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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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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대 - 성안 1996년 03월 169호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사시 공양을 마치고 잠시 지대방에서 쉬고 있는데, 정수당에서 참회진언이 계속 들려 오고 있었다. 오늘 따라 왠지 참회진언 소리에 가슴이 뭉클하며 어느 덧 생각은 출가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해는 오십 년만의 심한 집중호우로 인해 우리 나라 곳곳이 홍수가 나서 고생을 하던 때였다. 그러한 세상고苦를 직시하며 서울을 출발하여 해인사로 내려오게 되었다. 해인사에 도착하니 저녁 일곱시쯤 되었는데 장마철이라 그런지 밖은 무척 어두웠다. 행자실 맞은 편에 있는 속복실에서 정식 행자가 되는 절차로써 대기하는 동안 보경당에서 처음으로 참회를 하였다. 절을 하면서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좌복과 옷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점심 공양 뒤 다시 참회를 하는데,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목이 몹시 타서 법당 향로 옆에 있는 성냥개비와 촛농이 떠다니는 다기茶器의 물을 행여나 누가 볼까 숨을 죽여 가며 몰래 마시곤 했다. 문득, 원효 스님의 \"일체유심초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쳐가고 이 때처럼 이 구절이 피부 깊숙이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정성 들여 일배 일배를 하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어놓은 업장을 참회하였다. 며칠 뒤 후원의 큰방에 배치가 되어서 바루공양에 들어갈 찬그릇을 준비하는 소임을 맡았다. 행자들은 모두 삭발을 하고 괴색의 행자복을 입고 있는데, 아직도 속복 차림에 장발인 내 모습이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워 보였다. 이렇게 속복 생활이 어느 덧 일 주일이 되는 날, 별좌 스님과 행자 반장 주재 아래 기다리던 삭발을 하게 되었다. \"삭발이 있겠습니다\"라는 별좌 스님의 선창에 맞추어 상행자들이 참회진언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를 장중하게 복창하였다. 어떤 행자는 머리카락이 면도칼에 사각사각 밀려 나갈 때, 서운함과 기쁨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삭발 의식 내내 나는 그런 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무명의 번뇌초가 없어지니 홀가분한 심정이 솟아났다. 이제는 출가자로서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겠다는 결심을 다짐하였다. 내 인생에서 코페니쿠스적인 전환을 하게 된 것은, 지금 은사 스님을 뵌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 뒤로 자주 법회에 참석하다 보니 정신 내적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사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가톨릭 신문을 구독하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국민학교 때에는 신부님이 미사 집전하는 것을 도와주는 \"복사\"라는 소임을 맡아 평일에도 일 주일에 두세 번씩 미사에 참석했다. 내가 성당에 열심히 다니자 어머니는 공부 잘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다. 아무런 생각이나 의심 없이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나에게 루소의 말처럼 \"제2의 탄생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삶과 종교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이 생겼으나, 소극적인 나는 이 문제를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 보지 못하고, 고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여 불교 서적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중, 고등학교 시절에 궁금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주위에 있는 교수님이나 신부님들에게 상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목이 타는 나에게 충분히 갈증을 풀어 줄 만한 대답 대신에 \"종교는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문제이다\"라고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서에 대한 의심이 난다\"고 질책하고는 성경에 쓰여진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믿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마음의 지주이며, 서로의 공통된 의식을 연결하는 공감대 역할을 하며,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 믿음은 서로의 공존 관계와 이해 관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연결 고리며, 의견이 일치되고 약속이 지켜지고 이행되었을 때 비로소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리라 생각된다. 이 믿음의 본체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은, 경전이나 성경을 통하여 객관적이어야 하고, 보편적, 과학적, 철학적으로 풀어 밝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종교나 신앙을 어떻게 과학이나 철학으로 해명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물론 고차적인 종교 이론이나 신앙적인 양태가 현대 과학이나 철학적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 있으므로, 먼저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해결하려는 면이 없지 않다. 비록 그 속의 초과학적인 내용은 풀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밝혀진 일들이 허위이거나 현실과 괴리된 논리일 때는, 초과학적이라고 하는 자체가 거짓이 아닐까. 보기를 들면 인생의 과정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도정으로 쓴 것이 경전이나 성경이라고 한다면, 초월자는 이미 목적지에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적인 수준으로 현재의 과학이나 철학이 대전쯤 왔다고 가정할 때,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여행일지나 지형 지물 등의 상황이 전부 허황된 것이었다면 대전에서 부산까지 가는 여정을 미사여구로 표현했더라도 허황된 거짓임에 틀림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전까지 상황이 너무도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 뒤의 이야기는 현대의 과학이나 지식으로 도저히 풀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이라도 거기에 열거된 상황 전개가 확실한 것일 때, 이를 믿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냥 모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라는 신부님 말씀에 언제나 \"왜\"라는 화두로 고민하다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친척집과 문화 유적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대전에 사는 사촌 누나 집에 가려고 서울역에서 차를 기다리던 중에, 은사 스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성당에 다니고 있었던 때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표를 구하고 대합실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회색 털모자를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스님이 내 눈에 들어왔다. 친근감이 들며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강한 충동이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많은 궁금증을 가진 채로 매주 일요일에 성당에 다니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에 대하여 우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몸에 두드러기가 날 만큼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자신감을 가지고 그 동안 삶을 살아오면서 가졌던 의문점들을 여쭈어보니, 스님은 아주 천천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침없이 답변해 주는 것이 아닌가. 봄에 눈이 녹듯 내 의심 덩어리들은 하나 둘씩 녹기 시작하여 기차는 어느 새 나의 목적지인 대전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스님과의 첫 만남을 가진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상도동 사자암에 자주 법문을 들으러 가는 것이 하나의 버릇처럼 되었다. 그 사이에 나는 가톨릭적인 사고에 점점 불교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됐으며 제대 뒤 복학하고 졸업한 뒤에도 늘 스님이 들려주던 좋은 얘기들이 화두처럼 따라다녔다. 그 중에서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고, 사람 중에 남자 몸 받기가 또한 힘들고, 사람 중에서 부처님법 만나기가 어렵고, 부처님법을 만나는 사람 중에 출가를 결심하기란 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다\"라는 말씀이 늘 내 머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차츰 나의 잠재 의식의 세계에 \"출가\"라는 화두의 영역이 시나브로 넓어져가게 되었다. 어느덧 이렇게 가야산 해인사 강원의 지대방에 또아리를 틀게 된 것이다. 지금도 정수당 행자실에서는 상행자가 오늘 삭발한 행자님에게 \"성불하십시오\", \"하심下心하십시오\", \"정진하십시오\"하는 말들이 장중하게 들려오고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나간 행자 시절의 삭발하던 내 모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