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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의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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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정영주 2017년 01월 419호
삶의 지붕들이 맞닿은 그 길목에는
골짜기에서 의기로움이 흐르고 있는 의곡사가 있다

영지影池,
또다른 해인사를 찾아서

며칠 차갑더니 햇살이 비집고 들어온 모양이다. 해인사가 이리 따뜻하니 진주는 오죽할까. 의곡사로 향하는 길 일주문에 있는 영지가 배웅하는 듯하다. 다행이다, 무언가를 찾기 위한 첫 발걸음에 따뜻한 마중이 느껴져 힘이 실린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출가한 일곱 왕자와 가야산 칠불봉의 전설에 간절한 그리움이 깃든 영지를 뒤로하고, 해인사의 새로운 영지를 찾아 떠나 보기로 한다.

두려움과 의기로움 사이에서

두려움은 언제나 내 안의 막강한 그림자다. 그것을 삼켜버린 자는 외면과 방관, 침묵의 가면을 쓴다. 그러나 내 안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까지 가릴 방법은 없다. 게다가 보이지도 않는 마음에 짙은 무게감도 실린다.
두려움만큼 막강한 것이 또 있다. 솔직함이다. 솔직함으로 마음에 다가가는 것. 그것은 수행의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웃음 진 눈가의 굵은 주름이, 구멍 난 양말이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아는것. 한층 더 자연스러움의 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맛 중의 맛은 담박한 맛(大味必淡)인 것처럼. 수행하는 자에게 가식과 위선, 의롭지 못한 것은 삼켜지지 않는다.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을 등진맛, 가시 돋친 맛은 결국 토해내고 만다. 삼킬 수 없고 굴하지 않는 것은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의 의미와 한 맥이다.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두려움을 딛고서, 두려움을 토해내며 지킬 수 있는 것은 의기로움이다. 그것을 품은 자는 스스로 태우며 빛나는 촛불이 될 수 있다. 성스러운 빛이다. 굴곡진 역사의 길목에서 숱한 의기로운 분노들을 만나왔다. 해인사도 그러하다. 수행자이기에 의분義憤으로 물든 누더기 장삼을 입는 것은 더욱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해인사 말사인 진주 의곡사에도 의분의 역사 한 켠을 보았다.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솔직함으로 의기로움으로 성스러움으로 빛났을 진주 의곡사로 간다.

진주를 찾아, 의곡사에 가다

어느덧 진주 시내에 들어섰다. 햇살에 남강이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고 강을 따라 걷는 아이들의 웃
음도 반짝였다. 그러나 진주도 남쪽이었기에 임진왜란의 고통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고, 6·25전란
에는 남하하는 이주민으로 북적이며 삶의 굴곡이 너울거렸을 것이다.
의곡사로 향하는 길목 풍경은 근대 진주역사의 한 면을 담은 듯했다. 고단한 삶의 지붕들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맞닿아 있었고, 골목골목에서는 내 이웃들의 울음과 웃음소리가 흘러와 만났을 것
이다. 삶이 이리도 진득할까 싶은 길, 그 끝에‘비봉산의곡사’편액이 반짝이고 있었다.
비봉산 골짜기에 자리 잡은 의곡사는 665년 신라 문무왕 5년에 혜통惠通조사가 창건했다. 오랜 시
간처럼 의곡사도 중창하며 월명사, 숭의사, 근정사라는 여러 이름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의곡사는
임진왜란 중에 연유했다. 왜군에게 진주성이 함락되고 패망감을 안고서 끝까지 이곳에서 의승병과 관민들이 왜병과 맞서 싸웠다고‘의로운 골짜기에 있는 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나지막한 비봉산 골짜기로 시커멓게 몰려드는 왜병들을 상상하니 두려움에 맞선 그분들이 한없이 성스럽게 느껴졌다. 높은 성벽도, 잘 갖춘 무기도, 훈련된 군인도 아니었을 텐데. 성스러움은 어디서 왔을까.
의곡사 곳곳을 들여다본다.

‘비봉산의곡사’편액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오세창(1864~1953)의 의기로움이, 대흥루大興樓서체에는 성파 하동주의 굳건한 기운이, 현존하는 다섯 개의 한글 비석 중 하나라는 의곡사의 비석에는“부모생천목연경”자식의 애틋한 효심이 엿보였다. 이어 대흥루의 의곡사자비범종의 독특한 문양도 범상치 않다. 타종하는 부분에 동남아시아의 지도가 조각되어 있다. 아마도 근대 제작된 종이라 조명 받지 못한 듯했지만 그 의미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타종소리는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퍼질 테니 말이다. 상상만으로도 따뜻한 일이다. 6·25전란에는 문학과 예술 문화도 함께 궁핍에 밀려 갈 때, 당시 주지였던 청남 오제봉(1908~1991)은 문인과 예술가들을 의곡사로 거둔다. 묵객들로 북적이며 여울목의 역할을 다했던 의곡사가 있었기에 오늘 진주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묵객들의 의표義表는 한글 비석 옆 묵죽비로 세워진다.
오제봉 스님 덕분에 탄생한 문화재가 있다. 근대 등록문화재 624호로 지정된 의곡사 괘불도다. 괘불도를 그린 화가 정종여는 거창 출신으로 절집과 인연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재능을 눈여겨 본 해인사 스님의 지원으로 일본유학을 떠나고 돌아와서는 1938년 24살에 스님의 지원으로 괘불도를 그린
다. 지금도 스님이나 전통을 전수받은 장인에게서 괘불도가 그려지고 있는데 당시 화가 정종여의 붓끝에서 파격적인 괘불도가 탄생된다. 어느 교수는 독존상獨尊像만으로 조성한 화면 구성에서 과감하고 파격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매년‘부처님 오신 날’이면 의곡사에서 괘불도를 만날 수 있다. 화가 정종여의 손자 정단일 씨는 할아버지의 유작을 만나러 의곡사를 찾곤 한다고 했다. 그간‘월북 화가’라는 사연에 숨어 있었으나 지금은 온전히 화가 정종여의 괘불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지 법연 스님이다. 1987년 민주주의 염원의 간절함이 절정에 치닫고 종교가
나라를걱정하던시절, 외압에도두려움에도거침없이의기로움을해인지에담으셨던분.‘ 해인지스러운’이라는 해인지의 색깔을 만드는데 한몫 하셨던 분. 해인지의 스님 글을 들춰보며 아직도 감동받고 있는 독자이자 필자에겐 까마득한 전설의 고수 같은 분. 법연 스님과 진주 의곡사는 마치한 결처럼 닮아 있었다.

의곡사의 낮은 담장 너머로

의곡사의 담장은 이웃집과 맞닿아 있다. 눅진해진 삶들이 기댈 수 있게 낮았다. 아니나 다를까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절의 담장에 동네 할머니들이 굽은 허리를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할머니들의 일상 속에서 의곡사는 여느 이웃집이었나 보다. 굳이 경건함을 갖추지 않더라도 할머니들의 어깨에 내려앉은 토요일 오후 푸근한 햇살이 성스러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점점 믿을 수 없게 된 지금. 의기롭고 솔직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원칙주의자에게 점점 고리타분하다는 눈총을 보내는 지금. 정신을 외치는 목소리에 점점 귀를 닫아가는 지금. 진실함과 솔직함에서 멀어지고 둔감해지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의기로움 한 조각내 삶에서 반짝이지 못한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의곡사에 가면 대나무가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에서, 대웅전 처마의 풍경소리에서, 대웅전 앞 탑의 길어진 그림자에서, 비봉산 골짜기에서의기로움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