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대한 염려를 늘 지울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다 보면 실력이 늘 것이라고 위로하지만, 결코 해인지가 나의 연습장처럼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첫 회는 해인사를 촬영하였다. 일주일 동안 수천 장을 찍고, 다시 선별에 몇 날 며칠 매달리던 시절을 돌이켜보니 지금도 아찔하다. 처음에는 한 회 연재를 위해 2~3회씩 사진촬영에 나서기도 했다. 수백 장의 사진속에서 3장을 골라내야 하는 선별 작업은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더욱더 나 자신을 짓누르며 힘들게 한 것은 해인지의 명성에 행여 누累가 되지 않을까하는 심리적 부담이었다. 부족한 기술을 조금이라도 보완해주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거금을 들여 좋은 카메라의 능력에 의존해 보기도 하였으나 무겁게 짓누르는 정신적 부담을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었다. 나의 이런 심정을 해인사 부처님이 아셨을까? 천재일우의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당시 한국에서 손꼽히던 유명 사진작가가 해인사 경내에 머물면서 해인사의 사계 촬영을 했다. 나는 그 현장에서 직접 사진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사진에 겨우 한발 들여놓았나 하고 나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행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선원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유럽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유럽이야기를 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없이 사의를 표해도 편집장님은 꿈적도 않으신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취재를 위해 무심히 찾은 산사가 대자암 무문관 선원이었다. 그런데 그곳 선원장스님을 통해 내가 얻은 큰 용기가 새로운 도전을 위한 굳건한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해인사에서 취재를 오셨으니, 무엇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할 것 같았어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도량 안내를 직접 하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선원장스님이 곁에 다가온 신도 회장에게 이렇게 나를 소개하시는 순간, 나는 번쩍하고 번개 치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대자암에 간 것은‘내’가 아니라 ‘해인사’였다.‘ 내가 뭐라고?’연락도 없이 방문한 나그네에게 이토록 큰 정성을 쏟아주실까 하는 의아함의 고리가 풀린 듯했다. 깊은 배려에 담겨 있는 시선의 차이는 상상도 못했다.‘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잘 하든 못하든 그것 역시‘해인사’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더 나아가‘나’와‘해인사’이 아니라 온 우주법계가 연기적 인연으로 상의상존相依相存한다는 생각에 미치니 나의 경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듯했다. 그렇게 나를 내려놓으니 누르고있던 갈등과 부담감 모두 훌훌 털어버린 듯 사라졌다. 대자암 마당에 모두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돌아와 해인사 대적광전 부처님 앞에 두 손모으고 다짐했다.
해인지 기자로서
- 부처님 전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해인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겠습니다.
나와의 약속에 해인사 비로자나 부처님이 증인이 되어주셨다.
선원 취재 처음에는 굳이 특별한 취지나 계획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라성 같은 사진작가로부터 전향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적 같은 일들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단순한 사찰 소개로부터 차츰차츰 빗나가듯 방향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불교 수행가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선원은 겹겹의 담이 쳐진 궁중의 황제를 알현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한국 불교의 성지이다. 그와 같은 선원을 집중 취재를 통해 장기간 연재한 경우는 해인지를 제외하고 어느 매체에서도 없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선원은 1차적으로 선원장스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또 정진대중의 동의를 얻어야 취재가 가능하다. 어려운 섭외 과정을 거치고 실제 촬영을 위해 날짜와 시간을 조율하여 선원 마당에 들어서지만 선방 문턱을 넘어선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선기를 뿜어내는 참선수행공간은 개미 발자국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하고 진지하다. 모든 것이 멈추어진 공간,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변해버린다. 숨소리 한 점도 부담스러운 침묵 속에 발을 옮기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야 한다. 총성 같은 셔터음에 나 자신이 놀라 도망치듯 선방을 나서면 온몸의 긴장이 그제서야 녹아내린다.
스스로 바깥세상으로의 문을 걸어 잠근 스님들의 수행공간을 세간으로 이끌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매체의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는데 해인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굳게 닫힌 선방 문은 여간해서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해인지만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해제 철이기에 텅 빈 선방을 촬영하려고 하자 오히려“그래도 해인지인데.”하시며 스스로 모델이 되어주시던 스님들, 삭발일이어서 정진이 없음에도 지대방의 스님들을 불러모아 좌선 모습을 연출해 주시던 스님들, 이것만으로도 해인지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권위를가늠할 수 있다.
취재 일정 변경으로 미처 대중스님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 선방촬영이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시던 혜국스님은 “해인지인데 어떡하지요? 이걸 어떻게 하지?”하시며 기자보다 더한 걱정으로 안타까워하셨다. 주위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방 안쪽에서 큰 자물통을 채운 후에야, 서고의 자물쇠를 열어젖힌 명정 스님은 경봉 선사의 진귀한 유품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을 놓치지 않으셨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끝내고 선원 곳곳을 다니며 자상하게 설명을 곁들여 주시던 고산 스님은 선방 촬영에 직접 참여하시면서 하루 종일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협조와 사랑을 주신 많은 스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해인지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공간과 시간들이었다. 오직, 월간해인이기에 가능한 선원취재였다.
화두에 목숨을 걸고 정진 중인 스님들의 수행 모습을 세간에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번뇌와 좌절 속에서도 희망과 의지를 잃지 않고 깨달음을 향해 결연하게 백척간두에 선 수행자의 모습, 숱한 갈등과 고뇌에도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독려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등진 문밖 세상에 자신의 공부 살림살이를 꺼내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뼈를 깎는 수행을 통해서도들어서기 쉽지 않은 깨침의 세계는 한두 장의 사진과 몇 줄의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닐진대, 어이없는 욕심을 내어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동안의 선원 취재를 돌아보면서 참 많이도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선뜻 불자라고 나설 자신조차도 없는데 어떻게 스님들의 수행을 이해하고 전달한다고 했을까? 하지만 내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항상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만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선원이라는 특수한 수행공간을 어려운 취재 여건 속에서도 온 힘을 다할수 있게 한 것은 단 하나, 해인사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던 같다. 6년 전 나와의 약속에 증인이 되어주셨던비로자나 부처님 앞에 다시 섰다. 그 미소가 오늘은 더욱 아름다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