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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의 선지식은 돈오돈수를 이렇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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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종성 1996년 05월 171호
우리 불법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불조의 정법안장은 머리카락 하나로 마치 천 근의 무게를 끓어 당기는 것과 같이 늘 위태롭다(知一髮引千鉤) 예나 이제나 명안종사(明眼宗師)들은 걱정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지해(知解)란 본분활구(本分活句)인 화두상에서 신명을 놓아 버리고 간단없이 나가는 수선 납자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인데 이러한 지해가 따라붙는 돈오점수(頓悟漸修)곧 교가의 혜오점수(慧悟漸修) 사상과 지해가 완전히 끊어져 불지무념을 원증한 선가의 돈오돈수 사상을 혼돈하여 그 사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문의 이러한 폐단과 우리 조계종의 종지종통을 바로 잡는 동시에 간화정통 선풍을 다시 일으키는 데는 무엇보다도 고불고조를 표준삼아서 고급의 선지식은 돈오돈수를 어떻게 주장하였는지 깊이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금의 선지식은 돈오돈수를 이렇게 주장하였다.\' 는 수선납자와 일반 불자를 모두에게 그 자상한 지남이 될 것입니다.

한국 불교 조계종은 단일 선종이다. 조계종하면 육조 혜능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아래 오가칠종吾家七宗의 정통 가풍을 계승하여 임제, 태고의 종지종통으로 되어 있음이 분명하고 수행 방법도 그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돈오돈수의 간화선임이 또한 명백하다. 이러한 선종 종규 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통불교通佛敎니 원수圓修佛敎불교니 하여 염선일치念:神一致와 주선일치때輝一致를 주장하고 또는 교선일치爛一致를 주징해 염불종念佛宗인지 진언종眞言宗인지 교종敎宗인지 선종禪宗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리고 종지종통과 수행상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견사설이 난립하여 수행 납자에게 막대한 혼란을 야기한다. 그 단적인 보기로 고려 보조 선사의 돈오점수의 방편적 선교일치사상의 여폐가 지금까지 만연되어 한국조계종의 종지종통이 제 본연의 정통성을 상실하게 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비록 만시의 탄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정맥회에서는 위에서 말한 조계종의 여러 가지의 혜단과 종지종통을 바로잡는 동시에 돈오돈수의 간화정통 선풍을
제홍시키기로 결의를 다지기로 한다. 일찍이 회당廳堂 조심祖心 선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하였다.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으니 번뇌와 습기가 무엇이기에 그처럼 깡그리 없앨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면 도적을 내 자식으로 오인하는 것
이다. 옛 스님들의 그와 같은 말은 병에 따라 약을 마련한 것으로 설령 번뇌와 습기가 있다 하여도 오로지 지견으로 치유하면 될 뿐이다.
心外無顆法不知煩惱習 氣是何物欲盡之若起心飜成認‘
賊寫子也繼上以來但知見治之說乃 隨病 說藥繼有 煩
腦習氣但以如來知見治之「임간록 林間錄」
이와같이 돈오의 본분 자리에서는 습기習氣를 인정하여 닦을 것이 없는 것인데 습기를 인정하는 것이 곧 도적을 내 아들로 잘못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이 원만하지 못할 때에는 다시 원만히 돈오할지언정 습기를 차츰 닦아서는 벌써 본분돈오 자리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본분 자리를 차츰 닦는다는 말과 다시 돈오하여 원만하게 한다는 말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래의 지견으로 치유한다는 말도 또한 규봉圭奉, 보조 선사의 오후보암惜後保任과 돈오돈수輯惜願修 계통에서 오후대보임惜後大保任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니 습기가 없는 본분여래지에서 원수대보임圓修大保任하는 것과 습기가 있는 자리에서 점수보임漸修保任하는 것은 그 차원이 사뭇 다른 것으로 이와같이 오후보임도 두 가지가 있어서 이를 자칫 혼동할 수 있는 것이다.
완오 선사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 이 마음을 밝게 깨치느니라. 비었으되 신령스럽고 고요하되 밝게 비추며 안으로 훤칠히 밝아서 오직 하나의 진실뿐이다. 문득 능히 움직이는 바를 따라서 다 높고 낮은 곳을 전부 통하여 대해탈인 금강체이니 먼저 이 마음을 밝게 깨치는 것이 요긴한 것이니 그런 뒤에 일체의 선을 수행할지니라. 이 마음을 평상하게 가져서 나와 남이
없으며 사랑과 미움이 없고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얻고 잃음이 없어서 차츰 키우고 기르니 소위 본분의 도리는 모름지기 돈오 할 것이오 일을 행함에는 점수함음 요하니라. 모든 망녕된 인연을 끊어버리고 거뜬히 맑고 깨끗한 연후에 일체 모든 선을 수행하여 유정을 요익케 할지니라.

於一念不生處明悟此不虛 而 靈寂 內 外洞 然唯一 眞實便
隨所作爲皆是透 頂透底大解脫金剛正體也要須 丁悟此心
然後一切善平持此心無我 人無愛회無取擔無得失漸漸長
養所謂理修願悟事要 漸修離諸妄銀修 然燈 然復奉一切
諸曉益有情
「圓悟心要 胡 書悟性勸文, 門正

여기서 원오 선사의 점점장양 漸漸長養{점차적으로 키워 기름)과 이수돈오理須願悟펌(본분 도리는 모름지기 돈오해야 함), 사요점수事要漸修(일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점차적으로 닦음이 필요함)라 함은 돈오점수 계통에서 흔히 인용인중引用引證하는 규봉, 보조 선사의 돈오 뒤에 점점장양파 이즉돈오理郞顆悟(지해의리로는 돈오를 했음)나 사비돈제事非順除(실제 있어서는 망상을 단박에 없애지 못함)라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그러므로 차제를 밟아서 다하여 없앰)이란 말과는 그 해석이 정반대로 달라서 원오 선사는 어디까지나 여래지 본분돈오 자리에서 원수대보 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봉선사는 「산방야화」에서 다음과 같이 오후수惜後修문제를 경계한 것이다.

만일 털끝만치라도 정습이 다하지 못하면 곧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 원만하지 못한 곳을 다 쓸어버려 크게 철저하게 깨치는 것이 옳다. 혹연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못하다 하여 차츰 깨친다고 하면 짚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불만 더욱 치성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밀하기를 마땅히 불지견으로 다스린다 하나 나는 불지견 이란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 과연 불지견으로 서로 용하면 다스린다는 말도 또한 쓸데없는 말이다.

.... 若 見有藏毫情習 未盡悟心不圓而 然也若心悟不
圓 須是橋其未 圓 之跳而 其大微可也其或謂悟心未盡之如
抱 藏救焚益其熾 矣 古 人謂 當 以佛知見治 不奈不 識佛知 見
謂何事果或典佛知見相;懋則 治之之說亦 **且剩矣「 山房夜話

다시 말하여 만일 마음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원만하지 못한 대목만을 없애서 크게 다시 깨칠것이지 만일 원만하지 못하다 하여 그것을 습기로 삼아
차츰 계단 밟아 닦는다면 짚올 젊어지고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