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거지는 불신
대통령 후보로서 김영삼씨가 불교계에 약속한 공약 가운데 이미 무효화된 것이 상당하다. 불교방송의 지방망 확충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미 부산과 광주가 개국했고 올해는 청주 지역에서 방송을 통한 포교를 실현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것도 불교계가 종교간의 형평성, 공약사항의 완전한 이행을 꾸준하게 요구했기에 가능했지 그냥 덤덤하게 있었다면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방송의 문제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다른 공약 가운데 아예 백지화됐거나 또는 정반대로 추진되어 교계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를테면 사찰의
토지에 부과되는 종합토지세의 문제는 전면 백지화됐고, 고속철도의 경주 통과 문제는 약속과는 달리 \'부처님의 땅, 경주\'를 그냥 가로지른 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았거나 말거나, 또 그 노선이 경제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감사원의 지적이 있었거나 말거나 또 국가의 문화재관리에 관한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전문위원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경주 통과를 고집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의 공약 이행을 우습게 알고 있어서 그런지 김영삼 각료들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집무 시간에, 그것도 공공시설물에서 예배를 보는 사례는 그 이전 정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두룩하다. 황산성씨가 환경부장관을 맡자마자 말썽을 일으켰고, 국방부장관이 \'신앙전력화를 위한 세례식을 장려\' 하라는 훈시 사항을 배포하는가 하면, 경남지사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예배를 충실히 보았다.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거듭 계속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번번이 불교계를 비롯하여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거센 항의가 있는데도 고쳐지는 기색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1월 21일 대통령이 국방부 내 국군 종교 센터를 방문 중앙교회에서 예배를 봤다. 그날 저녁의 방송 새속식 시간에 방영된 화면을 보면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충실한 신자로서의 면면을 보게 된다. 예배당 가득 모인 신자들이 찬송가 책을 펼쳐들고 찬송가를 부르는 대중 사이의 한가운데 자리하며 열심히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을 기리는 모습을 보는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들의 가슴에 어떤 회한이 서렸을까.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 모신다는 김광일 비서관은 대통령의 바로 뒤에 서있었다. 참으로 이 나라에 국교가 있지 않고서야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봉책은 이제 그만
이번 \'사건\'은 그 동안 대통령이 장담했던 \'남의 종교도 존중\' 한다는 말이 완전한 허구였음을 극렬하게 보여준다. 또 정부 정책이 결코 종교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게 하겠다는 공언도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어찌보면 그 동안 불교계의 거센 항의가 있을 때만 잠깐 보여주던 자숙의 태도도 거의 마지 못해 취한 표리부동이었음을 자백한 셈이다. 더욱이 현 정부에 국민적 지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개신교인들만을 위한 예배를 보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번 대통령의 중아교회 예배는 여러 가지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대통령이 개신교 신자와 편안히 예배를 볼 수 있도록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갖고자 한 법회와 미사를 방해하고 심지어 출입을 통제하는가 하면 개신교 신자의 참석을 위해 이들의 미리 예정된 당직을 임의로 조정하였다. 초법적인 조치가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저녁 뉴스 시간에 고스란히 방영되었으며 이미 사전에 보도 협조를 요청하였음이 드러났다.
당연하게도 대통령의 이런 행위는 교계와 국민 일반의 심한 반발을 불렀다. 교계 신행 단체의 항의 성명이 줄이었고, 중앙종회 중진의원 삼십여 명이 긴급회의를 소집, \"대통령의 의도된 기독교 선교 활동에 대해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해인사를 대표하는 각 기구의 항의 성명이 일간 신문 광고에 실렸고 일간 신문의 정치 비평 만화조차 대통령의 편향된 종교 활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사건의 파장은 예사롭지 않았다.
파장이 이렇게 커져만 가자 정부도 곧바로 사과의 태도를 표명했다. 문체부 장 차관, 청와대 민정수석 등이 총무원장에게 사과 전화를 했으며 국방부장관은 총무원을 찾아 사과의 뜻을 밝혔다. 뭐라든가, 경호상의 실수라든가 하면서.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 사과할 사안이 아니다. 미봉책으로 끝날 일도 아니다. 준동하는 개신교의 폐해에 익숙해진 교계의 아량으로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대통령의 종교 편향이 심하기 때문이다. 믿지도 않지만 그래도 몇 번에 걸쳐 \'남의 종교도 존중한다\'고 했지 않는가.
아니나 들까. 2월 21일 불교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빙하여 간담회를 갖는 자리에서 예의 그 상투적인 \'내 종교 남의 종교\'를 걸고 나왔다. 그러고는 덧붙여서 \'종교인들의 사회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힘써 달라\'는 당부도 했다는가. 끝내 사과의 말은 없었다고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는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모습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현 정부의 태도가 이쯤에까지 이르렀기에 차제에 단단히 빗장을 질러야 한다. 그의 공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하며 정부의 정책적 편향성에 대해 조직적인 항의가 있어야겠다. 최근 보도된 교육개혁안까지도 표함하여 이 정부의 모든 정책, 인사문제에서부터 일선 기관의 행정까지 철저한 분석과 대안을 마련하여 불교계 전체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치의 계절\'을 맞은 요즈음의 상황에서 교계의 일관된 치침이 내려져야 한다.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극적 태도로서는 교권의 확보는 난망하다. 이 점을 새삼 강조한다. 아울러 총무원 집행부의 각성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