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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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오성
1996년 05월 171호
지리산 끝자락 야트막한 산을 골라 도반 스님들과 산행을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따온 매화 꽃잎 하나를 투박한 차 잔의 맑은 물에 띄웠습니다.. 마시다마시다 마지막 한 모금을 차마 못 마시고 그냥 두었습니다.
봄의 꽃들은 잎사귀보다 먼저 핍니다. 마음이 앞선 탓이겠지요. 모든 것에 합리적이고 냉철한 시대를 살면서 아직 소박한 산골사람들을 만나면 봄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농익은 가을 꽃들에 견주어 향기는 그리 짙지 않지만 청초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보면 마음 한 곁에서 따사한 햇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봄은 노인과 어린애가 논둑을 걷고 있는 작은 액자의 풍경과 같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희망과 계획을 불러 일으켜 세우지만 나이를 먹고 나면 더욱더 세월 감이 빠르게 느껴지게 합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부할 수 없고, 그러기에 더욱 진하게 생명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역설적 변론을 해봅니다.
지난번 -벌써 잊어져 가는-선가가 끝나고 나니 여당의 절반에 가까운 의석, 야당의 정치력 회복에 일반적 관심사인가봅니다. 이와 달리 새 봄을 맞은 노인과 아이의 봄 놀이를 떠올려 봅니다. 그것은 기폰 정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새로운 정치판에 대한 희망에서 찾습니다. 4·11총선은 정치권 세대 교체와 개혁에 대한 양권의 의지를 추인 받은 선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부패한 정치와 정치인상에 대한 유권자들의 철저한 불신이 보수냐 진보냐 하는 정치적 성향보다는 낡은 후보에 대한염증을 낳으면서 노선이 분명치 않은 중진들의 대거 탈락과 반사적으로 새로운 인물에 관심을 보이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투표율의 저조현상과 국민회의의 보수세력 끌어안기의 실패작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물론 3김의 벽은 여전하였고, 보수세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을 살펴보면, 70년대 민청학련 세대뿐 아니라 모래시계 세대로 불리는 80년대 학생 운동권 그룹까지 원내에 진출해 정치권의 저변을 확대하였다는 사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적 인사들아 15대 국회에서 어떤 형태로 개혁 블록을 형성할 것인가. 여야의 이분법적 도식을 거부하며 어떠한 \'새로운 정치 실험’을 펼쳐낼 수 있을 것인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최근 청와대 회동에서 \'당신’과 자네 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들이 역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새 봄을 맞아 우리의 정치사도 새 봄의 시계가 째깍거렸으면 합니다. 낡은 정치의 틀을 깨고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 때 새날이 이름다운 것입니다. 종전처럼 구시대의 수혈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모판에 새 벼 싹을 튀우는 농부의 모습을 닮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