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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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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풍광과 진경 - 이호신 1996년 04월 170호
처음 남해로 가던 날은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날이었다. 남해의 푸른 창파와 미조리향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지난해 늦겨울의 여행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남해南海 금산錦山 보리암으로 향하는 걸음은 보리암 순례와 더불어 금산에 자생한다는 암차岩茶의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안내를 맡은 김기원 교수(진주산업대학원)와 이재휘 선생(서지학)등 몇 명의 일행과 더불어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잔뜩 찌푸린 날씨에 보리암에 올랐다. 반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는 \'남해\'는 위로 여러 험준한 산들을 껴안고 있는데 그 가운데 \'금산\'(681미터)은 동남 해변가에 자리하고 주봉인 대장봉을 비롯하여 향로봉, 화엄봉, 일월봉 등의 기암 괴석, 천연동굴(음성굴音聲屈)로 된 금산 38경이 있어 남해 소금강으로 불린다. 현재 남해군에는 예순다섯 개 가량의 무인도와 열세 개의 유인도가 있는데 이 가운데 세존도, 연화도, 능인도 들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금산 보리암의 영향으로 짐작되고, 얼마전 남해 고현군 대사리에서는 \'팔만대장경 제작지\'가 발굴 조사되어 크게 조명되기도 하였다. 보리암은 그 터의 특성상 큰 가람의 형태를 갖출 수 없는 만큼 보물급 문화재는 없지만 기도처로서는 어느 곳보다 명망이 높다. 서해 보문사(送子觀音), 동해 홍련암(海水觀音)과 더불어 이 곳 금산 보리암(龍頭觀音)은 옛부터 깊은 내력을 지녀온 수도 도량이다. 683년(신문왕3) 원효가 이 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고 하고 그 암자를 보광사普光寺라 하였다. 그 뒤로 조선 개조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연 것에 감읍하여 \'금산\'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사연인즉 왕이 된 영험으로 산을 모두 금비단으로 둘러 쌀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름을 금산으로 고쳐 의미를 부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보타산\'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바다를 앞으로 하고 반도와 대륙을 뒤로한 채 서 있는 산이며, 관세음보살이 계신 듯하여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곳 화엄봉은 바위 모양이 화엄의 두 글자 모양이고 원효 대사가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고 전해온다. 금산에서 제일 높은 상봉은 망대望台로서 이 곳에 오르면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금산38경고 금산을 에워싼 만경창파가 한눈에 굽이치고 특히 장엄한 일출경日出景을 볼 수 있다. 망대에 오르며 펼쳐지는 봉우리와 그 아래로 아스라이 휘어감기는 이름도 아름다운 미조리의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잠깐 비구름이 밀려가고 창파의 섬들이 조약돌처럼 드러나자 남해의 풍광은 저절로 솟구치고 가라앉는 것이 하늘과 따의 조화요 산과 바다의 열림이 뚜렷해왔다. 그 장엄한 경관의 중턱에 보리암이 자리한 바로 뒤로 물러서서 봉우리를 바라보면 지극히 음양의 대비가 조화로서 드러남이 확연했다. 이른바 바위산은 양이요, 바다는 음의 기운으로 서로를 끌어당기고 의지하며 솟아나고 감싸며 번져 있으니 내심 화폭에서 그 기운을 재삼 음미해 보는 상생의 조화가 신비로서 넘쳐났다. 일행들은 암차의 씨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붓을 든 이는 금산의 풍광과 보리암의 성지에 넋을 잃고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았다. 남해 금산의 보리아. 그 곳에서 진정 음양의 조하, 대자연의 섭리를 다시 한번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