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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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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손석춘 2017년 01월 419호
“사람들이 어떻게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지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최순실이 부동산을 마구 사들인 독일에서 유력지가 보도한 촛불 예찬론이다. 칼럼을 쓴 독일 언론인에게촛불은‘민주주의의 모범’이다. 또다른 독일 언론은 “촛불과 노래, 공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빛의 축제”라고 격찬했다. 미국과 유럽의 정치가‘보수화’되고 있다는 보도들이 곰비임비 나오는 상황에서 촛불의 절경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독일 언론이 앞다퉈 내놓은 칭찬에 굳이 손사래 칠 이유는 없다. 이미 조계종단 지도부도 대통령 박근혜에게‘즉각 사퇴’를 요구하며,“ 진흙속에서연꽃이피어나듯수백만국민들이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는 촛불”에 적극 의미를 부여했다. 촛불이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라는‘진흙’에서 피어난‘연꽃’이라는 비유는 절묘하다.

다만, 차분히 짚어볼 필요는 있다. 과연 대한민국의 촛불은‘민주주의 모범’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은가. 그래서 유럽과 미국이 배워야 할 새로운 모델인가. 유감이지만 나는 그 물음에 선뜻 긍정할 수 없다. 한밤을 밝힌 수백만 촛불의 아름다움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 의미를 낮춰볼 뜻도 전혀 없다. 하지만 촛불을 든 민중의 열정과 별개로 그 열정의 제도화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한국 민중의 역동성이 처음은 아니기에 더 그렇다. 1960년 4월에서, 1980년 5월로, 1987년 6월로 줄기차게 민중운동이 벌어졌지만, 제도로서 한국 민주주의 수준은 얼마나 열악한가.
촛불을‘민주주의 모범’으로 칭찬한 독일과 당장 견줘보아도 더없이 초라하다. 독일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보수당 정권이 10년 넘게 장기집권하고 있지만, 사회경제 제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선다. 이를테면, 독일 민주주의는‘노사공동결정제도’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어느 기업이 극우 성향의 경영자를 임원으로 승진시키려고 하자 노동자들이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그게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가. 독일의 한 은행에서는 정원사가 이사로 선출되었다. 노동조합 추천이다. 시중은행의 이사 가운데 그 은행의 정원사가 있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한국의 어느 기업에서 경영진이 선임한 극우 이사를 노동자들이 반대하거나 정원사를 이사로 보낸다면, 신문과 방송이 벌떼처럼 일어날 터다. 한국 경제를 망칠 셈이냐고 도끼눈 부라릴 게 분명하다.‘ 경영 참여’ 라는 말만 꺼내도 아예‘좌파’로 몰아치는 나라가 이나라 민주주의 수준이다.

노동자들이 극우이사 선임을 무산시키거나 은행 이사에 정원사가 들어가는 일은 독일에서 예외적 현상이아니다. 독일은 보수당이 집권해도‘사회적 시장경제’를 뒤집지 못할 만큼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를 법제화했다. 구성원 1,000명 넘는 기업은 반드시‘직장평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직장평의회는 일터의 규칙을 만드는 데 관여하고 임원 선출에 협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2,000명 이상의 대기업은 설비투자를 비롯한 경영 전략의 결정권과 경영이사회의 임원 결정권을 갖는‘감독이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감독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자 대표가 맡는다. 경영이사회의 노무이사를 노동조합에서 직접 임명하는 사례도 많다.

한때 메르켈 총리가 집권하면서‘노사공동결정제도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노조의 경영 참여 범위를 축소하려고 나섰지만, 그 제도가 생산성에 악영향을 끼치기보다는 노사 갈등을 줄임으로써 생산성을 높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법 개정 움직임을 백지화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가 휘청거릴 때 독일 경제가 가장 튼실하게 굴러갈 수 있었던 동력은 노사공동결정제도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독일의‘히든 챔피언’으로 불리는‘ 강소기업 ’들, 자동차와 화학 산업에서 유럽을 이끄는 독일 경제의 경쟁력은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제도에서 찾을 수있다.
하지만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낯설다. 여론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물론, 숱한 채널의 방송사들이 보도하지 않거나 상세히 알려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세계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도 한국과는 사뭇 다른 면모가 있다. 미국의 세계적부호 워런 버핏은 정치 지도자들이 고통분담을 요구하면서도 자신과 부자들을 늘 제외해주었다며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라고 요구했다. 그는 과거 조지 부시 정부가‘부자 감세’를 추진할 때도 반대했다.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걷자는 버핏의 주장에 미국 사회구성원들의 95퍼센트가 찬성했고, 대선 과정에서 부자 증세를 공약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환영했다. 실제로 미국의 자본이득세율은 높아졌다.

그와 달리 한국 기업인들과 부자들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천박한가는 나라 안팎에서 화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에 한국의 대기업 회장 2세들이 노동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행태가 크게 부각되어 실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국 기업인들은 전혀 성찰이 없다. 무릇 민주주의는 절차적 측면과 실질적 측면이 있다. 선거제도는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민주주의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댓글 공작’이 드러났고, 아직 그 실체가 다 밝혀지지 않았기에 절차적 수준조차 후퇴했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고갱이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열악한 삶으로 나타난다.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통계가 단적으로 입증해준다.
기실 붓다가 가르친 대로 세상을‘있는 그대로’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자연스레 유마거사가 떠오를 만큼 크게 병들어 있다. 여기서 적잖은 사람들이 병들었다는 말을‘은유’로 생각하지만 아니다. 한국 사회가 크게 병들어 있다는 진단은 은유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다. 가령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 뉴욕타임스가 한국인 대다수를 정신병에 걸리기 직전이라고 보도한 것은 이미 5년 전이다.“ 직장에서의 혹사, 상시적 불안, 과도한 스트레스가 일반적인 한국에서 학생들은 어느때보다 학업 압박이 높아지고 직장인들은 퇴근 후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셔야 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미국 언론이 본 대한민국은 모든 사람이 경쟁에 내몰리는‘정신병동’이다.

그렇다. 촛불은 진흙 속에서 아직 연꽃을 피워내지 못했다. 가능성을 열었을 따름이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물론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후퇴했고, 전 국민이 삶의 불안감을 겪고 있는‘진흙탕 경쟁체제’에서 연꽃을 피우려면, 누군가는 그 길을 선도해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그 길을 열어가는 풍부한 사상이 담겨 있다. 한국 민주주의가‘연꽃’을 피워내는 길은 ‘탐진치의 세계’를 벗어나는 길과 이어져 있다. 그럼에도 적잖은 한국인들이,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불교와‘글로벌 시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단한다. 실제로 통계청이 2016년 12월 발표한‘종교 인구’조사에서 개신교가 불자인구를 처음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별 인구비율은 개신교 19.7%, 불교 15.5%, 가톨릭 7.9%로, 개신교는 123만 명(1.5%p)이 증가한 반면, 불교는 296만 명(7.3%p)이나 줄어들었다.
종단 차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아니 넘겨서는 안 되는 현상이다. 탐·진·치로 찌든 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데 가장 적합한 종교가 오히려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사부대중 모두에게 매서운 죽비다. 불교의 현대적 담론을 구체적 정책 수준으로 만들어낼‘싱크탱크’가 절실한 이유가 여기 있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조계종은 종립대학과 종단 직속의 연구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종립대학과 종단 싱크탱크들 사이에 유기적 결합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비전과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려면, 종단 지도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종단 차원의 의지가 모아지지 않는다면, 유력한 사찰이 연구원을 세워 그 역할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불교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불교의 현대적 담론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그것을 스님들의 법회자료, 대학생들의 교양과목, 정치인들의 입법 자료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촛불은‘연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