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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학 혜남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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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6년 05월 171호

\"무간섭주의죠. 최고 어른 타업이지, 허허허... 수행 관장이란 상징적인 자리지, 별로 할 일이 없어요. 그리고 안 하는 게 좋아요. 노자의 \'함이 없다\'함은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경지를
이른 말이지만, 난 할 줄 몰라서 무위하고 있으니 가짜지. 그러나 내가 가짜인 줄은 알고 있으니 무식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그걸로 자위하죠.\"
중앙승가대학 불교학과 교수인 혜남스님은 소탈한 분이었다. 스스로도 앞뒤 잴 줄 모르는 단순한 성격이라 했다. 그러나 그 때문인가.
승가대 비구 기숙사인 수행관 관장 소임을 맡고 있는 그를 찾는 학인들의 발걸음이 잦다.
그들은 그를 찾아와서 잠시 관장절의 방 주인인 양한다. 진짜주인 눈치보는 법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것을 축내기도 하고, 차를 우려 함께 나눈다. 그러면서 은사 스님께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한다. 스님은 새벽 네시 반쯤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산중과는 달리 다섯시부터 시작되는 아침 예불에 참예 한다. 그리고 이십 뿐쯤 참선 시간을 갖는다. 짧지만 뭇 깊은 시간이다. 아침 공양은 여섯시에 시작된다.
입승과 각 학년의 대표인 학년장에게 실제적인 일들은 다 맡겨 두고, 몰라서 지나치기도 하고, 알아도 사소한 일은 모르는 체하여 입승의 처지를 넓혀 두고 있지만, 혜남스님은 아침 예불과 대중 공앙은 거르는 법이 없다. 대중 공양은 발우 공양으로 여법하게 올린다. 천수물과 밥, 국이 돌고, 가반이나 감반 순서가 이어지고 공양이 끝나기까지의 일들이 묵언 속에 이루어진다. 안암동, 도심 한가운데서. 속이 불편하여 공양 염이 없는 사람이라도 발우 공양 때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발우를 펴고, 다른 대중들과 똑같은 공양 의식을 치른다.
대중에게는 공양이 \"밥 먹는 일\"이기보다는 ”수행\"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 말미에 공지사항도 전해지고, 이리 잘못된 것 저리 펴자는 관장 스님의 한 말씀도 덧붙여진다.
저녁 예불은 따로 없으니 발우 공양이 끝난 시각부터 취침 시간인 밤 열시까지는 자유로 운용케 한다. 금요일 오후부터는 외박이 되지만 일요일 저녁 아홉시에는 일제 점호를 받는다.
모난 성품은 독살이 때보다 대중살이 때에 더 잘 드러난다. 도반을 스승으로 삼게 되는 셈이다. 용과 뱀이 혼거 하기는 선방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전교생 삼백 오십 명 가운데에 비구 수행관에서 사는 스님만 해도 백 명쯤 된다고 하니 (비구니 수행관은 백십 명), 가끔썩 큰소리 낼 일이 없지 않을 듯한데, 혜남스님의 표정은 녹기만 하다.
졸업장만 따려는 사람, 괴각쟁이도 없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성실하고 신심있다고 말하는 스님의 얼굴에는 학인들을 아끼는 어여쁜 마음자리가 엿보인다. 불교학과 교수로서, 불전국역연구원 원장으로서 강단에서는 마음도 그러하다.
불교학과 강의는 일 주일에 이틀 이루어진다. 2학년과4학년을 대상으로 경전 강독과 선전 강독을 각각 교수한다. 두 해 전에 개설된 불전국역연구원에서는 그의 전공인 화염 현담을 가르친다. 교수 및 박사학위 소지자가 적잖은, 수강 인원이 쉰 명쯤 되는 이 연구원은 연수반과 연구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의는 승가대 교수 세 사람말고도 유학자, 불교학자 등 외부 초청강사가 일곱이나 된다. 개설 당시에는 역경원 양성뿐만이 아니라
역경 사업까지 아우르려고 했으나, 현재로서는 역경원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연수 과정을 마쳤어도 수학 능력은 검증 절차를 거쳐야만 연구 과정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역경하고 있는 분도 없잖지만, 현재 공식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는 데는 동국대 부속 기관인 역경원 뿐이 없죠. 이 곳 불전국역연구원이 종단의 역경사 위탁 교육 기관으로 지정 받으면 연구원 활성화에 더욱 큰 힘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있어요. 역경 인력 양성의 필요성이야 너나없이 절감하고 있는 바이고.....이 곳이 곧 한몫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런 것을 언급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는 하나, 승려 교육의 일선에 몸담고 있는 그로서 이런저런 생각·이 없을 수 없다.
승가대학의 불교학과 커리큘럼은 종립대학인 동국대학의 그것과 비슷하다. 일본의 경우 종별로 수학과정이 세분화되어 있지만, 이 곳에서는 교리와 교단사, 불교발달사 둥을 통틀어 가르친다. 두루 섭렵해도 깊이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십 년 동안 수학한 일본의 대정 대학에서는 젊은이들의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감안하여‘불교학과”를 “인간학과\"로 바꾼 다음
\"호감을 얻어” 학생들의 질은 높아졌지만, 그가 보기에 개악된 점이 없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대학과는 다른 승가대가 수용할 내용이 못된다고 그는 생각한다. 범이 산중을 떠나 살수 없듯이, 승가대학은 본사를 낀 깊은 산중에 있어야 한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그는, 학인들은 공부에 힘쓰되, 학문 편향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수행면이 강조된 교과 과정을 밟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학인들에게 캠퍼스 이전이 문제가 아니라, 수행관에서 이루어지는 여법한 하루하루를 더 강조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불교의 습의를 익히거나 좌선을 권장하고. 청규는 반듯이 지키고, 계율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그리고 지방 강원 반, 중앙승가대 반 식의 현재의 교육 체제는 한 종단 안에서마저 가치관이 일치되지 않는 결과를 낳고 있는 만큼, 중앙숭가대가 행자 교육원 과정을 끝내고 비구계를 받기 전에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으로 확대 개편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 지방 강원은 나름의 특정을 살리면서 불전을 더 깊이 연구하려는 스님들을 위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혜남스님은 생각한다.

한 노장이 갓 방부를 든 수좌 스님에게 물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화두가 들리는가.”
그 말을 들은 수좌가 힐난조로 대답했다.
“수좌가 화두를 들면 행주화와 어묵동정으로 일각의 틈이 없이 여일 해야 할 터인즉, 하루에 몇 번이라니요. 한 순간이라도 놓칠 리가 있답니까.”
서슬 푸른 기세였다. 노장은 수좌의 또라진 말대꾸에도 괘념치 않고 말없이 비긋이 웃으며 지나쳤다. 혜남스님이 인천 용화사에 살 때였다.
스물 살에 부산 대각사에서 경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 강원을 졸업했다. 그러나 출가의 목적도 그러했거니와, 언어문자를 통한 도 통하기는 모래밭의 모래알 헤아리기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자리 밝히기를 본분사로 여기는 마음은 여전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인 참선 공부에 들기 전에 나라안의 삼대 보궁을 찾아 칠일기도를, 그리고 이십 오대 본사를 두루 찾아 향을 사루며 “업장을 참회했다.”
그 탓이었던가. 전강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용화사에서 하루하루가 환희심에 버거운 나날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상기가 올라버렸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서 틈이 나는대로 누워야 했다. 전강스님, 그리고 그에게 깊은 인상을 지웠던, 십 년의 묵언과 십 년의 행각수업을 끝내고 그의 전법 제자가 된 송담스님과의 감동적인 만남도 뒤로 하고 통도사로 내려갔다. 경봉스님이 그에게 일렀다.
\"송論회두한다고 다 되나. 화두 공부란 용심用心에 달렸으니, 줄이 너무 팽팽해서도, 너무 느슨해서도 못쓰느니.”
통도사에 이어 해인사 선방에서도 두 철을 났지만 좌복에 앉으면 졸립고, 끊임없는 망상이 그를 덮쳤다.
“내가 업이 두터워 향곡, 전강, 경봉, 성철스님 같은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고도 완전 귀일을 못한 거라.
불교가 자귀의, 법귀의 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혹독한 선지식의 가르침이 꼭 필요해요. 선지식이 죽으라면 육신이 버려져도 도를 위해서는 죽는 게 빠른갑다 하고 죽을 수 있어야 해요. 이 스님 모시고 있으면 이 스님 말이 옳고, 저 스님 아래 있으면 이 스님 멀어 그른 것 같고... 큰스님끼리의 설왕설래는 서로의 병통을 제거하고 서로를 북돋우는 법담인데, 중생은 말에 떨어지고 말거든. 그렇게 해서 슬하를 떠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선근이 멀어지는 거야. 그 한 분을 믿고 따르면 나름대로 힘을 얻게 돼요. 누구 한 분 제대로 모셨으면 나도 수좌로 남았을 거야.\"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낙오\'를 생산적으로 희생시킬 \'핑계’를 찾기 시작했다.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모를 화두 공부”보다는 차라리 경전을 스스로의 수행지침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백파스님과 한영스님의 법맥을 잇는 해남 대흥사의 운기스님에게로 가서 그의 전강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의 나이 서른 아홉 살 인 81년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대학으로서 가장 종합적인 불교수학이 가능했던 대정대학 동양
철학과에 입학, 정관의 화엄 사상을 수업했다. 박사 과정을 이수하기까지 십 년 동안의 유학 시절 동안에 석사학위 논문인 「징관의 유도 사장」과「당 덕종의 공덕사」 등 열 편에 가까운 논문을 썼다. 공부를 하되 학부에서 시작하여 박사 과정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그의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적인 성품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귀국한 뒤에는 해인사와 법주사 강주를 거쳐 93년도에 중앙승가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른다.
그가 교학에 몸담은 지는 선원 행각이후로 스무 해, 그러나 선방에 대한 그의 연모의 정은 완전히 사그라든 것 같지 않다. 해인사 강주로 부임한 첫해에도 수좌들과 함께 용맹정진을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는 여전히 산을 그리워하고, 착각이었더라도 행복했던, 서슬이 시퍼랬던 용화사시절이 그립다. 아니, 그것은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수행의 바른 귀결지를 확언하는 그의 엄정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이제 견성 성불을 귀착지로 삼고 싶어한다. 그는 책상 앞에서가 아니라, 좌복 위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부처님이 정이 없는 혜는 헛일이라고 했어요. 혜만으로는 알음알이가 될 뿐이니 정을 붙들어 줘야 한단 말이거든?
계와 정과 혜의 삼학어 일체이니 계 또한 딴 몸이 아니다. 그는 계율과 청규는 제대로 지킨다기보다 지키려고 노력하며 산다고 했다.
“계를 제대로 지키면서 불안과 공포가 있을 수 없으니 저절로 선정에 들게됩니다. 선정에 들면 자연히 지혜가 나와요. 물이 고요하면 삼라만상이 그대로다 비춰지듯이?\"
그러나 그는 서둘러 이야기 한 자락을 덧붙였다. 어떤 스님이 일종식하는 다른 대중들과는 달리 자신은 하루세 끼를 꼬박 챙겨먹으며 일종식 하겠다고 엇났다. 하늘이 노해서 세 끼 다 먹으며 일종식한다는 놈 나서라고 하니 대중들이 겁에 질려 그의 등을 집 밖으로 떠다 밀어 내보냈다. 그러나 벼락이 내려 그 집이 무너지면서 안에 있던 스님들이 다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습의를 익혀야 할 것을 강조한 터라 혜남스님에게 염불 솜씨는 어떠한지 여쭈었다. “통도사 창건이래 제일 솜씨”라고 칭찬 받았다고 운을 했다.
통도사 학인 시절이었다. 찰중이 알아서 그를 건너뛰고는 했는데 어느 날 예불 시간에 꼼 없이 걸렸다. 주지 스님을 모신 자리였다. 한두 마디 이어 나가자 대중들의 웃음이 시작되어 끝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주지 스님 왈 “예불 한번 잘 모셨다. 예불 중에 웃음소리 낸 일은 통도사 창건이래 처음이라. 입승! 당장 학인들 염불 가르쳐 !”
그러나 기도 효험은 남다르다고 또 자찬했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혜남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한테 부탁을 하는 겁니까. 명령을 내리는 겁니까.” 남해 보리암 시절이었다고 하니, 이름난 기도 도량 효험을 본 건지, 경남 창녕이 속향인 스님의 억센 말투에 관세음보살이 눌리신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중생을 데리고 함께 가 이르러야 할 화엄의 바다, 그리고 종내에는 그 바다마저 버리고 자성을 밝혀야 할 멀고 먼 길의 중로에서 가끔 지어 보이는 무장해제의 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