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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교 계통(2) : 증산교 교단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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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6년 04월 170호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에서 신을 찾는다
도와 달라고 애원하는가 하면,
복을 빌고 빵을 달라고 졸라댄다
질병과 죄악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이 짤막한 시 구절은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히틀러의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교수형을 당한 본회퍼 목사가 지은 것이다. 이 편언척구야 말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절에 가고 또 교회에 가는지의 이유를 족집게로 집어 내듯 하고 있다.
그것은 일제 암흑기에 독립운동의 선봉장이 되어 민족 제단에 피를 뿌린 숱한 애국지사의 종교 지도자의 웅혼의 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동시에, 오늘날 민족종교 단체들이 어째서 그다지도 영락한 모습을 들어내는지 그 원인을 똑바로 적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거두절미해서 의식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요즈음에 와서까지도 입시철이면 절이나 교회에 어째서 그렇게 많은 신도들이 북적거리는지를 사실대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일제 때 차경석의 보천교가 운집하는 문도를 거느리고, 또 증산교가 오늘날 유례없이 교세를 확장해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화천化天한 지 칠십여 년을 넘긴 강증산이 다른 어느 민족종교의 교조보다도 한층 더 신비한 위력을 지닌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실상 어떤 종교의 창시자이든 반드시 만병 통치의 의술을 가지기 마련인데, 강증산 역시 말년에는 중생을 병고에서 구제하는 신통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모양이다. 강증산의 이러한 자신의 활인방活人方을 가리켜 의통醫統이라 했는데, 아마도 \'내 손이 약손\'이라고 하면서 병든 아낙네의 아픈데를 이리저리 더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강증산은 다른 여느 종교의 창시자처럼 단순한 활인방의 의통만으로 중생을 구제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앞서의 본히퍼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가난과 질병 그리고 죽음과 죄악이라는 전체적인 고통으로부터 삽시간에 인간을 구제한다는 미륵임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강증산이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자처한 것은 어느모로 보나 의미 심장한 일이다. 현재 강증산의 묘소가 있는 전라북도 금구 무악산 아래의 금산사에는 국보인 미륵전이 있다. 이 유서 깊은 고찰은 백제의 법왕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 견훤의 원찰이라고도 한다. 견훤은 두말할나위 없이 신라가 멸망한 뒤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의 부하이며 그 역시 미륵불이라 참칭僭稱한 바 있다. 따라서 금산사 주변은 우리 나라 미륵 신앙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륵 신앙이란 다름이 아니라 말세가 되면 도솔천에 살던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내려와서 지상천국의 낙원인 용화세계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나라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나라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으레 미륵 신앙이 왕성해진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민중의 종교 운동이 그다지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중기에는 황석영의 동명 소설로 잘 알려진 장길산 같은 의적이 나타나서 스스로 미륵불의 화신임을 자처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강증산이 견훤의 원찰이 있는 전라도 김제땅에서 미륵불임을 자처한 사실은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정감록에서 나오는 진인眞人, 또는 정도령이기도 하다. 증산교의 주경전인 「대순경전大巡典經」에는 \'만국활계 남조선萬國活計 南朝鮮\' 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여 \'모든 나라의 살길이 남조선\'에 있다라는 뜻이 되지만, 실상은 미륵이자 진인으로 강림하는 강증산이 사는 후천 선경의 낙원이야 말로 가난과 질병이 없는 이상세계라는 뜻이다.
강증산이 죽은 뒤에 그의 후계자들은 제각기 간판을 걸고 정통파를 자처하였으나 그 중에도 차경석의 보천교가 가장 위세를 떨쳤다. 차경석은 교단이 양적으로 크게 팽창을 하자 직첩織貼을 팔기 시작했고 이리하여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말하자면 서양에서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게 했던 면죄부와 흡한 한 점이 있다고 보겠으나, 실상 조선시대의 그릇된 풍습을 본딴 것에 불과하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빈약한 재정을 충당할 목적으로 벼슬자리를 마구잡이로 팔았으니 요즈음 식으로 말한다면 \'이사관\'이니 \'서기관\'이니 하는 직급은 명시하되 무슨 국장, 무슨 과장이니 하는 보직은 주지 않는 사령장 수여 방식이다. 옛날에는 이런 방식으로 벼슬을 딴 사람이 많아서 가령 어떤 사람의 조상 가운데 통정대부니 가선대부니 하는 벼슬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돈 주고 산 그야말로 공명첩空名帖을 산 것게 불과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백성은 물론 명망 있는 사암의 주지는 절친한 권력자에게 부탁해서 공명첩을 듬뿍 얻어다가 그것을 팔아 대웅전 짓고 사찰을 중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여간 차경석은 그런 조정지법朝宗之法을 본따서 전라북도 정읍에 큰규모의 건물 여러 채를 짓고 스스로 천자를 참칭하면서 군림하다가 왜정 말기에 교단 자체가 멸문지환을 당하는 시련을 겪었으니, 그때에 상당수의 교도들이 학살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독립운동과 결부지어 이야기하려는 축들이 있으나 가당치 않은 일이다. 이리하여 지리멸렬하다시피한 증산 교단을 조철제라는 사람이 다시 부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스 베버라고 하는 독일의 사회 학자는 근세 서양의 청교도들이 근검 절약하고 열심히 노력 봉사해서 자본을 축적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물론 서양의 수도원에서뿐만이 아니고 우리 나라의 사찰에서도 승려들이 이른바 \'운력運力\'이라고 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재산을 불려서 자급자족하고 남은 것은 시장에 내다 팔고 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절에 공양미 떨어지면 중이 법당 지붕에 올라가서 기왔장풀 뽑는다\'는 속담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모든 종교의 재원은 역시 \'갖다 바치는 것\'으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유교주의자들이 사찰이나 기타의 유사 종교가 광혹편재狂惑騙財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다른 말로 복받게 해 준다고 속여서 돈 뺐는다는 표현인 것이다. 하기야 영재부상迎齋赴喪이라고 해서 조상의 극락왕생과 천도를 비는 49재라든지, 하여간 절에서 올리는 모든 예불 활동을 그와 같이 싸잡아 도매금으로 욕했으니까 \'유교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 한지도 모른다.
공명첩을 사든지, 또는 유식한 말로 기진寄進 투탁投託이니 하는 \'갖다 바치기\'를 하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돈이라는 게 요즈음처럼 흔치가 않다. 그렇다면 김제 만경들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갖다 바쳤단 말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이 고장은 우리 나라에서 과거나 지금이나 쌀이 제일 많이 나는 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쌀이 경제적 재화의 기본이 아니다. 그러나 행방 전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또 쌀보다 더 귀한 것이 황금인데, 지금도 김제 만경들의 논바닥을 뒤지면 사금砂金 노다지가 무진장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다만 요즈음에는 채산성이 없어 캐내려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오륙십 년 전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쌀 대신 \'노력 봉사로 때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어린애 머리만한 \'노다지\'를 비단 보자기에 싸 가지고 부산 감천동으로 간 증산교 간부들이 태극도를 세워 증산교의 명맥을 이었다고 말하지는 았겠다. 하여간 \'서울 가는 12열차에…….\' 하는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가 유행하던 오십년대 초의 서울 환도 무렵 부산 감천동의 태극도는 십만 성도를 표방하면서 큰 교세를 떨쳤다. 서울 면목동의 대순진리회는 거기서 다시 갈라져 나왔다.

지난 3월호의 천지공사天地公事는 대순편력大巡遍歷의 오기이었기에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