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 날 여러 혜택은 고사하고 오시는 귀농자를 부락 어른들이 면접을 보고 뽑는다는 귀농처가 있다 해서 귀가 번쩍 뜨였답니다. 어떤 곳이길래! 이 분은 당장 전남 구례에 있는 그 작은 마을로 갔답니다.
여행자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정착할 만한 곳인지 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마을 사람들과 대화도 하면서‘아! 이곳은 교통도 편하면서 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이 너무 좋아서 면접을 보고 뽑을 만큼 신청자가 많은 것이구나.’하고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바로 귀농지원서에 자신의 의사를 적어 신청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오면서 대체 촌사람들이 면접을 본다는데 무슨 질문을 할까 매우 궁금했지만 합격에는 자신이 넘쳤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회사를 그만둔 후 자신의 경영 경험을 살려 취업 컨설팅 업무나 강연을 하고 있었기에 어떤 면접이든지 자신만만이었답니다. 면접날 동네 이장과 어르신 몇 분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살아온 스토리와 귀농 목적을 주욱 말하니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박수를 치고 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은 잘 살아오셨고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요? 다시 말하면, 동네 꼬마들과 잘 놀아 줄 수 있는지, 아니면 동네 어르신들과 말벗이 되어 줄 수 있는지요?”
“그건 조금 어렵겠는데요.”
“그러면 논일 하기, 밭 갈기, 톱질, 낫질, 삽질, 괭이질, 풀 매기, 잔디 깎기, 못 박기, 그리고 사물놀이는요? ”
“NO! NO! NO! …, 아니, 그런 것은 돈이면 대신할 수 있는 거잖아요? ”
결국 이분은 보기 좋게 떨어졌답니다. 동네 어른들이 말씀하신 탈락의 변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참 잘 살아왔고 돈도 있고 훌륭한 분이지만 지금 당장 여기 우리 마을공동체에서는 도움(쓰임)이 될 수 없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자신에게 말은 안 했지만‘당신은 여기서 오직 누리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동네 사 람들 사이에 위화감만 조성할 뿐 우리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하나도 없는 무임 승차객! ’이라는 눈빛이 역력했답니다.
한마디로 말해 당신은 다른 곳은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서는‘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그 일로 인해‘현실과 사람의 쓰임’에 대해서 다시 자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날 화려한 이력이나 업적도 환경이 바뀐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숨 쉬며 발 딛고 사는 일상의 현실에서‘쓰임’이 없으면 아! 옛날의 추억이 될 뿐, 소통에 방해가 되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지 못 합니다.
사실‘쓰임’이라는 것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 그리고 역할과 책임을 그 바탕으로 하기에 생물의 진화나 문명 발전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 수요와 공급도 현실적‘쓰임’에서 비롯합니다. 일상과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쓰임’의 보편적 필요성은 확실해집니다. 다만‘쓰임’이 눈앞의 각박한 현실만 중요시하는 듯하고, 정신과 영혼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쓰임’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체적 자각 없는 쓰임은 자신의 삶이 어딘가에 소모품 내지 부속물이 되어 인간존엄과 인간성이 상실된 허수아비 인생 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임제 선사의‘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는 게송처럼 어떤 곳, 어떤 일에 처하든 주인 된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쓰임을 찾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노동이라기보다는 헌신이 되고 보살행이 되어 사바에 살면서 정토행을 누리는 깨달은 삶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스님들도 지난날 대장부 열정으로 발심 출가하였지만 어느 한때의 수행과 이루어낸 불사 등 추억에만 매달려 지금 이 자리에서 무명업장 속 중생을 향한‘쓰임’ 이라는 자각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이라면 지금 이 자리는 가출인 신세가 일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깨어 있는 주체적‘쓰임’은 중생을 향한 원력이며, 헌신이며, 바로 대승의 보살행이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어집니다.
지난날 80년대 초 해인지의 첫 출발은 해인사 강원의 젊은 스님들에 의한‘ 배우면서 가르치고, 가르치며 배운다.’는 단순하지만 불교의 근본 목적과 대승불교의 보살행을 그대로 함축하는 시작이었기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또한 해인지는 80년대 중반 암울했던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승가개혁이라는 큰 담론을 올곧게 담아내는 행보를 보여 주었기에‘민중과 함께하는 해인지’,‘ 깨달음을 사회화하는 해인지’라는 대단한 상징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보루’라는 이미지를 형성해 내는 데도 해인지가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신장된 개인소득 3만불 시대! 종교에 대한 관심은 적고 출가인과 신도들의 신심은 줄고, 사회나 승가나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자본만능의 시대! 승가의 개혁 속도보다 민중이 먼저 깨어 재가자가 승가를 가르치고 혼쭐내는 시대! 불교계의 정론지이자 한국불교의 중심인 해인사 사보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해인지!
이제 해인지가 우리 불교와 승가공동체 그리고 사회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품어야 할 화두와 던져야 할 담론은 무엇일까요?
해인사는 법보종찰. 팔만대장경 법보전에 가서 주련을 살펴보니‘우리 모두 안과 밖이 행복하고 지극히 좋은 세상 만들기는, 지금 바로 우리가 선 자리인 현실을 직시해서 삶을 껴안고 죽음을 껴안아라.’하네 요. 나는 이 말을 세월 앞에 장사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주체적이고 자발적인‘쓰임’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예전의 화려한 스토리나 전설적인 업적보다 지금 이자리에서 함께 하고자 하는‘쓰임에 대한 마인드가 없으면 촌로들 앞에서‘당신은 귀한 분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탈락하였듯이 해인지도 이 시대 환경에서 한국 불교와 해인사 그리고 독자들에게 어떤 역할과 책임으로 다가갈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다른 이들에게‘쓰임’ 에 대한 선택지를 받는 입장보다 편집과 경영에 있어 주체적인‘쓰임’을 자각하는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