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유명해서 누구나 자세히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대학교 교양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이황’에 대해 질문해 보면, 이 사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수줍음을 무릅쓰고 겨우‘성리학’·’도산서원’두 단어를 말해버리고 나면, 마치 내 임무를 다했다는 듯 모두들 약속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가끔 조폐공사 전속 모델이라고 요샛말로 아재 개그를 던지는 용기 있는 학생들을 빼곤.내겐 해인사와 홍류동이 그렇다. 중학교 한문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을 배웠던 것이 그 즈음이었지만, 해인사와 홍류동은 그저 우리나라 어디에 있는 절집과 산일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홍류동을 처음 찾았을 때가 1990년이니, 벌써 20여 년이 훌쩍 지났다. 홍류동 계곡을
처음 찾았을 때는 제법 풋풋한 티를 풍기던 대학 새내기였던지라, 엠티의 설렘과 계곡의 물소리에 하루가 무척 짧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더군다나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은 골짜기는 여기가 왜 홍류동인지를 실감케 했다. 그 뒤로 어느 때인가 다시 한 번 찾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의 일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 재미가 없었거나 온 종일 막걸리에 취해 있었을 법하다.
해인사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0년에 백강白江서수생徐首生교수의 원고를 정리하면서이
다. 백강 선생님은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면서 1954년부터 해인사를 답사하였고, 1959
년 이후에는 틈이 날 때마다 해인사에 기거하면서 팔만대장경을 조사하고 해인사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아마도 백강 선생님은 해인사를 기초부터 이해하려는 취지로 안내서와 자료집을 겸한 책자를 제작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5천 매가 넘는 분량의 육필 원고는 2년간의 작업 끝에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라는 큰 제목 아래《해인사 관련 기록 자료집》과《백강 서수생 열정의 반세기》,《 백강 서수생 저작집》으로 정리되었다.
《해인사 관련 기록 자료집》에는 신라 애장왕 3년(802) 순응 화상과 이정 화상에 의해 해인사가 창건되었다는《가야산해인사고적》을 정리한 해인사의 역사와, 최치원의 <선안주원벽기> 이후 창작된 해인사 관련 문장 80여 편과 한시 110여 수가 소개되어 있다.
《백강 서수생 열정의 반세기》에는 1954년 대구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해인사를 답사한 메모를 시작으로, 해인사의 자연과 역사, 팔만대장경의 의의·내력·이안移安, 팔만대장경판의 체재 및 교정, 해인사의 주요 건물과 탑, 해인사의 암자와 말사末寺, 해인사의 고승, 관련인물, 전래 설화 등을 두루 수록되어 있다. 해인사에 대한 정보는 이 두 권의 책만 가지고도 대략의 윤곽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대학출판부에서 간행하여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과 한문 원문의 번역에 오류가 산견된다는 사실이다.
백강 선생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필자는 최치원의 한시를 번역하는데 적잖은 애를 먹은 기억이 또렷하다. 최치원의 한시는 전고典故와 용사用事도 많았을 뿐더러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녹아있었기에, 작품이 지닌 본래의 뜻과는 완전 어긋나버린 해석을 시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희랑 대사에게 보낸 시가 그렇다.
희랑 대사가 누구던가? 순응 대사와 이정 대사 이후 해인사를 다시 일으킨 분이자,《 화엄경》을 강설하여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분이 아니던가. 온화하게 미소를 머금고 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가부좌상은 지금도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오롯하게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건칠불乾漆佛을 대표함과 동시에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 제999호로 지정되었다. 최치원은 희랑대사에게 도합 10수를 전하였으나, 그중 4수는 일실되었고 지금은 6수만 전하고 있다. 그 시의 첫 수는 이렇다.
보득금강지상설步得金剛地上說석가모니께서 금강좌에서 가르침 설파하셨고
부살철위산간결扶薩鐵圍山間結보살들은 철위산에서 결집하셨네.
필추해인사강경苾海印寺講經희랑 대사가 해인사에서 강경하였고
잡화종차성삼절雜花從此成三絶이로부터 화엄은 삼절을 이루리로다.
인용한 시의 의미를 온전하게 접하기 위해서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발음을 빌려온 한자어에 대한정보, 화엄의 여러 경전들이 완성되는 과정,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고사 등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이 종합적으로 요구된다.
즉, 여기에 쓰인‘보득步得’은‘붓다(Buddha)’를 음차한 것이며, 부살扶薩은 보살菩薩과 같은 뜻이 ,‘ 필추苾 ’는 출가한 사람, 즉 비구比丘를 뜻한다. 또 첫 줄은《화엄경》이 탄생하는 과정을, 둘째 줄은 문수와 미륵 등의 대보살들이 아난阿難을 데리고 철위산에 가서《화엄경》·《법화경》·《열반경》등 대승 경전을 결집한 일을, 넷째 줄은 공자가 만년에《주역》을 좋아하여 죽간竹簡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탐독하면서 십익十翼을 저술한 위편삼절에 대한 고사를 말하고있다.
이 같은 몇 단계를 지나면 비로소 이 시에서 최치원은 희랑 대사를 미륵보살이나 문수보살 이후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교화시키려 보냈다고 극찬한 내용임을 이해할 수 있다. 보낸 시의 넷째 수에서 희랑 대사에 대한 최치원의 칭송은 절정에 다다르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언비교종천수天言敎從天授천 마디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하늘에서 전수받았고
해인진전출해내海印眞詮出海來해인海印의 진제眞諦는 바다로부터 왔네.
호시해우흥해의好是海隅興海義훌륭하도다, 신라에서 밝힌 해인의 뜻
지응천의위천재只應天意委天才하늘의 뜻은 그저 천재에게 맡겼을 따름이네.
이 시에서 말하는‘천 마디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화엄華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천재’는 바로 희랑 대사임을 가리킨다는 사실 또한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해인사가 비록 먼 동쪽에 있지만, 하늘의 뜻은 오로지 화엄학의 천재 희랑을 통해 붓다가 해인 삼매의 경지에서 선포한 화엄의 지고한 뜻을 밝히려고 했음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문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위를 취득한 지도 10년이 되어간다. 최치원이 희랑 대사에 준 시를 다시 정리하면서‘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대해 생각해 본다. 희랑대사에게 준 시의 경우, 처음의 번역을 꺼내 최근에 다시 독서한 것이 온고溫故에 해당한다. 이를 바탕으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새로 얻게 되는 것은 지신知新이다. 공자는 온고이지신을 말한 뒤, 이것이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도 좋다고 했다.
올 들어 우연하게 해인사를 찾을 기회가 있었다. 20여 년 만에 보는 농산정籠山亭은 예전의 기억이
아니었고, 큰 길에서 계곡 사이를 넘어가는 구름다리는 너무도 낯설었다. 그렇지만 미친 듯이 내닫는 계곡물은 여전히 인간 세상의 말을 들리지 않기에 충분했고, 홍류동 바위마다 새겨진 글씨들은 탐방객의 호기심을 자아내었다.
21세기를 흔히 정보와 소통의 시대라고 한다.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종현 스님이 몇 년의 노력 끝에 홍류동 입구의 석문에 초서로 쓰여진‘불초자 공생工生희羲’와 회암晦庵정혜(定慧, 1685~1741)스님의 독서당 차운시를 소개한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한시에 대한 정보 및 번역문은 월간《해인》통권388호 <보장천추>에 자세하다.) 또 해인사 홈페이지를 접속하면, 해인사 중창기와 창건기를 비롯하여 고려대장경에 대한 일반적 정보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에 홍류동을 찾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혹 예전에 잘못 알려진 정보가 아
직도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 아니면 최치원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바위도 찾을 법하다. 나에게 홍류동은 처음에는 그저 설렘의 장소였지만, 시나브로 공부와 일상에 다가와 꼭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를 던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용맹정진하는 수도인들을 본받아 예전의 잘못을 딛고 일어서야 할 대상이 되었다. 오늘은 그 실마리를 최치원에게서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