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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 물리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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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주중식 1988년 06월 76호
올 봄소풍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소풍행사 계획을 위한 직원회에 앞서, 나는 우리 교실에서 아이들한테 소풍을 어디로가면 좋을지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곰실’, 건계정’, ‘심소정’을 추천하였고, 나는 ‘개봉’ 뒷동산을 추천하였다. ‘곰실’은 1,2학년이 걸어서 가기에는 너무 멀고, ‘건계정’은 자리가 좁고, ‘심소정’은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서 좋지 않은 편이다. 이점 저점을 다 따져 보면 ‘개봉’ 뒷동산이 전교생이 다 함께 가는 봄소풍 장소로는 아주 알맞는 곳이다.
그런데, 이 넷 중에서 ‘심소정’에 갔으면 좋겠다는 아이가 가장 많았다. 내가 추천한 ‘개봉’ 뒷동산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심소정’에 가면 산에 올라갈 수도 있고,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 수 있어서 좋으나, ‘개봉’ 뒷동산은 너무 가깝고 공동묘지 근처라서 좋지 않다는 것이다. 어른인 내 눈에는 들어도, 아이들 눈에는 들지 않으니 하는 수 없다.
나는 아이들의 뜻을 직원회에서 얘기했고, 그 뜻이 받아들여져서 결국 소풍 장소 ‘심소정’으로 정해졌다.
나는 학교 행사나 학급 일을 계획하고 정할 때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아이들한테 물어보기를 잘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말해 주는데, 아이들의 말과 글은 하늘의 소리같이 들린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서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번 들어 보았다. 6학년이라 사회책에서 정부, 국회, 법원에 대해서 조금은 공부해였고, 마침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때라 시기도 알맞았다.
선거 하루 전날 종례 시간에,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고 제목을 주고서, 나누어 준 쪽지에다 그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한 것을 말하듯이 간단히 써보라고 하였다.

국회의원 선거한다고 돈을 너무 낭비해서 나는 싫습니다.
내 돈이 아니라도 선거에 쓰는 돈을 줄여, 그 돈으로 국가의 발전에 쓰면 좋겠읍니다. (최 정훈)

자기가 서로 국회의원이 되려고 돈, 비누, 설탕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를 위주로 해서 책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그 종이로 좀더 좋고 뜻깊은 책을 써서 만들어내면 좋겠다. 물건을 돌려가지고 그 사람이 되는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의 표를 깎아주고 싶다.
요즘 뉴스에서도 돈을 돌려서 잡힌 사람이 더러 있다.
요 며칠 전, 아빠 보고 선거 운동 하라고 전화가 왔는데 아빠는 거절하셨다. 나는 그 때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결백하게 국회에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오 정민)

요즘 선거는 돈 가지고 높은 사람에게 아부만하면 좋게 되므로, 이것은 공명 선거가 아니고 부정 선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돈 돈 돈, 돈이 최고같이 느껴진다. (윤 용선)

술을 퍼먹이고 비누, 양말, 수건, 이런 것을 주고 그러는 걸 보면 진짜 눈꼴 사납습니다. 하이타이, 퐁퐁, 이런 걸 주지
않고도 자기가 좋은 행실 보이면 될 건데.
하기야 돈 주고 공짜로 뭘 주면 그저 좋아서 입 벌리고 헤에 하며 받아 먹고, 그런 사람에게 아까운 한 표 던지는 유권자들도 잘못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커서 저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절대로 그런 사람에게 아까운 한 표를 던지지 않겠읍니다. (신 주형)

이 밖에도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의 말을 한 마디씩 했다.

국회의원 후보들이 돈을 물 쓰듯 하는데, 그럴 돈 있으면 자기 살림이나 꼼꼼히 살아라/그 후보들도 학교에 다닐 때는 부정 선거가 나쁜 것이라고 다 배워서 알 것인데도 왜 그렇게 하는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우리도 어른이 되어서 다음 세대의 어린이에게 모범을 보이지/어른들은 돈에 약해서 잘 속으니까 아이들한테도 투표권을 주면 좋겠다/그 후보가 싫으면 유세장에 안 가면 될 것인데 돌을 던져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나/그 사람들 국회의원 되려고 하는 것이 꼭 자기 식구들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 같다/벽보를 20장이나 23장씩 연달아 붙여서 종이를 낭비하는데, 유권자이면 누가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는지 모를 턱이 없는데 왜 그렇게 많이 붙일까?/어른들은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을 좀 하고 정치를 하지, 어휴! 나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이 쓴 이 쪽지글을 받아 읽으면서 내가 어른인 것이 정말 부끄러웠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 몰라서 하는 소리이겠지만, 정치라는 것을 차라리 아이들 손에 맡겨 놓아도 이렇게까지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말을 들어보지 않더라도, 이번 선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돈을 써야 국회의원에 당선된다고 생각하고 돈을 마구 뿌렸던 점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어른들은 직접 돈을 주고 받으며 일을 잘못되게 하면서도 이번 선거가 선거사장 가장 타락한 선거라고 탓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신문과 텔레비전 역시 금권이 판을 친타락한 선거 풍토라고 크게 떠들어댔다.
그런데, 그렇게도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언론까지 입을 모아서 돈을 주고 받는 선거는 나쁘다고 그만 하라고 떠들었건만, 조금도 고쳐진 점이 없었다. 돈이야 얼마를 썼거나 당선만 되면 국회의원이고, 아무리 청렴결백하여 진짜로 국민을 위한 일꾼이라 하더라도 떨어지면 그만인 데는 누구도 아무 말 못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답답하고 딱한 일이다. 그럼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돈 써서 국회의원 해먹겠다는 사람들만 나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오히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하고 내 가슴부터 먼저 쳐야 할 일이다. 일이 이렇게 잘못된 것이 내게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나부터 먼저 고쳐 나가야 문제가 풀리게 된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판은 돈 때문에 다 어지럽혀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돈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은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돈에 약하여 그 앞에 무릎 꿇고 살아가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바꾸어 말하면, 아직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는 뇌물로 주고 받은 돈봉투가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국회의원 후보가 돈을 쓰는 것은,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껄끄러워하지 않는 유권자가 많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교사이다 보니, 어떤 일을 두고서 그 일의 잘, 잘못을 따질 때에 우리 교육계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무엇일까를 먼저 살펴본다.
나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가 금권 타락선거가 되어버린 원인을 우리 교육계에 만연되어 있는 돈봉투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나친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이번에 출마한 후보들이 국민학교 때부터 학부모가 담임 교사에게 제아이 잘 봐 달라고 돈봉투 내미는 것을 보면서 자란 영향이 컸으리라는 생각이다.
하기야 지금도 각급 학교에서는 돈봉투가 적잖이 오간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인 친구가 말하기를, 이제는 교사들이 학부모로부터 돈봉투 받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고 한다. 또 한편, 학부모인 아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담임이 전화로나 다른 온갖 방법으로 은근히 드러내 놓고 돈봉투를 요구하는데, 아이를 맡긴 처지에서 거부할 수도 없어 마지 못해 주고는 돌아서서 담임 교사에 대해 온갖 안 좋은 소리를 하는 학부모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이 다음에 국회의원이 될 만한 나이가 되면, 돈을 써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것은 뻔한 일이다.
아이들이 겉으로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있어도 돈봉투가 오가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매우 욕되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희들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어른들을 그대로 닮아간다. 이것이 무서운 일이다.
말로는 지금 민주화가 다 된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주인은 머슴이 되어 있고, 머슴이 주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구석이 많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좋은 세상을 물려주어야 한다. 마치 우리 반 아이들이 소풍 장소를 정할 때에 먼지가 좀 일더라도 저희들 눈에 드는 곳으로 정해서 즐겁게 하루를 지내듯이, 나라 살림도 주인 뜻대로 꾸려서 즐겁고 평화스러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저희들이 하고 싶은 말은 마음놓고 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도 누려야하며, 떨어져 살아가는 한 핏줄의 겨레가 더 이상 원수처럼 지내지 말고 하나되어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어른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지금부터 우리 이이들을 주인답게 자라도록 잘 보살펴 주어야 하는 일이다. 그들의 뜻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 아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고 바르게 크도록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알건 모르건 누구한테든 누구한테서든 돈봉투를 주고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어른으로서 아이들 앞에 떳떳이 서는 일이고,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길이다.
누구나 남 탓하기는 쉽다. 그래서 우리는 국회의원 선거판에서의 돈봉투를 얼마나 규탄했던가! 그러나, 돈봉투가 그 곳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서 있는 이 자리의 돈봉투 문제가 더 큰 문제인지 모른다.
제각기 자기 선 자리에서 돈봉투를 주지 말아야 하고, 또한 받지도 않아야 한다. 이것만은 물리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