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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균여대사(均如大師)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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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8년 06월 76호
균여대사가 가장 왕성하고 중요하게 하던 시기는 광종(光宗) 때였다.
대체적으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개국(開國)하였으나,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완전히 해체시키지 못한 채 통일시켰던 까닭에 고려 상대(上代)에는 호족 연합체인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죽은 뒤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호족들과 개국 공신들이 상호간에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하였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승리한 광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광종은 즉위한 뒤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의 아픔을 통감하여서,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거세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전제개혁(專制改華) 정치로의 방향이 서서히 잡혀갔으며, 드디 광종 7년 이후에는 전제개혁을 위해서 구체적인 제도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비롯하여 새운 인물의 등용을 위한 과거제의 실시 및 시위군(侍衛軍)의 증가, 군제(軍制)의 개편을 통하여 중앙집권적 왕권 중심의 정치 개편을 펼쳐나갔다.
전체군주제의 강화로 인하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또한 지방호족 세력과 함께 활동했던 선종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그리고 다시 화엄종이 전제군주 체제와 함께 고대 사회에 대두하게 되었다.
균여대사가 광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서게된 데에는 몇 가지의 역사적 자료가 있는데, 우선 광종이 화엄종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광종 4년에 화엄종 승려인 겸신(謙信)을 국사로 봉(封)했으며 국사 겸신의 추천으로 광종과의 만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광종 4년에 후주(後周)가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할 때 마침 비가 와서 국사 겸신의 천거로 균여대사가 기청제(祈晴祭)를 주관하였다. 그 때 균여대사가 원음으로 강연하였더니 하늘이 맑아져 해가 솟아 나왔다. 이 일로 말미암아 왕은 그를 지극히 존경하게 되었다.
또한 굉종 9년에 불일사(佛日寺)에 벼락이 치자 균여대사가 그 변괴를 없애려고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주관하였는데 그 때 광종이 스님을 직접 찾아 봐었으며, 또한 스님을 존경하고 신망함이 극진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균여대사는 단순한 화엄종의 승려가 아니라 이미 그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던 비밀불교의 신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뭏든 이 두사건으로 균여대사와 광종의 관계가 밀착되었다.
그 뒤 균여대사의 저술(著迷)은 광종 9년에서 1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설해졌는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교분기원통초(敎分記圓通鈔), 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 삼보장원통기(三寶章圓通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화엄사상을 전해 주는 중요한 저술들이다.
그 다음해인 광종 14년에는 귀법사(歸法寺)가 창건되었고, 곧 균여대사는 그 곳의 주지가 되어 남은 생을 보냈던 것으로 보아서 귀법사는 바로 광종의 원력으로 인하여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제정치의 이데올로기인 균여대사의 성상융회사상(性相融會思想)을 관장하기 위함이기에 귀법사의 창건은 균여대사의 저술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면 광종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등장한 균여대사의 성상융회사상은 본래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중국의 성상융회사상은 교종 내부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 화엄사상 가운데 법상종사상을 융합한 것이다. 이 사상은 이미 중국의 법장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무주조(武周朝)의 전제정치를 옹호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균여대사의 사상이 이러한 중국 법장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더욱 법장과 사상적 입장에서 달랐던 의상대사의 사상을 융합함으로써 법장의 사상경향을 더욱 발전시켜서 원융한 사장적 체계를 이룩하였다.
대체로 화엄경의 사상은 부처님의 사상을 오교십종(五敎十宗)이라고 요약하였는데, 그 첫째가 소승교(小乘敎)의 가르침으로 인공(人空)을 밝히는 소승경론이며, 둘째는 대승시교(大乘始敎)로서 대승의 여러 경전 가운데에서도 법상설과 반야중관(般若衆觀)의 경론에서 설하는 일체개공(一切皆空), 진공무상(眞空無相)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세째는 종교(終敎)로서 대승종극(大乘終極)의 가르침인데, 승만경, 열반경, 기신론 등에서 설명하는 진여수연(眞如隨緣), 이사불이(理事不二) 등의 사상적 체계를 설함으로써 일체개성불(一切皆成佛)의 사상을 중시하는 가르침으로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든지 진여연기(眞如緣起) 등이 여기에 속한다.
네째는 돈교(頓敎)로서 언설(言說)이 돈절(頓絶)하고 앎과 행함이 단번에 이루어지며 교리와 행과(行果)가 단번에 이루어짐을 주장하는 것으로써 이것은 바로 선종(禪宗)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섯째는 원교(圓敎)로서 세계에 있어서의 일체는 사사무애(事事無碍)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며 주반구족(主伴具足)하여 자재무애(自在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주장하는 화엄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의상대사의 화엄철학이 기론론을 중심으로 하는 시간론적인 입장인 성기론(性起論)이라면 법장대사의 화엄철학은 유식철학의 아뢰야식을 근본식으로 하여 건개하는 공간적인 입장, 즉 법상종(法相宗)이었다. 그리고 이 두 견해를 다시 융섭한 것이 바로 균여대사의 성상융회사상이다.
보편적으로 중국의 화엄사상가들은 사상(事相)의 민멸(泯滅)을 말하고 있으나, 근본인 이(理)의 민멸은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균여는 사상(事相)뿐만 아니라 이(理)의 민멸까지도 주장하는 점에서 다른 화엄사상가와 큰 차이를 이룬다.
대체로 균여대사의 성상융회사상은 그 당시 선종문화권에 흩어져 있던 지방호족들의 생각을 중앙으로 모으고, 선종의 일맥인 법안종(法眼宗)의 사상과도 의견을 같이 하는 등 광종대의 전제정치를 비호하는 사상이었다.
또한 균여의 화엄사상은 순수 학문적인 화엄학이 아니라 신이(神異)적인 성격이 강조된 사상이며 토착적인 신앙을 흡수하여 그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균여사상의 이러한 토속적인 면은 바로 일반 민중과 연결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광종의 명에 의해서 귀법사에 제위보(濟危寶)가 설치되어 무차대회와 수륙회를 개설하였음에도 나타난다.
무차대회(無遮大會)는 승려와 속인, 또는 남녀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중을 상대로 베푸는 잔치이며, 수륙회(水陸會)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한 제회(齊會)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