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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정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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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8년 06월 76호
밤 사이 뿌린 비로 하늘은 아직 우울했다.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자 짙은 아침 안개가 산봉우리뿐 아니라 길가의 마을 풍경까지 앗아간다. 이렇듯 낮게 내려앉은 안개는 이 땅의 오월이 담보한 육중한 무게인 듯 느껴진다.
국도를 따라 충주호를 지난다. 물에 잠긴 동리는 말이 없고, 잔잔한 물결 위로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문경군은 충청도 땅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나타나는 경북의 탄광지대이다. 벌써 목이 매캐해짐을 느낀다. 차안에서는 충청도 말씨가 뒤섞인 부드러운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가은읍에서 봉암사행 버스를 타려니 두어 시간 기다려야 한다기에 가겟집 거사님이 소개한 택시에 올랐다. “서울 보살 바가지 씌우지 마이소.” 생면부지인데도 우리를 잘 태워 주라며 기사님께 신신당부를 한다.
포장 안 된 길을 한참 달린다. 자갈밭 길이라 작은 돌들이 바퀴에 튀어올라 퉁퉁거린다. 탄광 마을의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 냇물을 검게 칠한다는 이야기가 언뜻 떠올라 개울물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물은 더없이 맑았다.
“희양산(曦陽山) 봉암사는 옛산사의 풍정을 때묻지 않은 채로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관광객의 출입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저기 솟은 봉우리가 희양산 주봉(主峯)인데 빼어난 영산이라고들하지요, 시간이 있거든 산위에 올라보세요. 계곡이 참 좋습니다.
기사님은 관광 안내원이라도 된 듯, 묻지 않은 이야기를 친절하게 한다.

봉암사는 구산선문의 하나로 선방수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방 대덕스님 가운데 봉암사를 거치지 않은 분이 없을 만큼 한국불교선맥의 뿌리가 깊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수려한 주봉의 기상을 이은 이곳 선도량에는 ‘동암’ 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십여 년 전부터 그곳을 지켜온 정광(淨光)스님이 계시는 곳이다.

“이 마을에는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아요. 이 동리 사람들은 옛날부터 저 큰 나무를 수호신이라고 여겨 왔지요. 요즘도 해마다 정월 초순이면 동리 사람 가운데 가장 청정한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아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지요.
수백년은 됨직한 거대한 나무를 가리킨다. 마을의 역사와 연륜을 같이해오며 온갖 풍상 속에서 마을의 삶을 지켜 온 자취가 뚜렷하다. 조상 대대로 신앙의 대상이었던 그 느티나무는 과연 신령스러워 보였다.

마을 어귀에서 작은 바랑을 어깨에 메고 부지런히 길을 가는 한 스님을 지나쳐 절 입구에 다다랐다. 정광스님 뵈러 왔노라고 전하자 관리인은 정색하며 방금 내려가셨단다. 황급히 차를 돌려 뒤쫓는데,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꽤 내려가서야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스님은 대구로 가는 길이란다. 그나마 만날 인연이 닿았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갈 길이 바쁜 스님과 함께 일단 읍내로 향했다. 스님은 큰절(봉암사)로라도 연락을 주고 오지 그랬나 하며 스님의 처소에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촉급하게 만나는 우리를 아쉬워하셨다.
무서운 스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첫마디를 꺼내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신다.
“서로 대화가 없으면 먼 사이가 되는 법이야. 멀게 느끼면 친근감이 없어서 인상 하나로 무섭다고 판단하기도 하지. 해인사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참선에만 열중하느라고 다른 스님들과 거의 대화가 없었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나. 이건 친근해질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야.”
한결 긴장이 풀리고 푸근해진다. 스님은 눈이 퍽 인상적이다. 깊고 맑은 눈빛,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은 듯한 그 허허로운 눈빛은 더없이 선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엄격함을 띠고 있다. 오랫동안 손질을 안 하여 수염이 거뭇거뭇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두루마기는 빳빳하게 풀질되어 있다.
평상시 바깥 나들이는 거의 없는 편이라 하신다. 해제 때 가끔씩 보고 싶은 도반을 만나는 시간을 가질 뿐.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스님께서는 가는 길을 잠시 늦추고 함께 이야기할 시간을 내어주셨다. 읍내의 찻집은 어두컴컴하고 퀘퀘하였으나 그래도 한적한 공간이었다. 스님의 가꾸어지지 않은 시골스러운 풍모와 나직하니 부드러운 음성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선(禪)이란 평상시의 생활선이어야 돼. 감정적 충돌이 있는 일상생활 속에서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때 선을 할 수 있지.
화 내려던 이가 한번 화를 참으면 그 사람의 선이 되는 셈이고, 내가 과도한 욕심을 현실 속에 반영하려다 이를 반감하게 되면 내 맘에 선을 이루는 게야.”
그러니 선이란 산중에 앉아 근본적으로 참구하는 일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되돌아보고 그 근원을 추구하는 것도 일상의 선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 보는 일은 자기가 자신을 구제하는 일이야. ‘탐심․치심․진심을 줄이는 노력을 꾀하면 자성으로 돌아간다’는 육조스님의 가르침이 있듯이, 방금 내려던 회를 참으면 그 마음은 보살심이 돼. 상대편이 보살인 셈이지. 상대편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화를 내려 했고 그 화를 참는 기회를 갖게 되었거든.”
하지만 화를 참을 겨를도 없이 발끈하고야 마는 것이 우리들 중생심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쉽지 않지. 화를 참으라해서 무리하게 참으면 마음 속에 갈등이 일어 오히려 병이 되는 게야. 그러나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이해하여 방향을 수정해가다 보면, 밉고 싫다 하는 마음 대신에 선심(禪心)이 들어앉게 되지. 불교에서의 선이란, 이러한 마음의 개조에 그 길이 있는 것이지.”
스님께서는 불교란 한 마디로 인간의 심성을 계발하는 종교라고 이르신다.
“예를 들면, 친구 사이가 친해진다는 것은 장점보다 단점을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거든. 그러다 보면,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에 갖고 있던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되지. 그것은 자신이 내면의 심성을 갈고 닦는 노력을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자기라는 한계 상황을 뛰어넘어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던 이상(理想)의 것으로 심성을 이끌어나가자면 그러한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제시한 길이라는 말씀이다.
스님은 참불자라면, 일상 속에서 작용하는 마음을 부단히 갈고 닦음으로써, 이 현실 속에 불교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댓가라도 치르겠다는 결의와 용기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아름다움은 용기에 있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이름다운 법이지. 불의에 대항하는 용기도 크지만 진리에의 용기는 그 이상의 용기야.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번뇌를 잘 포용하고 번뇌를 해결하는 가운데 한 기틀을 마련할 때 ‘진흙 속에 연꽃이 피는’ 게지. 만인이 부처님 법을 통해 해결할 길은 바로 이 마음을 계발하는 일이요, 이는 쉬지 않는 무궁무진한 수행의 길이지.”
찻집의 창을 통하여 들이비치는 오월의 볕이 스님의 등 뒤로 후광을 이룬다. 스님은 지금 앞에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게 산중에서 수행하며 몸소 깨달은 바를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졸간의 만남으로 계획한 시간이 늦어졌다는 것이나 어떤 목적에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것 따위에는 이미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다만 스님의 말씀으로 어리석은 눈을 조금이라도 깨칠 수 있는 두 중생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계속 이야기를 잇던 스님이 문득 질문을 하신다. 부처님의 스승은 누구인가, 과거 7불의 스승인 문수보살의 스승은 누구인가?
“바로 중생이야. 중생을 여윈 부처님은 존재할 수 없고, 부처님의 설법은 존재할 수 없어. 모르는 사람을 향해 가르치는 건 설법이 아니야. 이게 부처님법과 세상법과의 다른 점이지. 불법은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들을 위해 설법을 하는 이치야. 쉽게 설명하자면, 내가 상대방을 만났을 때 상대를 부처로 여기고 대화하면 절대 경거망동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지. 내가 제일로 귀히 여기는 물건을 별로 탐탁치 않은 이에게 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있거든. 이게 ‘보시’야. 좋은 물건을 가장 아끼는 이에게 줄 수 있듯 설법도 존경하는 이를 향해서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스님은 요즘 사람들은 부부간에 상호 경어를 쓰는 경우가 드문 것을 지적한다. 부부간처럼 가까운 사이에서도 말 한 마디라도 경어를 쓴다면 서로 존경심이 일게 되고 그럼으로써 지고한 사랑을 이루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세태가 안타깝다고 한다.
“부처란 ‘완성된 목표점’에 있는 분이 결코 아니야. 끝없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는 분이고, 깨달음의 연속선상에서 중생을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지.”
말씀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스님의 모습은, 어느새, 뒤에서 비치는 밝은 햇살 속에 점점 녹아들어가 없고, 찻집 안에는 봄 햇살과 함께 말씀만이 가득하다.
“나라는 모습이 본디 정해져 있던가. 그렇지가 않아, 현실에서 물려받은 이 모습을 내가 적극 변화시키지 못할 때 자신이 얼마나 서글플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스스로를 실망사키지 않고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바꾸어 상대도 내게 그리 행동한다면 얼마나 좋겠소. 어려움을 서로 나누며 살아간다면 ‘천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이 현실에 현현될 수 있어. 부처님의 심성을 닦아 옳은 맘으로 갈무리하는 세상을 ‘선의 세계’라 이름하고, ‘선의 사회’라 이름하고, ‘선의 극락’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지. 많은 이들이 이렇게 납득하고 실천하면 좋겠네.

스님은 어릴 적에 사색하기를 무척 즐겼다고 한다. 인생의 완성된 목표점이 무엇인가 찾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철학 서적을 이것저것 다 섭렵하였으나, 나이 어린 이상주의자의 갈증은 서양철학 어디에서도 채울 길이 없었단다. 자연히 동양사상과 종교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금강경」을 만났다.
‘무릇 있는 바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알면 그것은 곧 여래를 봄이라’는 대목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평소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도 다만 지금의 내가 모를 뿐이요, 불교의 엄청난 진리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세속의 허망한 굴레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진리를 팀구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발현되었다는 스님의 출가 동기는 모든 인간들이 지니는 본능일 수도 있다.
봉암사 큰절에서 일백 미터 남짓한 거리에 스님이 수행하는 거처인 ‘동암’이 있다. 거리가 가까와 공양은 큰절에서 드신다. 가끔 사중(寺中)의 일을 거들기도 하고 선방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지만, 일상적인 일과는 참선과 경전 공부로 일관한다. 경전 이외의 책은 일체 보지 않으며, 신문이나 TV, 라디오와도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그렇듯 세상 돌아가는 일과 무관한 스님께 그렇다면 이번 총선은 보이코트하셨느냐고 장난스레 여쭈었다.
“웬걸, 스님들끼리 최소한의 정보는 교환하며 지내지. 나도 올바르게 주권을 행사했다네. 사회를 잘 알아야 함이 옳겠지만, 다만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아직은 공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것은 일체 살피지 못할 뿐이야.”
오늘의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스님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였다.
“정화 이후로 비구종단이 불교의 전통적 맥을 형식적으로 수용했지만, 부처님법을 여법(如法)하게 추구하는 노력이 부족해. 우리의 불교를 선불교라 하는데 어떤 것을 참선이라 하겠는가. 오래 참선한 사람을 일컫는가. 아니면 어제 들어와 홀연히 견성하면 되는가. 기준이 있어 체계가 잡히고 그 본보기를 후세에 전달하면서 계통이 서야 하는데 우리 불교는 중심이 없어.
이 미혼기에 계속 허우적거리기만 한다면 사부대중 모두가 부처님 법을 망쳐먹은 죄인이 되고 말아.”
그렇다면 어느 계통으로 맥을 잡아가야 할 것인가. 어떤 대안을 세워 오늘의 불가를 탄탄히 부여잡을 것인가.
“사회에서는 명확히 포교하는 이가 많아야 불교의 외호자가 엮일 수 있지.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부처님의 학문을 명확히 연구하는 이가 많아야 타인의 비방을 면할 수 있지. 실천수행하는 이들이 많이 실참해야 불교의 위엄과 존귀함이 서게 되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신양하고 염불하는 이들이 모범되게 행해야 믿음과 감화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이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면 불교는 절름발이야. 오늘날 선을 위주로 편벽되다 보니 사회와의 연계가 끊어지고 포교에 어둡게 되었잖는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 늘어야 불교가살아나거든. 노력해서 체계를 세워야지.”
주체 형성의 필요조건은 ‘균형있게 성숙하는 불교’ 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이들에게는 자신이 중요하고, 자기의 가정도, 종교도 중요하겠지. 그러나 첫째로 우리가 여기 있게 된 인연, 곧, 우리의 역사가 가장 소중한 게야. 우리 역사를 보면 찬란한 문화를 구가하기도 하고 수난 속에 살기도 했지. 그런 우리의 역사와 함께 영고성쇠의 길을 걸어왔던 불교 아닌가. 그런 점을 생각하여 불교는 민족종교로서의 역할을 오늘에도 계속 이어나가는 게야. 그러려면 불가가 내부적으로 먼저 단결하여 자세를 투철하게 가다듬음으로써, 우리의 것을 잘 갈무리하고 가꾸어나가는 미더운 종교가 되어야지.”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질 즈음 민망스럽게도 내 배는 계속 ‘꼬르륵’거린다. 밥은 제때에 챙겨 먹어야 한다며 일으켜 세우시는 스님을 따라 읍내 거리로 나왔다.

봄볕이 따갑다. 우리의 주린 배를 걱정하며 길을 재촉하는 스님께 사진을 찍겠노라 양해를 구했다. 한길에서, 따가운 봄볕만큼이나 따갑게 느껴지는 동리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스님을 향하여 계속 셔터를 눌러대었다. 스님은 멋적은 듯 밀짚모자를 내려쓰시며 싱긋 웃고 있었다.


글/이 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