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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노력이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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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6년 05월 171호
불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림들에게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원하는 일이 아무리 애써도 잘 안될 때는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을 당하게 되면 운명이란 우연히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다 기독교서적을 읽어보면 신이 있는 것 같고, 용하다는 점장이를 찾아가면 미신도 무시하지 못할 것 같고, 아무튼 운명에 대해 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확신이 없으니까 누가 이렇게 말하면 이런가 생각되고 저렇게 말하면 저런가 생각되고 그래요\" 하고 대답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은 과거에 지은 자신의 업(행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현재
한순간 한순간 행하는 나의 행동 노력 여·하에 따라 나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켜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돌발적으로 결정되거나 신이 있어 신의 의사에 따라 좌우되는 것도 아니며, 반드시 인과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내 모습이나 생활은 모두과거에 지은 업으로 인해 받게 된 결과라 했다.
이렇게 말하면, 전생에 지은 업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결정된다면, 결국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현세의 행복이나 불행은 모두 전생의 업의 결과로서, 현세에서의 행위는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일 없이 모두 내세 운명의 원인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 두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전생에 지은 업’이라는 말과 \'과거에 지은 업’이라는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생이라 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세상을 말하고, 과거라 하면 현재를 기점으로 모든 시간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생의 업’이라 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업만을 말하고 있지만, ‘과거의 업’이라 하면 전생의 업은 물론이고 내가 태어난 뒤부터 현재를 기점으로 조금 전까지 지은 모든 업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전생의 업\'과 \'과거
의 업’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그런데 ‘업’ 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업(業)의 원어 카르만(Karman 또는 Karnman)은
\'작용’,‘행위\'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윤회’라는 말과 관계를 맺게 된 뒤부터 업은 윤회 전생을 나타내는 일종의‘힘\' 으로서, 단지 표면적인 행위만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과보를 동반하는 잠재적인 힘을 적극적으로 가리키게 되었다.
업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우파니샤드 시대에 윤회의 원동력으로l서 업의 사고방식이 급속히 부상하였다. 우파니샤드의 유명한철학자 야쥬나벌카는 인간의 사후의 운명에 관한 물음을 받었을 때 사람은 선업善業에 의해 좋은 사람이 되고, 악업에 의해 악한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은밀히 설했다고 한다. 여기서 업이란 사후에도 잔존하는 잠재적인 힘이라 생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로 업에 의한 윤회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 인도 사상계의 공통적 과제가 되었다. 불교에서도 최고 신은 물론 아트만{atman, 我)까지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의 입장에 섰지만 업의 사고 방식 그 자체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아설을 기반에 두면서 도덕상의 인과응보를 증명하기 위한 복잡한 업설을 전개하였다.
일반적으로 \'업\' 이라 하면 괜히 고리타분하게 생각해서 전생에 지은 업보가 어쩌고 하면서 중언부언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과거에 내가 행한 모든 행위가 다 \'업\' 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태어나기 전에 행한 모든 행위는 물론 내가 태어난 뒤부터 조금 전까지 행한 모든 행위들, 곧 몸으로 행하고 입으로 말하고 머리로 생각한 선, 악의 모든 행위들(이것을,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 이라한다)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몸 속에 사진의 필름처럼 남아 일종의 잠재 세력을 형성하여 그것예 우리들 각자에게 걸 맞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것을 업이라 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지능, 성격, 습관, 체질 둥을 형성하여 개개인의 현재의 삶(상태)올 결정하고 또한 새로운 선악 행위를 추가함에 따라 끊임없이 선이나 악으로 변해간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가다 장난으로 상점의 물건을 슬쩍 홈쳤다고 했을 때 이것이 비록 장
난이라 하더라도 그 훔친 행위(업)는 하나의 악의 종자로서 우리의 제8 아라야식(심리학 용
어로는 무의식에 해당됨) 속에 보관된다. 이렇게 아라야식 속에 저장된 악의 종자는 언제나
의식화 될 수 있는 인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홈칠 기회만 주어지면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나 또다시 훔치게 되며, 이로써 아라야식 속에는 악의 종자가 두 개로 늘어나
게 되고, 이것은 다시 네 개, 여덟 개로 차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드디어는 생각지도 못한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록 처음에는 장난으로 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결과는 어처구니없는 악한 행동(악업)을 초래하게 되므로 우리의 한순간 행동은 결코 무심히 행동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전생의 업이 현세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
만 아니라, 현세에서 우리들이 행한 선악 행위나 노력 여하에 따라 현세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만일 자신의 운명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현
실에서의 의지나 노력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기 때문에 수행에 의해 현세에서 고통을 해결하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므로 수행의 노력도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스스로 업론자(행위론자行寫論者)임을 설하고, 당시의 숙명론이나 신의론神意讀에 대해 각자 행위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숫타니파타」에 “인간은 출생에 의해 천민이 되는 것도 아니며, 출생에 의해 사제자司察者가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도 되고 사제자도 된다고 설해져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끊엄없이 행위의 질적 의의가문제시 되고, 행위의 내적 동기가 중요시 되었다. 불교에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써 인생을 개척해 나 갈수 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