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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에 대한 짧은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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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맑음 1999년 04월 206호
봄이 성큼 다가왔다.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와 경칩이 지나고, 춘분 무렵이면 대지는 연녹색으로 출렁거린다. 꽃철이 돌아온 것이다.
지금쯤 고향 집 둘레는 꽃불이 장관을 이루고 있겠지. 분홍빛 바다에 한 폭 그림처럼 떠 있을 옛 동산이 선하다. 추억도 새록새록 샘솟고..
산자락에 피어 있는 개나리, 진달래의 그 화사한 모습은 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려 준다. 이 때쯤이면 새싹들은 더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농부들은 바빠지기 마련이다. 들풀들이 자우룩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고, 논과 밭에는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다. 농촌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해진다.
어린 시절, 우리는 진달래꽃을 참꽃이라 불렀다. 입술이 잉크 빛이 되도록 꽃을 따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기억.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잊혀지지 않는 슬픈 그리움’이라 하였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친구 서넛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가 참꽃을 따 먹었는데, 혀에 착 달라붙는 그 시큼한 맛도 좋았지만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 그만 이었다.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배앓이 하는 아이도 있었다. 참꽃을 한아름 꺾어서 병에 꽂아 두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며칠 못 가 시들어 버리기 일쑤였지만 그 눈부신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월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산은 가장 눈부시게 옷을 갈아 입는다. 아랫 녘부터 피기 시작한 진달래꽃은 마치 달리기 시합을 하듯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오는데, 칙칙하던 산이 비로소 본디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다.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꽃 무리를 멀리서 바라보면 꼭 연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의 춤사위를 보는듯해 황홀감에 젖어 든다.

수줍어 수줍어 못 다 타는 연분홍이
부끄러 부끄러서 바위 틈에 숨어 피다.
그나마 남이 볼세라 고대 지고 말더라.

이은상의 시조 ‘진달래’의 한 부분이다. 이 시조를 옮조리노라면 진달래꽃이 왜 아름다운지 넌지시 알아차리게 된다. 부끄럼을 잘 티는 아리따운 처녀가 그려진다고나 할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사람들마다 즐겨 옮조리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그 무렵 민족정서를 민요적인 율격으로 표현한 명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의 정한을 체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유교적 휴머니즘이 짙게 깔려있다. 봄을 더욱 친숙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게 하는 시이다.
진달래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봄을 대표하는 꽃이다. 일명 두견화란杜鵑花라고도 하는데, 두견새가 울면서 토한 피가 두견화가 되었다던가. 만일 누군가 이침에 그 새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은 곧 그가 연인과 헤어지게 됨을 뜻한다. 그래서인지, 진달래꽃은 두견새의 마음을 달래듯 붉게 피어난다.
꽃말은 절제, 사랑의 기쁨이다.
흰 꽃이 피는 것을 흰진달래, 작은 가지와 잎에 털이 난 것을 털진달래, 잎이 넓고 타원형인 것을 왕진달래, 잎이 윤기가 나고 사마귀 같은 돌기가 있는 것을 반들진달래, 열매가 가늘고 긴 것을 한라진달래, 키가 작고 꽃도 작으며 다섯 개의 수술이 달린 것을 제주진달래라 힌디.
산과 언덕에 무성히 핀 진달래꽃을 보고 “산에 불어 붙은 것 같다”고들 한다. 봄의 시작을 알려 주는 꽃이면서 강한 생명의 환희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 같은 꽃! 아마 그래서 진달래꽃을 여성의 문장紋章으로 생각했으리라.
진달래의 색은 주로 분홍, 자홍색과 비슷하여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빛깔이다. 분홍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하고, 보라색이라 하기에는 너무 연하다. 그 색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수줍은 새색시의 얼굴을 그려보게도 되고, 새롭고 환하게 피어나는 봄처녀가 연상되기도 한다.
진달래는 먹거리로도 일품이었다. 꽃잎과 술밥으로 정성들여 빚은 진달래꽃술(杜鵑酒)은 일미一味다. 이 술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이 원인 모를 병이 들어 충남 당진군 면천에서 요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열일곱살 된 그의 딸이 꿈을 꾸었는데, 신선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신선이 시킨 대로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어 아버지(복지겸)에게 드렸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충남 면천의 진달래술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이름이 나 있다. 그 특유의 향도 그렇지만 만드는 방법도 독특하다. 또 찹쌀가루 반죽에 꽃잎을 놓아 참기름에 지져 내는 진달래꽃전이 있고, 꽃잎에 녹말을 씌워 데쳤다가 꿀물에 타서 만드는 진달래 화채도 있다. 이러한 먹거리마다에도 진달래꽃 빛깔은 어리게 마련이어서, 별난 맛과 함께 산뜻한 느낌을 즐기게 해 준다.
진달래와 비슷하게 생긴 꽃이 있는 데, 바로 철쭉이다. 먹을 수 없다고 해서 ‘개꽃’으로 불리는데, 꽃부리께가 끈적하고 독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린 시절, 실제로 철쭉을 진달래로 알고 꽃잎을 따먹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었다. 개꽃에는 독이 있다는 것을 그때에 안 셈이다.
꽃바람이 분다. 나의 어린 시절이 묻어 있는 진달래 동산에 가 보고 싶은 이즈음 이다.
올해는 또 어떤 모습으로 꽃불이 놓여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원수 선생의 ‘고향의 봄’을 불러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