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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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현구
1996년 04월 170호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보이는 파아란 하늘이 덧없이 푸르기만 하다. 물처럼 흘러간 시간들은 길가에 헤아릴 수 없이 흩어진 파편난 돌 조각처럼 마음 속에 한 조각씩 간식되어 가끔 흰 구름일 듯 지난 일들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곤 한다. 상판스님에게 반배하지 않고 못본 척 지나치던 일, 장삼 걸이에 장삼 잘못 걸어 놓던 일, 예불 시간에 예불 들어가지 않아서 반장 스님한테 참회 받았던 일 등 무수히 많은 일 가운데 좋은 일은 생각이 나지 않고 빛바랜 낙엽처럼 칙칙하고 퇴색된 일들이 마음에 찌꺼기가 되어 이 싸늘한 겨울날을 더욱더 썰렁하게 만들어 무장된 기마병처럼 다가온다. 아마 이런 일들을 떠올린다는 것은 마음에 수행이 푸른 과일처럼 익지 못한 탓일 게다. 만일 선과 악에 반연하는 바가 없다고 하더라도 모름지기 자성으로부터 악과 선이 일어나 인연법을 좇아 생하고 멸하는 것은 나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다. 불가에서는 인연법에 따라 스스로 일어나는 마음을 스스로 닦고 자기 마음에 부처를 찾아 수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라 했건만 아직 풋내기 강당 학인으로서는 힘든 일로만 느껴진다. 일찍이 달마 대사는 진리를 자각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으로 벽관이라는 독자적인 대승법을 주장하여 면벽으로 숭산 소림사에서 구 년 동안 수행하므로 외부로부터 불어 닥치는 풍진을 방지하고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을 내면적인 마음으로 통일하여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순일무잡한 본디의 마음인 인신의 세계에 응주應住해서 망妄을 버리고 진에 돌아가 허망이 접촉할 수 없는 근원적인 마음인 실천법을 행했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실천법을 사행四行에 의거하여 말하고 있는데 먼저 사행의 구조와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가 보원행報怨行이다. 곧 보원행이란 수행자가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원중심과 정신적인 고뇌를 극복하고 도道에 나가도록 하는 마음가짐이다. 곧 예를 들어보면 금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이 전생에 악독한 가리왕을 만나 몸이 찢기어졌지만 한 생각의 원한을 품은 일이 없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나, 달마대사는 괴로움을 당해도 근심하지 않는다고 말함은 괴로움의 원인과 근원을 통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달마의 보원행의 입장을 우리는 계승해야 할 것이다. 수연행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인연에 따라서 각자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고락은 인연에 의한 것이며 또한 인연이 다하면 모두 허무하게 된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순응하고 역행하고 역행하는 인연에 맡기어 진리의 도에 이를 것을 말하고 있다. 황벽과 임재 선사가 \'인연에 따라서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옷 벗고, 걷고 싶으면 걷고 앉고 싶으면 앉으며, 조금이라도 불과에 희구하는 생각이 없게 하라\'라고 하듯 달마 대사의 선 생활을 신생활에 전개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소구행은 사람들이 미혹하여 곳곳에서 탐착하고 명리를 구하지만 지혜인은 참됨을 깨달아 이치로서 속됨을 바로 잡고 무위법에 마음을 두고 몸은 자연 운행에 맡기면 만유는 모두 공하여 버리고 즐거울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곧 무소구행은 일체의 가치를 밖에서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일체 개공의 진리를 깨달아 탐착하는 마음을 초월하는 실천행이다. 청법행은 성정性淨의 이치에 계합한 삶을 만드는 실천행이며 성정의 이치도 열반경 등에서 주장하는 불성설 및 자성청정신을 말한다. 달마는 유마경의 공사상으로 설해진 법의 의미를 실전적인 근거로 삼고 있으며 상품이 본디 청정한 이치를 다름 아닌 공의 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자리이타의 보살 정신과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보리도를 장엄하도록 하는데 이와 같은 달마의 사행설은 대승불교를 전개할 수 있는 실천 덕목으로 설한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달마 스님의 사행설을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성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체의 마음의 실천을 통해 참회와 육바라밀 또는 아침 저녁 예불 등의 수행으로 실천 수행해 나간다면 자심에 걸림이 없어 늘 지혜롭고 선과 악에 반연하는 마음이 없으련만 사집반 종강 말기인 이 시점에서도 망상과 번뇌가 서로 범벅이 되어 커다란 암벽처럼 다가와 수마로 변해 시간의 무게로 강하게 짓누르곤 할 때는 어찌 할 바가 없다. 갑자기 경에 이르는 한 소절이 떠오른다. \"성인은 마음을 구하나 부처를 구하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면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나 몸을 다스리지 않고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구절의 글이 새삼 느껴진다. 불명경에 말하기를 \'죄는 마음에서 났다가 다시 마음을 좇아서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악과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모름지기 근본을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으며 만일 이런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노력을 허비하여 밖으로 나타난 형상이나 모양으로 구한다면 몇 겁을 지나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나 안으로 마음을 관조하여 깨치면 한 생각 사이에 보리를 얻는다 하였다. 잘 모르긴 해도 결제중 용맹정진 때만 되면 방장 스님께서 몸소 학인들에게 \"이 뭣고!\" 화두를 주시는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곧 동가경에서 말했듯이 일체유심조 일체만법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며 마음 밖에는 법이 없어 마음이 일체 만법의 근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듯이 본디 청정함과 더러움이 없지만 중생업견으로 보기 때문에 더럽다 깨끗하다 라는 분별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마음을 닦아서 일체의 망념이 다 떨어져 나가면 누구든지 청정하여 불국토를 보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일체만법의 근본이 된다고 합니다. 중생들이 일체법을 만드는 근원으로 돌아간다면 사바세계가 해인삼매海人三昧이며 행주좌와의 자성본원이 법성삼매法性三昧가 되는 것이며, 평상심으로 일상생활 전체가 자연 그대로 꾸밈없는 삶이 인격에 주체가 되어 인간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인륭데 행복과 평화가 바탕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