린 하늘에서는 어스름과 함께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차츰 거칠어져 폭설로 변하였다. 미끄러지고 구르며 눈길을 헤쳐 나갔다. ‘인명人命이 재천在天인데 설마 죽기야 하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는다하여도 후회는 없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 일들. 지식을 먼저 보내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또 하나의 봉분을 쓸어안고 기진 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살아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인가의 불빛을 만난 것은 인경(二更)이 지나서였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그 뒤의 일은 모르겠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릇 부딪히는 소리 광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싱그러운 아침, 햇살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오랍뜰을 내다보니 구기자와 산죽으로 울타리를 친 조촐한 산가는 온통 눈 속에 묻혀 있다. 동천冬天은 시리고 시리게 펼쳐지고 먼 데서 따악!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이는 청솔가지 소리만 적요를 깨고, 푸드득! 허리에 싸인 눈을 털고 일어서는 대나무 정지된 순간!
그 찰나 속에서 감지되어 오는 무엇이 있었다. 나를 내리 누르던 무명의 업장을 털고 푸르르 일어서는 새로운 분신을 본 것이다.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
잡곡 곁에 쌀 한줌을 더 얹은 듯 내 밥그릇만 흰밥이 담긴 아침상을 받으며 코끝이 찡하니 아파온다. 된장국에 무우청 김치의 소찬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소녀딸과 둘러앉아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더 쉬었다가라고 만류하시는 두 분께 갈 길이 멀다고 인사를 드린 뒤 마루 끝에서 신발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누렁이가 물어갔는가 하시며 부엌을 들여다보던 할머니가 “어이구 우리 달이! 착하기도 하지. 어여 갖다 드려라’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털신을 들고 나오는 얘기의 고사리 같은 두 손. \"나무 관세음보살\" 나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다섯 살 쯤 되었을까. 아이의 무구한 눈빛이 지금도 마음속에서 출렁인다. 우물가를 돌아 산모롱이 몇 개를 지날 때까지 온기가 남아 있던 그 신발을 신고 걸으며, \'중생을 위해 살리라. 중생을 위해 살리라.’ 얼마나 다짐하였는지 모른다. 세싱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일을 지나며 감사하지 않은 일이 있을까마는 이 우연하고 작은 기억은 내 마음을 기쁨과 자비로 가득차게 한다. 큰사랑과 큰마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발로인 작은 창같은 이 이야기를 깊이 감추어 두고 무척 아꼈었다. 거쳐야할 공부를 지나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은 소외된 이웃을 향하여 열어 놓고 중생과 더불어 아낌없이 주는 삶으로 마무리하고싶다.
“일체 유정 무정들이 적의에서 벗어나지이다. 모두들 고통을 여의고 행복하여지이다. 우리의 이웃들이 진실하고 맑고 향기로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