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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암 여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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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홍현숙 1996년 04월 170호
잘 마른 장작 몇 개비 위에 주위의 잔가지들을 긁어모아 스님은 작은 모닥불을 피운다. 잔가지 중에는 더러 꽃망울이 맺힌 동백이나 매화 가지도 있다. 스님은 객에게 그 나뭇가지들이 타면서 내는 향을 맡아 보라 한다. 과연 나무 타는 그윽한 향이 불의 온기와 더불어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춥고 적막하던 산중도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도 따뜻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양옆으로 느릿하게 능선을 그리며 서 있는 두륜산 봉우리는 양탄자처럼 보드랍고 포근하다. 그 봉우리 사이로 산 능선 몇 겹 지나 멀리 남해 바다 푸른빛이 눈에 들어온다. 동백은 벌써 붉은 꽃봉오리를 열었고 매화도 며칠만 있으면 꽃을 틔울 기세다. 어느새 해거름이 되면서 먼 바다도 산능선들도 다같이 어슴프레한 잿빛 푸르름에 묻혀 버린다. 이윽고 스님은 남은 불길 위에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사람들에게 밥그릇을 돌린다. 누군가 가져다주었다는 배추김치를 곁들인, 뜨락에서의 저녁 공양은 꿀맛이다. 구수한 향기를 내며 타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그림같은 풍경 속에서, 이처럼 호젓한 기분으로 스님이 손수 장만한 공양을 들다니, 이런 성찬이 어디 있고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숨이 턱에까지 차도록 가파른 산길을 사십 분은 족히 걸어야 하는 곳에 있어도, 이 곳 일지암을 찾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옛날 초의선사의 삶의 향기가 밴 일지암의 고적한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천성이 정이 많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가진 것 없는 산중 생활이지만, 자연의 감성과 운치로 가뜩 멋을 내고 맛을 더하여 오는 객을 대접하는 여연스님이 이 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연스님은 정말 사람들에 대한 정이 남다르다. 누구라도 오면 반기며 허물없이 스님이 가진 것들, 이르테면 음악과 차와 시와 예술적 감성과 자연에의 탐닉을 함께 나눈다. 또 사람들은 그런 여연스님이 멋스럽고 좋아서 부지런히 일지암을 찾고 또 자기네 자리로 초청하여 강연을 청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를 사는 중생의 삶이 고단하고 여유가 없는 만큼, 그렇듯 걸림없이 자연과의 동화와 문화적 감성으로 낭만을 구가하는 스님의 유유자적한 모습은 그야말로 사람들에게는 삶의 청정제요 감로수일 터이다. 스님은 스스로 이런 낭만적인 성향을 수행자로서 못난 부분이라 한다. 사실 출가한 지 꽤 오래도록 그로 인한 갈등과 부대낌이 적지 않았단다. 행자 시절에 남 몰래 이불 속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쫓겨날 뻔했던 일이야. 그때로서는 책과 음악을 일체 금하는 절 집안 풍속이 견디기 힘들긴 했으나 지나고 나니 웃어넘길 추억담이 되었지만,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길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마다 좀처럼 추스러지지 않는 자신의 그런 감상이 장애가 되었음이 사실이고, 한창 진보적 승려 대열에 서서 대승의 이념으로 치열하게 살 때에도 낭만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법랍25년에, 세수50의 지긋한 나이에 이른 스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그런 시시비비를 가르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걸림없이 편안하게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고 공부가 익은 것이다. 한때는 구도의 길에서 걸림돌이라 여기던 자신의 개성과 특성을 생산적으로 발전시켜 \"작으나마\" 대승의 보살행 실천으로 승화시켜 나가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스무 해를 훨씬 넘긴 중노릇이 첫출가의 서원하고는 너무 큰 간격이 생긴 것은 사실이에요. 갈수록, 깨달음의 세계가 쳐다보기도 힘든 높은 산만 같아. 아득하기만 하지. 거기서 느끼는 절망감과 좌절감들도 중요하고 의미가 깊다고 보아요.\" 스님은 그러나 주저앉지 않았다. 차를 만드는 일, 문화운동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자리를 나누어주는 것에서 또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길에 대해서, 포기라면 너무 슬프고, 글쎄, 방편일는지 자기합리화일는지 모르나, 아득해 보이는 그 길을 멀리 우회해서 찾아갈 수도 있다 싶어요. 이를테면, 차를 통한 문화운동이나 출판 일과 글쓰기를 통한 불교운동이 그런 것이지요.\"
여연스님이 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꽤 오랜 일로, 76년, 그 무렵 대표적인 차인으로 꼽히던 효당스님에게서 본격적으로 차를 배우면서부터이다. 그 뒤에 지인들과 함께 \"차인회\"를 결성하였고, 그들과 함께 일지암을 지금처럼 복원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스님은 지금 그 일지암에 차밭도 가꾸었다. 차의 맛을 통하여 인생을 통찰하던 초의선사의 뒤를 좇아, 차문화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일로서, 어설픈 서구문명에 오염되어 잃어버린 우리의 고유한 미덕과 아름다운 문화 양식을 되찾음은 물론이요, 산업화와 소비주의, 상업주의가 빚은 가치관의 혼란과 소외와 계급간의 갈등 같은 현대의 고통을 \"따뜻한 문화의 패러다임\"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의식에 대한 활발한 자각이겠지만, 결국은 자연에 대한 연민이랄지, 일체의 유정 무정에 대해 동체대비한 사랑의 길이 아니겠어요. 차의 길을 통해서도, 자연의 향기를 오롯이 담아내려는 차의 장인정신을 통해서, 자연 사물을 가장 투명하게 바라볼 수가 있어요. 그런 점에서 차의 길도 깨달음의 한 방법이 되리라 봅니다. 비록 온 중생의 고통을 구제할 힘은 없지만, 내 주변에나마 자연의 생명과 향기를 나누어주고 느끼게 함으로써 맑은 인성과 자연에 대한 통찰과 화합을 되찾게 하자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이 화합하는 것, 이것ㅇ디 바로 정토를 이루는 길 아니겠어요.\"

여연스님은 지나간 이력에서 그래도 가장 의미를 찾는 것은 해인지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불교운동의 실천이라 한다. 여연스님의 또하나의 \"못난\"부분이라 할, \"삐딱한\" 반골 기질이 여기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 삐딱한 기질은 이미 해인사 강원 시절부터 알려진 바다. 강원에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너무 구태의연해 보였다. 스님은 문자속 깊은 종림스님과 \"작당\"하여 교과 과목을 바꾸고 도서관도 만들며 운영체제를 개혁했다. 겁 없는 학인들에 의한 \"성공한 쿠테타\"였다. 팔십년대 중반쯤이었다. 원시불교를 공부하겠노라고 갔던 스리랑카에서 그저 문전만 훑다가 역부족을 느껴 중도에 돌아왔을 때였다. 향적스님이 어렵사리 \'해인\'지를 꾸려가고 있었다. 여연스님은 기꺼이 그 일을 도왔다. 당시 \"야당지\" 대접을 받던 해인지가 끊기는 일만큼은 막자는 의지가 컸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해인지를 꾸려갈 재원 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연스님은 해인사 경내에 서점을 만드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스님의 삐딱한 기질은 종무소를 \"윽박질러\" 소금창고를 헐고, 그 곳에 우리 나라 최초의 사찰 서점을 여는 일을 관철시켰다. 그 뒤로 서점 활동 줄곧 해인지의 중요한 재원이 되어 왔다. 그 무렵 해인지에는 향적스님 외에 종림, 현웅, 원택, 소허, 법성 스님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때부터 해인은 도약기를 맞았다. 지면도 8면에서 24면으로 늘면서 어엿한 잡지 꼴을 갖추었다. 뒤이어 시명스님이, 그리고 법연스님이 해인지에 가세했다. 문학에 조예가 깊은 법연스님이 편집장을 맡으면서부터, 그때까지 불교계에서 찾아볼 수 없던 진보적인 시각의 기획과 필진의 기용으로 해인은 질적으로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었다. 그러는 동안, 수행자들이긴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라, 더러 불협화음도 있었다. 글 때마다 스님은 문제 해결으 ㄹ위해 좌충우돌로 악역을 자임했다. 아무튼 해인지와 해인사 서점은 불교계의 출판문화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인지를 중심으로 한 그들 젊은 스님들의 모임은 어느새 밖으로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꾀하는 일종의 \"결사\"로 비쳐지게 되었다.
\"글쎄, 굳이 결사라고 이름할 것은 없었지만, 불교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 아래에 뭉쳤습니다. 불교의 사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 동안 대승의 이념을 저버린 채 산중에 웅크리고만 있던 불교의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너무 폐쇄되어 있었고, 피해의식도 컸죠. 우리는 새로운 불교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속가의 선지식들, 곧 진보적인 학자들과 연대하여 불교 사상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써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 등을 모색해 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마침내 근세 한국 불교사에서 큰 획을 긋는 사건을 거사하기에 이르렀다. 해인 편집진들 외에 서울의 성문스님 등 승가대학 학인들, 또 명진, 종태스님 같은 이들이 주축이 되어, 해인사에 이천 대중이 모여 불교의 자주화를 외친 9.7 해인사 승려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불교는 정치에 종속된 보수 불교이며 비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인 종교 집단이라는 인식을 크게 불식시킬 수 있었고, 불교의 위상도 웬만큼 높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해인 편집진은 점점 더 진보적인 생각으로 영글어 갔다. 전 종단을 향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벌이고 더불어 불행한 정치 환경 속에서 신음하는 이 땅의 역사와 사회 현실에 불교가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9.7승려대회의 핵심 인사들과 함께, 대승불교승가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불교의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불교계의 기성세력은 그런 진보적인 스님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대했다. \"워낙 \'운동\'에 대한 알레르기가 컸어요. 심지어 \'빨갱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지요. 해인사 소임에서도 소외되고, 그 때 원택스님의 외호가 없었더라면 해인지 운영권까지 뺏길 뻔했지요. 어느 편이 옳다 그르다 할 일은 아니고, 젊다보니, 우리가 좀 과격해 보였겠지요. 또 오해도 많았을테구요. 아무튼 의미있고 보람이 큰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대승불교승가회는 한동안 활발한 활동 성과를 보였으나, 안타깝게도, 봉은사 사태가 빌미가 되어 정치세력, 이권세력으로 오해받는 진통을 거치면서 이내 시들해졌다. 결국 대승불교승가회는 세 해만에 문을 닫았지만, 뒤에 정토구현승가회와 손잡고 실천불교승가회로 다시 태어나, 불교 개혁을 주도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 사이에 불교 종단 자체도 크게 변화했거니와, 불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양심의 비호 세력으로서, 사상적 의지처로서 신도들과 일반이들이 거는 기대도 커졌다.

여연스님은 해인지와 해인지의 자주권을 지탱하려는 몸부림에서부터 비롯된, 저간의 치열한 노력과 운동이 불교의 발전적인 변화에 갑진 밑거름이 되었음에서 그 가치를 찾는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아볼 틈없던 그 숨가쁜 길에서 고통도 적지 않았고, 깨달음의 길과 어느새 크게 멀어져 왔음을 직시하게도 되었지만, 그것은 가야 할 길이었기에 후회는 없단다. 요즘 여연스님의 일상은 퍽 자유롭다. 아무 것에도 걸림 없이, 스스로의 리듬에 맞추어 시간을 엮어나간다. 봄철 한때 차 만드는 일로 바쁠 때가 아니면, 할 일이라고는 원고 쓰고 강연 준비하고 더러 방송에 나가는 정도란다. 좀 한가롭다 싶으면 음악도 듣고,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대화하고, 그렇게 무애하게 지내면서 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문화운동을 모색해가는 것이다. 이렇듯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도 여연스님이 수행자로서 근본을 지켜 올 수 있는 힘은, 출가 초기에 꽤나 삐딱하여 탈도 많던 자신을 그 팔팔하고 꼿꼿한 수행 자세로 사정없이 단근질해 주신 은사 스님이신 혜암 큰스님의 가르침에 있다고 한다.
\"특히 큰스님 따라 지리산 상무주에서 20일 단식 용맹정진을 한 것이 가장 큰 힘이 됐어요. 버티다 버티다 너무 힘들어 도망치고 싶었지만 눈에 막혀 도망도 못 치고, 우리 스님을 벼랑으로 떠밀어버릴까도 생각했어요. 그래도 큰스님 덕분에 용케 용맹정진을 마칠 수가 있었고, 그때의 그 경험이 중노릇하는 동안 가장 큰 힘이 되었지요. 우리 스님꼐 자주 인사 드리지는 못하지만, 꼿꼿하고 청정한 당신 모습에 늘 감사 드리지요.\"

봄비로 산봉우리에 안개가 뭉긋하다. 하늘빛과 산빛이 촉물안개에 젖어 서로 화합하듯 스며들고 있다. 그를 바라보며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꿈꾸는 여연스님의 갈 길에는 언제나 그런 봄비가 내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