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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방편경(大緣方便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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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8년 06월 76호
오월의 햇살이 따갑게 내리 비치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다. 바람 때문에 더위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버스나 차 속에 들어 서고 나면 금방 햇살의 따가움을 느끼게 되는 날이다. 이 세상에는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새로 피어난 잎은 햇살을 보듬어 더욱 싱싱하게 푸르러 가고 날으는 구름이며 쏟아지는 햇살마저도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이렇듯 움직이는 것은 변화를 수용하고 그 변화는 어떤 질서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새롭게 시작하면서도 쉽게 그 일관된 질서를 망각한 채 밖을 향해서만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변화의 질서를 알지 못한 채 바쁘다는 이유를 내세워 시끌시끌한 장바닥과 같은 삶을 겉돌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한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생 변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을 삼법인에서 일체무상(一切無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무상하게 변하여 바뀌는 현상이지만 아무렇게나 옮겨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어서 그에 따라 모든 현상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하대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상함 속에 상주하는 법칙의 존재야말로 더욱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정한 법칙을 따라서 사람과 사람, 세계와 세계, 그리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인연의 고리가, 생멸변화의 조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변화와 화합의 상의상관을 십이인연으로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와 같어 ‘치’를 인연하여 ‘행’에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이 있고, 촉을 인연하여 ‘수’가있고, 수를 인연하여 ‘애’가 있고, 애를 인연하여 ‘취’가 있고, 취를 인연하여 ‘유’가 있고, 유를 인연하여 ‘생’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걱정과 슬픔과 고뇌의 큰 환(患)의 모임이 있다. 이것이 큰 고음(苦陰)의 연이다.

연기법(緣起法)은 불교의 중심 사상으로서,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인 죽음과 삶의 가치 등에 관한 문제가 자신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해명해 주고 있다.
첫째로 치(癡)란 밝지 않은 것〔非明〕, 밝음이 없는 것〔無明〕의 두 가지로 해석된다. 모든 현상은,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착각의 무지, 실지로 있다는 집착의 무지 때문에 발생한다. 이러한 무지는 고․집․멸․로 사제(四諦)의 진리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
둘째로 행(行)은 무명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작용이다. 무명 때문에 잘못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작용이다. 이 작용은 삼업(三業)인 신행(身行), 어행(語行), 의행(意行)을 발생하게 한다.
세째로 식(識)은 위의 행에 의하여 분별하는 작용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 주관이 삼업의 발생에 따라 분별하는 식이 생기게 된다. 이 식은 개인의 중심 의식으로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의 육식이다. 그런데 이런 기관이 어린아이일 때 문드러지면 명색이 자라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식이 모태에 들어감으로써 다음의 명색이 생기게 된 것이다.
네째로 명색(名色)은 형색과 상모를 말한다. 명은 정신적인 존재를 말하고 색은 물질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즉 명은 수(受), 상(想), 사(思), 촉(觸), 작의(作意)의 다섯 가지 마음의 처소를 뜻하고, 색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 또는 사대로써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다섯째로 육입(六入)은 명색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다.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고 육근(六根)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눈․귀․코․입․몸 뜻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이다.
여섯째로 촉(觸)은 육근이 있어 생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앞의 육근과 대상의 육경(六境)이 상대하여 육식(六識)이 생기며, 육근․육경․육식의 셋이 화합하여 이루어지는 작용을 의미한다.
일곱째로 수(受)는 촉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그 접촉하는 작용에 따라 밖의 세계를 감지하게 되는데, 이때 그것에 대한 싫은 접촉에는 괴로움〔苦〕, 좋은 접촉에는 즐거움〔樂〕, 그 중간에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아닌 것〔不苦不樂〕등의 감수 작용이 생긴다.
우리는 더러 명색과 수를 함께 자기라고 하기도 하고, 수법(受法)을 자기라고 하여 아견(我見)을 세우기도 한다.
여덟째로 애(愛)는 수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좋고 싫은 것이 있으면 그 곳에는 반드시 싫은 것을 미워하고 꺼려하는 증오심이 일어나고, 좋은 것은 더 많이 소유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긴다.
애를 인하여 구함이 있고, 구함을 인하여 이익이 있고, 이익을 인하여 씀이 있고, 씀을 인하여 욕심이 있고, 욕심을 인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하여 질투가 있고, 질투를 인하여 지킴이 있고, 지킴을 인하여 보호가 있고, 보호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칼과 막대기와 송사가 있어 무수한 약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가 없으면 막대기와 송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애에는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셋을 없게 한다면 자기라는 집착도 없어진다고 한다.
아홉째로 취(取)는 위의 애착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마음 속에 생기는 심한 애증의 생각에 의하여 그것을 취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실제적인 행동이다. 즉, 물과 말에 의한 취사선택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취득에는 욕취(欲取), 견취(見取), 계취(戒取), 아취(我取) 등이 있다.
열째로 유(有)는 취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다. 이는 현상의 존재를 말하며 또 그 자체가 형성되어진 것을 말한다. 이는 범부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집착을 중심으로 한 행위적 생활을 뜻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육유․색유․무색유의 세 가지가 있다.
열한째로 생(生)은 유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다. 생은 한 생명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새로운 경험이 생기기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향상함이 없는 흐름 속에서 태어남은 모든 괴로움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열두째로 노사(老死)란 생으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이다. 갖추어 말하면 늙고, 죽고, 근심〔憂〕하고, 슬퍼 〔悲〕하고, 걱정〔惱〕하고, 고통〔苦〕받는 것이다. 늙어 기력이 쇠하고 죽어 없어짐을 말한다. 이 늙고 죽음은 인간고의 전체를 대표하여 표현된 말이며 육체적 괴로움만이 아니라 정신적 괴로움인 근심, 걱정, 슬픔 등의 괴로움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는 무상한 존재 속에 항상하는 법칙성을 발견하지 못한 어리석음〔無明〕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게 되고 마지막의 늙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커다란 괴로움〔患〕이 쌓인〔蘊〕 발생〔集〕이 있게 된 것이다.
세존은, 인간의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자신의 무지, 즉, 괴로움과 괴로움의 여려 종류〔苦의 集〕, 괴로움을 없앰〔苦의 滅〕, 괴로움을 없애는 길〔苦의 滅에 대한 道〕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연기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세존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모두가 다 보리수 아래서 십이연기를 순서대로, 또는 거슬러〔逆〕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셨다. 순서대로란 무명에서 노사의 방향으로 관찰한 것이며, 거슬은 것은 노사에서 무명의 방향으로 관찰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이러한 순서와 거스름의 두 가지 관찰 중에서 부처님은 거스름의 관찰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 뜻은 현실적인 괴로움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십이연기는 과거 두 원인〔무명 ․행〕에 의해 현재의 다섯 과보〔식 ․명색 ․육입 ․촉․수〕를 받는 과거와 현재의 한 가지 인과〔一重因果〕를 갖게 되고, 현재의 세 원인〔애 ․취 ․유〕에 의해 미래세의 두 과보〔생 ․노사〕를 받는 현재와 미래의 한 가지 인과〔一重因果〕를 갖게 됨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그 관계를 표현하기도 했다.
십이연기는 진리를 밝히는 시간적인 고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지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변화가 시간 속에서 그 한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시간에 대한 고찰과 반성은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현철들에 의해 논의되어 왔다.
우리는 누구나 많건 적건 제각기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많고 적음을 느끼는 것은, 사랑하고 번민하고 헛된 욕망을 쫓아 넘어지고 일어서는 동안에 시간을 느끼는 착각 때문이다. 때로 무의미한 시간은 많게 느껴지겠고, 생명처럼 소중함을 깨달을 때는 오히려 적게 느껴지는 모순을 갖기도 한다. 자신의 시간을 보람있고 가치있게 쓰는 것이 삶의 지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로 보고 열심히 살아가며 체험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성실과 용기를 가지고, 또한, 바른 인격과 가치와 재능을 갖추고 시간을 탕진함이 없는 삶은 지속적인 믿음에 의해서 시간을 관조하는 능력도 형성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깨어 있음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해지듯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는 언제나 밝은 빛깔과 선명한 변화를 수없이 가짐으로써 항상 다양한 삶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