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반성과 참다운 불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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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현공
1988년 06월 76호
봄인가하면 여름이 오고, 꽃이 피었는가 하면 지고, 또 어느새 그 자리에 신록이 하늘거리고 있는 것을 보며 끝없는 변화의 법칙, 자연의 도도한 생명력에 문득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에 비하면 너무 메마르고 척박한 우리네 인간사에서는, 자기의 본성을 잃지 않고 사는 일이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세속화되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자기의 삶이 아무리 척박하고 힘겹더라도, 뭇 삶이 겪는 고통〔苦諦〕의 까닭을 직시하고[集諦〕, 또한 그것을 짊어지고자 하는 데〔道諦〕 인간다운 가치가 있지 않은가한다〔滅諦〕. 그것은 극단적인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자를 지양한 중도(中道)의 길이기도 하다.
설령 ‘물같이, 바람같이, 구름같이’ 살더라도 삶은 반드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길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있다. 이는 관념적으로 자비만을 운운하는 막연한 자세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속에서 온갖 악덕과 폭력의 온상이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개인주의적 발상에 젖어사는 것은 절대주의 못지않은 상대주의적 함정이다. 나의 깨달음, 또는 개별적인 도덕 의식의 산술적 집합으로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은 이미 무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선량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우리 사회, 그러나 현실은 소수의 탐욕에 의해 짓밟히고 일그러져 있다.
승가 역시 별유천지(別有天地)나 치외법권적인 지대가 아니며,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부조리한 현실의 한가운데에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는 80년 10.27 법난과 작년원각사 법당 최루탄 난사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바 있다. 물론 이것은 오랫동안에 걸쳐 불교의 안팎에서 누적된 잘못이 하나의 사건으로 터진 것이지, 우연하게 일회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는, 밖으로는 폭압자의 잘못에 대하여 구조적으로 인식하고 또한 이를 폭로함과 더불어, 안으로는 종단 차원의 각성이 있어야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오늘의 승가는 구태에서 깨어 일어나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위선적인 자기 합리화와 사변적인 유희 속에서 침체의 길을 계속 걸을 뿐만 아니라 질곡의 역사에 일조를 더할 뿐이다.
물론 모든 문제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으로만 돌리는 것도 안일한 태도이며, 또한 현상을 고정화시킬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변화 의지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동인(動因)과 내적인 질서를 갖기 위한 자기 성찰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필요한 조건이다. 다만 어떠한 가치관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도용되어서는 안된다. 바삐 움직이는 중에도 내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한 여유를 잃지 않으며, 한가로움 속에서도 나태하지 않는 자세를 늘 지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면서도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으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뛰면서도 자기 성찰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 태도가 요청된다. 그 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여되어도 중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와 객을 통일시킬 때에 비로소 총체성을 획득하게 되고, 뜻하는 바를 오래도록 견지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리하여 난세의 잡다한 혼돈 속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편견에 빠지지도 않으며 비로소 삶의 주인으로서의 지혜가 열릴 것이다.
초파일이 있고, 꽃피고 새 우니 아름다운 계절 오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오월은 가장 서러운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 계절이 주는 고통과 아픔이 직접 당한 자만의 것인 양, 강건너 불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비심을 표방하는 우리 불교인들이 이러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이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삶을 긍정하고 희망을 갖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즉자적이고 안일한 긍정은 연기적인 삶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설령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라 하더라도, 희노애락으로 뒤범벅된 유심중생(有心業生)의 삶을 껴안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역사-인간의 삶-를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으며,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수십억을 들여가며 호화로운 건물이나 짓는 것을 불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종교는 정치와 무관하다고 하며 초월적인 제스처를 보이면서도 뒤로는 관권과 결탁하여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 아예 드러내 놓고 권력의 앞잡이로 나선 사람들…. 아직도 그들이 종단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조계종단의 현실이다. 본질과 지말적인 것을 전도(顚倒)시키는 이러한 형식주의자들이야말로 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사람들이다. 이들로 인하여 오늘의 종교, 오늘의 승가는 존경의 대상이기는 커녕 비판의 표적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제 또 초파일이 돌아온다. 이번 초파일은, 상투적이고 외형적인 행사에만 급급해 하지 않고 얄팍한 상술이 보태지지 않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과 성불의 의미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수행자로서의 나의 삶에는 잘못이 없는지를 돌이켜 보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명리에 집착하여 세속인들보다도 더한 기득권을 움켜쥐고자 하는 사람들은 물론 소수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일발일의(一鉢一衣)의 정신으로 청렴결백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모순이 가득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조계종단에서, 젊은 불자들의 개혁 의지가 모아져야 한다. 소극적인 개인주의, 우물안 개구리격인 폐쇄주의를 극복하고 우리 불교를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럽지 않게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종교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정도(正道)를 걷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불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진정한 불사는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소외시키는 모든 현상을 거부하여서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초파일에 우리가 다시 한번 깨달아야 할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원이며, 우리들이 역사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무엇보다 귀중한 공양이다. 그러므로 신도(민중)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문제가 무엇이며,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새겨 보아야 할 일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성된 젊은 불자들이 헌신적으로 용맹정진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고 있는 시기에 초파일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 불교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그 치유책이 심각하게 요구되고 있는 곳이 바로 국립공원의 사찰을 비롯한 많은 전통사찰의 불사이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과 통합할 때 비로소 중도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므로 탑사 건립등의 불사도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속제(俗諦)의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다만, 그러한 불사가 주체적인 자기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관권에 허리굽혀 야합하거나, 또는 권력층의 주변 인물에 의해 하사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불사는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요즈음에는 새로운 정권이 자리를 잡기 위한 정국구도의 전략, 전술적인 측면으로 제 5공화국의 비리를 수없이 쏟아 내고있다. 그것조차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전(前)대통령의 친척이나 인척 등을 비롯한 주변인물에 의하여 저질려진 소위 ‘권력형 부조리’를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대부분은 이권이나 인사와 관계된 것으로서, 친척이나 인척이 직접 이권에 관계되거나, 또는 주변인물들의 청탁에 의해서 저질러진 부정이다. 이처럼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그 엄청난 권력이 그동안 이루어 놓은 더러운 치부를 보며, 그동안 많은 사찰에서 진행되었던 불사에 대하여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중에는 사부대중의 지극한 원력과 신심어린 시주에 의하여 이루어진 불사도 많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동안 권력층의 친척이나 인척이 베푸는 선심( ?)이나 관권과의 유착에 의하여 불사가 이루어지고, 또한 그에 따라 사찰 책임자와 관의 실무자가 부도덕한 경제적 향유를 누리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층의 주변 인물을 한명이라도 알고 있거나 관권에 머리 숙이기를 잘 하는 사찰 책임자가 능력을 인정받고 또한 큰 스님으로 대접받는 현실도 맛 보았다.
불교 교단의 입장에서는 문화재 관리법 등의 불사를 제약하는 요소가 있지만, 불사를 권력층의 주변 인물에 의존하거나 관권에 비굴한 모습으로 아부를 하여서 해결하고, 또한 그에 따라서 서로 경제적인 향유를 나누어 가지는 부도덕함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함을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열반 후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부촉한다’라는 부처님의 불법을 가지고 그러한 일에 대하여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이천오백여 년 전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 시대는 절대군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불법을 널리 전함에 있어 그러한 내용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시대이므로 민중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 행위는 어떠한 것도 참다운 가치를 지닐 수 없다. 하물며 부패하고 비정통적인 권력의 부도덕한 주변 인물에 빌붙어 이루어진 불사를 어떻게 참답고 진정한 불사라 이르겠는가.
지금 사회는 권력형 부조리 등을 비롯한 제 5공화국의 모든 비리에 대하여 성토함과 아울러 그 거대하고 엄청난 힘 앞에 무기력하게 굴종하고 또한 야합함으로써 얻어진 조그만 이익에 대해서도 스스로 반성하는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의 기성 교단만은 반성의 목소리는 하나도 없이 구태의연한 모습만을 계속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철저히 반성하고 바르게 인식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통해서 얻은 주체적인 역량을 가지고 그것에 의해서 행위를 하며, 나아가 민중(중생)에게 회향코자 하는 것만이 참답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불사임을 깨달아야 한다.
해마다 초파일을 맞이하는 이 계절에는, 오월의 그날, 민주를 위해 산화해 간 꽃다운 청춘의 넋들이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그 옛날, 배는 고왔지만 차라리 소박했던 보리고개의 추억이 그리운 것은, 오늘 배고픔은 면했어도 자유에 굶주려 허덕이는 또 하나의 보리고개가 있기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