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장이 갓 방부를 든 수좌 스님에게 물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화두가 들리는가.”
그 말을 들은 수좌가 힐난조로 대답했다.
“수좌가 화두를 들면 행주화와 어묵동정으로 일각의 틈이 없이 여일 해야 할 터인즉, 하루에 몇 번이라니요. 한 순간이라도 놓칠 리가 있답니까.”
서슬 푸른 기세였다. 노장은 수좌의 또라진 말대꾸에도 괘념치 않고 말없이 비긋이 웃으며 지나쳤다. 혜남스님이 인천 용화사에 살 때였다.
스물 살에 부산 대각사에서 경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러나 출가의 목적도 그러했거니와, 언어문자를 통한 도 통하기는 모래밭의 모래알 헤아리기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자리 밝히기를 본분사로 여기는 마음은 여전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참선 공부에 들기 전에 나라안의 삼대 보궁을 찾아 칠일기도를, 그리고 이십 오대 본사를 두루 찾아 향을 사루며 “업장을 참회했다.”
그 탓이었던가. 전강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용화사에서 하루하루가 환희심에 버거운 나날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상기가 올라버렸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서 틈이 나는대로 누워야 했다. 전강스님, 그리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지웠던, 십 년의 묵언과 십 년의 행각수업을 끝내고 그의 전법 제자가 된 송담스님과의 감동적인 만남도 뒤로 하고 통도사로 내려갔다. 경봉스님이 그에게 일렀다.
\"송論회두한다고 다 되나. 화두 공부란 용심用心에 달렸으니, 줄이 너무 팽팽해서도, 너무 느슨해서도 못쓰느니.”
통도사에 이어 해인사 선방에서도 두 철을 났지만 좌복에 앉으면 졸립고, 끊임없는 망상이 그를 덮쳤다.
“내가 업이 두터워 향곡, 전강, 경봉, 성철스님 같은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도 완전 귀일을 못한 거라.
불교가 자귀의, 법귀의 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혹독한 선지식의 가르침이 꼭 필요해요. 선지식이 죽으라면 육신이 버려져도 도를 위해서는 죽는 게 빠른갑다 하고 죽을 수 있어야 해요. 이 스님 모시고 있으면 이 스님 말이 옳고, 저 스님 아래 있으면 이 스님 멀어 그른 것 같고... 큰스님끼리의 설왕설래는 서로의 병통을 제거하고 서로를 북돋우는 법담인데, 중생은 말에 떨어지고 말거든. 그렇게 해서 슬하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선근이 멀어지는 거야. 그 한 분을 믿고 따르면 나름대로 힘을 얻게 돼요. 누구 한 분 제대로 모셨으면 나도 수좌로 남았을 거야.\"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낙오\'를 생산적으로 희생시킬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모를 화두 공부”보다는 차라리 경전을 스스로의 수행지침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백파스님과 한영스님의 법맥을 잇는 해남 대흥사의 운기스님에게로 가서 그의 전강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의 나이 서른 아홉 살 인 81년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대학으로서 가장 종합적인 불교수학이 가능했던 대정대학 동양
철학과에 입학, 정관의 화엄 사상을 수업했다. 박사 과정을 이수하기까지 십 년 동안의 유학 시절 동안에 석사학위 논문인 「징관의 유도 사장」과「당 덕종의 공덕사」 등 열 편에 가까운 논문을 썼다. 공부를 하되 학부에서 시작하여 박사 과정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그의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귀국한 뒤에는 해인사와 법주사 강주를 거쳐 93년도에 중앙승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그가 교학에 몸담은 지는 선원 행각이후로 스무 해, 그러나 선방에 대한 그의 연모의 정은 완전히 사그라든 것 같지 않다. 해인사 강주로 부임한 첫해에도 수좌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는 여전히 산을 그리워하고, 착각이었더라도 행복했던, 서슬이 시퍼랬던 용화사시절이 그립다. 아니, 그것은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수행의 바른 귀결지를 확언하는 그의 엄정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이제 견성 성불을 귀착지로 삼고 싶어한다. 그는 책상 앞에서가 아니라, 좌복 위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부처님이 정이 없는 혜는 헛일이라고 했어요. 혜만으로는 알음알이가 될 뿐이니 정을 붙들어 줘야 한단 말이거든?
계와 정과 혜의 삼학어 일체이니 계 또한 딴 몸이 아니다. 그는 계율과 청규는 제대로 지킨다기보다 지키려고 노력하며 산다고 했다.
“계를 제대로 지키면서 불안과 공포가 있을 수 없으니 저절로 선정에 들게됩니다. 선정에 들면 자연히 지혜가 나와요. 물이 고요하면 삼라만상이 그대로다 비춰지듯이?\"
그러나 그는 서둘러 이야기 한 자락을 덧붙였다. 어떤 스님이 일종식하는 다른 대중들과는 달리 자신은 하루세 끼를 꼬박 챙겨먹으며 일종식 하겠다고 엇났다. 하늘이 노해서 세 끼 다 먹으며 일종식한다는 놈 나서라고 하니 대중들이 겁에 질려 그의 등을 집 밖으로 떠다 밀어 내보냈다. 그러나 벼락이 내려 그 집이 무너지면서 안에 있던 스님들이 다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습의를 익혀야 할 것을 강조한 터라 혜남스님에게 염불 솜씨는 어떠한지 여쭈었다. “통도사 창건이래 제일 솜씨”라고 칭찬 받았다고 운을 했다.
통도사 학인 시절이었다. 찰중이 알아서 그를 건너뛰고는 했는데 어느 날 예불 시간에 꼼 없이 걸렸다. 주지 스님을 모신 자리였다. 한두 마디 이어 나가자 대중들의 웃음이 시작되어 끝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지 스님 왈 “예불 한번 잘 모셨다. 예불 중에 웃음소리 낸 일은 통도사 창건이래 처음이라. 입승! 당장 학인들 염불 가르쳐 !”
그러나 기도 효험은 남다르다고 또 자찬했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혜남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한테 부탁을 하는 겁니까. 명령을 내리는 겁니까.” 남해 보리암 시절이었다고 하니, 이름난 기도 도량 효험을 본 건지, 경남 창녕이 속향인 스님의 억센 말투에 관세음보살이 눌리신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중생을 데리고 함께 가 이르러야 할 화엄의 바다, 그리고 종내에는 그 바다마저 버리고 자성을 밝혀야 할 멀고 먼 길의 중로에서 가끔 지어 보이는 무장해제의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