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산을 오르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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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염화미소 - 성전
1996년 05월 171호
먹을 것 없는 산골 마을에 봄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산을 올랐다. 등에는 마대자루에 구멍을 뚫어 끈을 해달아 마치 가방처럼 메고 봄 산이 베푸는 녁넉한 자연의 잔치에 참가해 곤궁한 나날들을 넘기곤 했다.
해마다 가난과 허기는 봄이 와서야 비로소 허기를 풀 수 있었다. 농사라고 짓고는 있었지만산골 마을의 농사는 언제나 협협한 것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줄 수는 없었다. 감자 몇 알, 쌀 몇 섬의 옹색한 농사는 사람들의 궁색함만을 더욱 드러내 보였을 뿐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농사에 정올 붙이지 못했다. 그냥 있는 땅이니까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있는 땅 놀리면 죄 받아, 하는 노인들의 말씀에 못 이겨 무거운 발걸음을 추스려 농토로 나가던 사람들.
가을이 와 추수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 생활에 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봄이 오면, 봄이 와 산에 나물을 뜯을 때면 그들의 표정은 달랐다.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듯 그렇게 맑았다.
가파른 산 능선을 오르며 이마에 땀을 홈칠 때, 그리고 누가 더 나물을 많아 뜯나 경쟁하듯 나물 묻기에 열중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삶은 가난 속에서도 저렇게 건강할 수 있구나, 히는 막연한 기대마저도 가질 수 있었다.
봄에는 집집마다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웬만한 나이의 아이들까지 모두 산에 올라 나물 묻기에 여념이 없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마대 가득 흩어 온 나물을 풀어 헤치고 종류별로 구별하고 다듬느라고 저녁밥은 언제나 밤이 깊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맑은 별빛과 개 짖는 소리도 함께 찬상에 올려 먹던 저녁. 그런 날의 저녁상에는 잊지 못할 풍경과 정서까지도 한 때 했었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잘 풀어 헤쳐진 나물은 밤새 이슬을 맞고 싱싱한 모습으로 밤을 새고 나면 그 다음날 아침에는 읍내로 팔려 나갔다.
읍내로 나물을 팔러 가는 것은 주로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지고 나갈 때면 어머니는 잊지 않고 얼마를 받아 오실 것을 당부하신다. 대개는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말씀한 금액을 받아오시지만 막걸리 한 잔 값은 언제나 빠져 있었다. 아마도 선술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셨기 때문이리라.
불쾌해진 얼굴로 저문 길을 돌아오던 할아버지. 그런 날은 할아버지가 살아온 한 생애의 이야기가 밤늦도록 도란도란 이어졌다. 구수하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고개를 묻고 있으면 하늘의 별까지도 내려와 문풍지에 붙어 귀를 기울이는 것만 같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때 그 산골 마을에서 우리들의 삶이 어떻게 가능했었는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떠올리면 우리들 그 때의 삶이 이해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만큼 그 때의 삶이 지금의 내게는 신기롭기 만하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하고 변한 만큼 모든 것이 풍족해졌지만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한구석이 비는 허허로움을 느낀다. 그 빈자리의 바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때 그 시절의 신기롭던 삶을 향해 고개 짓 한다.
그러면 그 때마다 내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가물 타오르는 추억의 등불 하나를 만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