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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 있어서의 불교의 위치와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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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상 - 오경철 1988년 05월 75호
따뜻한 어느 봄날을 택해 산으로 들어갔음직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면하고 싶은지라 가끔 이렇게 산을 찾는다고.
만나고 헤어짐을 준비하고, 사랑하고 미워함을 계획하는 숱한 사연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 나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음을 본다. 나와 무관한 듯한 13대 총선이 그렇고 새마을 비리가 그러하며 노사분규라든가 언론자유화, 정치민주화 과정이 또한 그렇다. 그 숱한 단체나 협회에 들어 있지 못하면 사람 행세도 하지 못하는 풍토에 제각기 환멸에 찬 신념과 조소(嘲笑), 희망과 분노와 고통과 딜레머에 빠진 비극과 광기, 그리고 턱도 없는 권위의식과 집단 히스테리에 희생되는 진정한 지유인(自由人)들은 어떻게 할까?
바다 건너 섬나라 어느 절에 있는 눈가리고 귀막고 입막고 있는 세 마리 원숭이의 꼴을 더 이상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나의 머리 속을 맴돌고 있는 것들은 이밖에도 더 있다. 민중 혹은 민중문화 내지는 예술, 비틀려진 시(詩)와 곱은 산문, 이합집산하는 전환기의 가치관 문제, 그리고 환절기에 감기를 앓는 듯한 아픔, 예를들면 육친의 위암 수술, 소생 불가능의 문턱에서 건강을 되찾은 친우, 몇년째 소식없는 친구, 불운한 시대를 살고 있는 친구, 야욕에 몸을 태우는 친구, 이 모두가 폼생폼사(?) 연기(緣起)라!
눈씨 -쏘아보는 눈의 힘 -가 약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리며 젊은 불제자들과 대통령 선거 날 파계사에서 만난 정도령, 멀리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엽이, 훈이, 주영이, 그리고 나를 이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합장을 보낸다.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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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1,600여년이 지났다. 때로는 민중의 한과 세속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촉매로서, 때로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호국의 의지로서 불교는 한민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여왔다.
우리는 불교의 사상적 전통이 이 나라의 문화, 예술, 철학, 의식 구조 등 거의 모든 사회 현상 속에 뿌리깊은 나무처럼 깊게 박혀 왔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를 지향하면서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신뢰가 거의 맹신(盲信)에 가까운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과연 제 위치에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토인비가 경계했던 “일반인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종교 내부의 세속화 경향”은 예외없이 우리 불교에도 스며들지는 않았는지.
한 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이후 불교의 현대화를 외치고, 그것의 실현을 가능케 하려는 움직임은 점점 팽배해 가고 있다. 1913년에 발표된 이 「조선불교유신론」은 그동안 고질화되고 있던 불교계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일대 혁신을 가하자는 것으로, 그로부터 3/4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똑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 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삼국시대의 불교 수용기와 신라 불교를 음미하고, 고려로 이어지면서 호국불교로 안주한 것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일제침략기 이후 근래에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정치 권력과의 ‘거래’ 속성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당, 공화당의 집권 시절을 거쳐 80년대 초의’10. 27 대법난’, 87년 9월 7일의 ‘해인사 승려대회’까지의 모든 수난사를 알아두어야 한다.
한 용운 이후로 이어져 온 불교계의 내부적 갈등과 한국불교의 외부적 수난사를 검토해 볼 때에 우리는 한국 불교가 현대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저절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불교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도 자명해진다.

우리 사회에서의 불교의 의미와 위치
민주 •민족운동이라는 커다란 힘으로 종단을 정비하고 승려를 교육하며 민중 속에 뛰어들어 사회 구제 운동에 나서는 것-이것이 한국 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교가 이땅에 들어온 지가 오래 되었다거나 신도 수가 아직도 가장 많다는 사실만으로 민족운동에서 큰 몫을 하리라고 보장받지는 못한다. 불교계의 구체적인 움직임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를 예측하기보다 여기서는, 전체 민주•민족운동의 관점에서 참여를 통한 불교계의 위치와 역할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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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운동은 진정한 민족 자주에서든 통일의 달성 문제에서든 참다운 민주 변혁의 수행 문제에서든-숱한 어려움이 예견되는 바이니, 이 두 과제가 사실은 하나의 명제인대도 곧잘 두 개의 것으로 나타남으로써 더욱 큰 혼란과 장애를 낳고 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이 마당에 불교계의 역할 또한 훨씬 더 커져야 함은 물론이다.
직선제 개헌, 문민정권 등 민주화의 일차적 목표가 달성됨으로써 민족자주의 문제가 바야흐로 당면 과제로 다가왔다고할 때, ‘민족종교’로서의 불교가 예컨대 천주교나 개신교에 비해 좀더 넉넉한 위치에 놓일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외세와의 관계, 특히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관계가 문제되는 한 이제까지 민주화 운동에서 불교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온 가톨릭이나 개신교 쪽이 불
교계보다 심각한 고민을 안게 될 확률이 높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토착화, 민족화를 위한 뜻깊은 노력이 그쪽에서도 진행되어 왔으나 아직도 외래 종교의 면모를 아주 벗지는 못한 것이 그들의 실정이며, 상당한 정신적 예속성과 더러는 제도적, 재정적 의존조차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불교 종단의 비자주성은 주로 국내 정권에 대한 의존과 굴종에 기인한 것이었지, 포교자금이나 인원을 외국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정권 교체에 따른 일정한 정치적 민주화와 불교재산관리법의 철폐와 같은 최소한의 제도적 개선만 있어도 민족자주 운동에 훨씬 당당하게 이바지할 좋은 위치에 놓였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화 세력이 그때 가서 ‘외래종교’ 대 ‘민족종교’로 양분되리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마찬기지로 종교계 대 비종교계라는 식으로 간단히 나누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운동의 역사가 말해 주듯이 새로운 단계, 새로운 국면마다 그 주관적,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운동 세력의 분화는 있기 마련이며, 일차적인 민주화 목표의 달성에 대체로 만족하려는 사람들과 진정한 자주화의 쟁취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 차이가 지금보다 훨씬 첨예해질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갈등은 불교 내부에서도 있을 것이고 크리스트교는 크리스트교대로, 비종교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각기 내부적인 분화 과정을 겪을 것이다.
한 종교의 실세를 결정하는 것은 그 종교의 신도들이 얼마나 열렬하고 든든하며, 사회 안에서 얼마나 힘있는 위치에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음을 볼 때, 지금이야말로 불교의 위치를 높이기에 더 없이 좋을 때이다.
이로써 우리 불교계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충분히 노출되었다. 그러면 현대 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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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가지고 있는 이상이 아무리 높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이 시대성이나 현장성을 갖지 못할 때에는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이미 뼈저리게 느껴왔다.
고통받고 괴로와하는 대중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빛을 주지 못하는 종교는 이미 죽은 종교이다. 더우기 종교가 현학적인 담론이나 명상적인 강론만을 일삼게될 때에 그 종교는 더 이상 설 곳이 없게 된다. 아무리 고매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종교라도 그 가치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대중이 없다면, 그 시대에 살아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오늘의 우리 불교계가 구현해야 할 불교의 현장은 저 멀리 있는 서방정토가 아니라 바로 이 시대, 이곳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에 와서 불교계 일각에서 뒤늦게나마 조그만 자성의 소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자성의 소리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일이나, 어찌되었든 자신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자성의 소리는 내부적 욕구에 의한 필연적 요인도 있고, 외부적 충격에 의해 앞당겨지고 있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자성의 소리가 내부 구성원의 일치된 견해 위에서 점화되어야 계속적인 여파를 몰고 올 수 있을 것이나, 아직은 그렇게까지 되지 못하였다고 보기에 아쉬운 감이 있다. 다시 말해 문제성은 충분히 노출되었고 또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성숙되었으나 불교계 자신이 그러한 여건을 일반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앞으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요,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햇불을 높이 들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해 종단을 재정비하고 승려를 교육하고 민중 속에 뛰어들어 사회 구제에 나서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사상적인 뒷받침이 필요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상적인 뒷받침이 없이 어떻게 승려 교육이나 포교 현대화, 그리고 종단 문제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비록 기독교가 급변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거나 융합하여 사회 변혁에 일익을 담당한다고 자랑하지만, 사실 불교야말로 그 내부의 심오한 진리가 묵직한 추의 역할을 하여 이 나라와 사회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불교는 대중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는 첫째 불교가 본질적으로 지닌 대중성과 민중성을 꼽을 수 있고, 둘째는 삶의 언어, 인간적인 언어가 있음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대중언어가 경전이라는 치마폭에 계속 파묻혀 있다든가, 대개의 종교인들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개인화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주의 및 이기주의적 성향에 물들어 가거나 성(聖)과 속(俗) 사이에서 번민한다든지 한다면, 앞으로의 불교의 대중화는 결코 밝은 장래를 점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불교 내의 민주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당면 과제이며, 불교의 도약적 발전과 급박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승려, 평신도 할 것 없이 앞서가는 이들이 불교의 장래를 걸고 오늘의 위기 국면을 잘 극복해야 할 것이 다. 그래야만 참다운 불교 정신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노력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승려 교육과 불교학 진흥에 기여하고 있으며, 포교 근대화와 종단 정화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만족할 만한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야말로 실천적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며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다.
불교의 진리를 이 세상에 바로 펴나가는 것, 모든 승려들이 승려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것, 승려가 개인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중생의 해탈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것이 바로 오늘의 불교와 불자들이 할 일인 것이다. 이에 따라 승려들은 선각자로서의 위치와 교사로서의 위치를 지녀야 한다. 이어서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밝혀주는 등불로서의 역할을 하여야하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는 그것을 단호히 배격할 수 있는 정신적 칼의 역할을 하여야 할 줄로 믿는다.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여의치 않을때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기가 쉽다. 가난•질병•무지•태만•불결의 비버리지 5대 악(惡)이 단순히 개인의 잘못된 마음가짐을 그 원인으로 돌린다거나 사필귀정의 운명론에 사로잡혀 모든 것은 될 대로 되는 것이라고 체념해 버린다거나, 또는 “산은 신이요 물은 물이다”라든지 “한마음 돌리면 불속에서도 시원하다”라며 현세 초월의 명상적인 영탄만…을 되풀이하는 자세로 돌아선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익한 일이요, 거짓된 교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믿음이라든지 신념, 가치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종교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와 역사의 실재에 의해서 설명되어야만 한다.
날마다 일어나는 교통사고, 산업재해, 파산 해고, 비명횡사 등은 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각종 공해와 질병, 억울함, 스트레스 등을 두고 불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걸까?
불교는, 그 교리적인 이해와 더불어, 불교의 사회경제사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나아가서는, 봉건-식민-분단의 잘못된 역사로 점철되어 온 한국의 민족주의적 과제의 해결과 관련해서 통찰되어야 할 책무를 과연 갖고 있는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이 둘은 사람의 일생과 인간사회의 구조가 끊임없이 들고 나는 씨줄과 날줄의 연속선 위에서 결코 별개의 개체가 아니다.-한국의 철학, 사상, 종교, 나아가서는 정치, 경제, 문학, 예술 그리고 한국인의 퍼스낼리티와 생활 및 풍속의 역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상당한 부분에서 불교문화의 내용을 담고 있다. 불교는 그 종교성을 통한 진리의 체계로서 체현되고 있겠으나, 동시에 한국역사의 발전 단계의 맥을 짚고 나아가서는 한국사의 사회•경제사적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정신•문화사적 궤적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기층 문화와 불교의 접목, 계율불교-형식불교의 탈피와 중생제도의 실천으로서의 실천불교 운동 동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일련의 민중 불교 운동도 바로 현재의 한국사의 당면한 요청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종(縱)의 흐름인 역사와 횡(橫)의 확장인 사회, 이런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고 있고 인간의 의지로부터 객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종교의 존재 가치는 빛나게 된다. 붇다의 위대한 점은 인간을 지배하지만 인간으로부터 독립해서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생•로•병•사의 무상(無常)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런 자연변증법을 발견한 붇다의 위대성은 깊이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붙다가 그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 한계 상황 속에서 사회 발전의 합법칙성과 인간의 역사적 활동-노동, 생산활동을 포함한-에 대한 깨달음 위에서 역사변증법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는 것도 인식해야할 것이다.

경계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楞伽經)

붇다는 이렇듯 주관(정신)이 객관(물질) 세계의 변화에 따라 변화된다고 갈파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의 주장처럼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하며 사회의 물질적 관계의 변화에 따라 그 밖의 이데올로기적 관계도 변화한다”고 명확하게 규정짓지는 못했다. 이는 붇다가 살았던 시대적 환경의 탓이기도 하다.
사회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경제적 관계이며 그 토대는 생산 관계인데, 인간은 노동 및 생산 활동을 통해서 서로 집단적인 관계를 맺으며, 이 맺음의 관계가 바로 생산 관계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생산 관계의 변화에 따라 사상, 법률, 정치, 문화의 여러 형태의 성격이 규정된다. 따라서 생산의 실상이 사회의 실상이 되며 무엇이 생산되느냐보다 어떻게 생산되며 분배되느냐가 문제가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노동은 누가 소유하며, 도구나 기계와 같은 생산 도구와 씨앗이나 원자재 등은 누가 소유하며, 그 생산물은 또한 누가 전유(專有)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사회구조의 문제가 된다.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이 이런 사회구조 위에서 발생했거니와, 또한 그 구조의 기반에 봉사하는 상부 구조이기도 하다.
불교의 사상도 이런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고 또 토대의 변화에 적응하거나 반발하면서 발전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불교는 단순한 유물론이 아니며 관념론은 더욱 아니다. 불교는 오히려 인도사상의 관념론적, 유물론적 체계를 모두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그 모두를 극복하고 불교 특유의 변증법을 획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디와 함께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제 3세계의 대표적 지성의 한 사람인 네루는 그의 저서 「인도의 발견」에서 붇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붇다는 대중적인 종교, 미신, 의식(儀式), 속계에서 세력을 펼치려는 승려들의 정략을, 그리고 그것들과 밀착된 일체의 기득권을 공격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붇다는 또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견해, 기적, 계시 및 초자연적인 것을 숭상하는 것도 비난했다. 붇다는 논리와 이성과 경험에 호소했다. 붇다는 윤리를 강조했다. 붇다의 방법은 심리적인 분석, 즉 환상이 없는 심리학의 하나였다. 붇다의 전반적인 접근 방법은 형이상학적 공상과 공론의 곰팡내로 가득한 대기 속을 산으로부터 신선한 바람이 불어와서 그 깨끗한 공기를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붇다에 대한 네루의 이러한 관찰은 물론 종교적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인도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 종교인, 사회개혁자로서의 붇다의 면모를 그 자신의 처지에서 밝혀 보인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서 집필한 이 글은 인도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염원으로부터 인도의 철학사, 사회사상사, 나아가서는 정치 경제사의 위대성과 창의성을 규명해 보려는 열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루가 찾고자 했던 것은 카스트 제도에 의해 완고하게 짜여진 고대노예제 사회의 모순을 붇다가 어떻게 극복해 내고자 했느냐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적 공상과 공론의 곰팡내’로 가득찬 사회가 인도 고대 노예제 사회의 모습이었다면 ‘산으로부터 신선한 바람을 불어오게 해서 채우는’ 붇다의 불교야말로 가히 혁명적인 실천 종교이자 그러한 사상의 대계(大系)를 갖춘 종교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 곧 불교의 철학적 문제, 사회사상사적 문제, 정치경제사적 문제와 더불어 민족 자주 문제에 이르기까지의 현대사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의미에다 대입해 볼 때, 불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당당히 공헌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 대한 실천적 기여나 이론적 규명, 그 어느 변에서도 크리스트교의 사회 선교사업 수준에조차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고정화를 부정하는 불교는 민족통일에서 제3의 이념으로서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인데, 구원 대상으로서의 만인의 평등과, 구원의 주체로서의 부처와, 일체 중생의 평등을 설파한 교리와 함께 일정한 지식과 조직 그리고 조직생활의 기율을 갖춘 집단으로서의 불교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의 형태로서 승가를 제시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불•법•숭 삼보인데, 이 불•법•숭 삼보의 완전한 구현이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해 온 문제의 핵심이자 결론인 것이다.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불(佛), 이 불은 절망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그 절망 속으로 들어가 완전한 절망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준 바로 그 부처님이다. 불국토를 성취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서의 법(法), 이 법은 온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일생을 보낸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부터 열반하기 바로 전까지 설한 모든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집단으로서의 승(僧)에 귀의하는 것이 바로 불교운동의 출발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모순을 자각하는 논리는 비상하게 발달했지만,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세계의 모순을 포착하는 논리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이 점을 이용해 소위 인간 혁명을 부르짖는 종교 상인들은 단지 사람들의 마음가짐의 문제로 일체를 환원시켜 버린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조장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악의 온존을 기도하는 역할을 연출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선의(善意)를 지닌 불교인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의 공범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직자들의 위선이 어쨌다는 말인가? 그들의 위선이 불법의 신성함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불교 현대화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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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은 결코 구호에 있지 않다. 불교가 우리시대의 민중운동, 혁신운동에 떳떳이 참여하려면 내적인 구심력을 갖추어야 하고 전문적인 연구 인력을 양성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급한 일은 승려들 가운데 아직 일소되지 못한 천민의식과 종단 지도층의 어용귀족화 현상을 추방하는 일이다.
종단의 민주화, 승단의 현대화 문제들은 모두가 한국불교의 민중의식 쟁취에 불가결한 과업이다. 그러나 이 과업도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민중들이 벌이고 있는 생존과 인간적인 품위를 위한 싸움에 실천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서만 단순한 집안 단속 이상의 의미를 띠게 된다. 실제로는 집안 단속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불교 자체의 쇄신 여부는 우리 시대의 민족적 과제, 민주 변혁의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 원만한 해결은 수많은 승려와 신도 개개인의 각성과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또한 부처님이 설한 법 자체에 그럴만한 근거가 주어져 있지 않고서는 산발적인 성과로 끝나고 말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중생을 위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중생의 처지에 서서 불교를 이해해야 하며 실현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현대화는 그 방향이 먼저 오늘의 산업사회 속에서 불교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쪽에서 설정되어야 한다.
만해(萬海)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는 현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한역(漢譯) 경전의 우리말 번역, 법회 의식의 개선, 형식 윤리의 타파, 사찰 경영의 합리화와 도회 진출 등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토픽들은 결코 구호로써, 또는 선각지를 자처하는 치기로써만 이룰 수 없는 것이니, 엄밀한 학술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도 원전에 대한 해박한 견해, 비교 종교적인 안목, 불교의 역사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 그리고 굳건한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적 열정, 이러한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한 숙제들이다.
이것의 실현을 위하여는 한국의 불교 학계가 튼튼한 기반을 지녀야 하고 조계 종단의 조직과 운영이 더욱 원활해져야 한다. 6. 25 이후 조계종단은 포교•역경 •도제 양성을 종단의 3대 사업으로 공포하였다. 지금도 불교계는 이 3대 사업을 공약처럼 내걸고 있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하나 도실현되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마는데, 더 이상의 시행착오와 졸속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불교의 낙후는 민족의 미래를 응시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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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학계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는 연구 인력의 절대 부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 연구소의 연구 요원을 양성하는 방안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불교문화연구소, 신라문화연구소, 비파사상연구소 등 기존의 연구소 기능을 확대해서 젊은이들이 연구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나아가서 정각원, 역경원 같은 곳에는 카운셀러 및 역경사 들을 고정 배치하여 안정된 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연구인들이 전임 교원직에만 집착하는 풍토가 계속된다면, 연구 인력의 부족이라는 악순환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 외에도 지속적인 사업 계획에 동참하는 연구인들을 양성하는 방안도 강구해 볼 일이다. 예컨대, 불교사전 편찬이라든지 한국불교사 집필이라든지 불교학 자료 편찬이라든지 하는 프로젝트는 장기간의 연구와 계획을 필요로 하는 작업들이다. 이런 계획들을 10년, 20낸 혹은 그 이상으로 기획 •집행함으로써 전문 연구인력을 키우고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동국대학교에 부설된 연구기관외에 별도로 조직된 불교 관계 연구소는 한국불교연구원(이 기영), 한국전통불교연구원(김 지견), 불교사회문제연구소(한상범) 등이 있을 따름이다. 이 연구소들도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연구원의 양성에는 힘을 쓰지 못한 채 불교학 강좌, 불교학 도서 출판 등에만 신경을 쓰는 형편이다.
따라서 불교학 연구인구의 양적, 질적확대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불교진흥원을 통해 장기 대책을 수립하여 연구 인력을 양성하고 둘째로, 동국대학교의 고급 연구 인력을 각 연구소를 통해 양성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셋째로, 불교 도서 종합 유통 기구를 설립하여 일반 불교 인구를 흡수하고 넷째로, 사찰 직영의 연구 재단을 설립하여 스님들의 평생 연구 기관으로 키우며 다섯째로, 불사(佛事)의 개념을 사람 키우는 일로 전환시키는 풍토를 조성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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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새로운 연구 방향 모색을 위해서는 불교 관계학과의 신설과 교과과정의 개선, 한국불교에만 편중된 연구 풍토의 쇄신, 출판 문화의 질적향상이 요청된다.
불교계리는 조직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기본적인 선결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 선결조건이란 첫째가 이념적인 동질성의 확보이며, 둘째는 행정의 일원화이며, 세째는 불교인의 의식 개혁이다.
‘이념적 동질성의 확보’라는 것은, 혹은 수선(修禪)에, 혹은 염불과 간경(看經)에, 혹은 강단(講壇)과 법석(法席)에, 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종사하여 각기 놓여진 처지는 다르다 하더라도 이념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기의 처지에서 개성을 갖고 일을 수행하지만 궁극적으로 불법이 좀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꽃핍으로써 예토(穢土)를 정토(淨土)로 가꾸려는 원행(願行)이 있어야 되겠다는 뜻이다.
불교는 결코 불교인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불법을 모르는 자들에게로 그 가르침을 확산하려는 염원이 바로 불교인들이 지녀야 할 소명 의식인 것이다.
두 번째로 말한 ‘행정의 일원화’는 부여된 직분에 대하여 계통대로 움직여질 수 있는 일사불란한 행정 체계의 정립을 말한다. 책임을 전가시킨다거나 직무에 충실치 못한 여러 사례들의 간접적 원인은 행정의 난맥상이 빚은 불협화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각자의 임무와 업무에 뚜렷한 영역이 있어야 하고, 우리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총무원-25개 본사-재가 신행 단체들의 횡적인 상관 관계가 좀 더 세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총무원과 본사 사이의 마찰을 피하는 일인 데, 강력한 총무원 중심제를 밀고 나가든지 아니면 본사 중심제로 환원시키고 총무원을 단순한 연락 기구로 만들든지 행정의 효율적 운영이 시급한 과제라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한 ‘불교인의 의식개혁’은 자기 희생과 헌신적 봉사 정신의 자세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집스러운 ‘나’를 버릴 때 일심(-心)의 ‘나’가 얻어진다는 자각으로 끊임없는 자기헌신을 할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보살의 이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절망이 크면 클수록 바로 거기에서 희망이라는 반(反)이 나오므로 절망이 크면 클수록 희망도 큰 것이다. 번뇌를 보리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모순의 오물을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오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 보살의 서원이며 자세이다. 보살은 모순과 질곡 속에서 오히려 뚜렷하고 더욱 우뚝한 모습으로 나툰다. 이제 칼을 든 신장의 모습을 한 보살이 나타나야 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보살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불교인의 의식구조 속에 깊게 배어 있을 때 비로소 불교 현대화의 방향과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불교 현대화의 기본적 방향’ 설정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찰은 사회 교화의 중심지이자 시청각 포교의 현장이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책자나 시청각 교재를 통한 포교뿐 아니라, 유스 호스텔이나 전문 식당의 운영, 상설 불교전시관 등의 운영도 포함된다. 그리고 말사는 철저히 행정적으로 본사에 귀속되어야 하며, 본사 자체가 의욕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신도회의 재조직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을 대변하는 신도 조직으로서 전국신도회가 있다. 주로 불교 신도의 교육, 조직 강화, 불교방송국 등 불교인 숙원사업 추진 등에 매진하고 있지만 연구인의 양성에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밖의 중요한 불교 단체를 보면 법륜회, 불광회, 관음회, 달마회, 구도회, 불교청년회, 불교진흥원, 정각회, 서울불교청년회, 거사림, 석림회, 청소년교화연합회, 삼보법회, 기타 각 사암(寺庵) 신도회가 있는데, 이들은 각각 월간지 간행, 정기 강좌, 회지 발행과 교재 편찬, 봉사 활동과 순회 포교, 그리고 연수 과정과 연구비 보조를 통한 지원을 하고 있고 성지순례도 계획하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과 주요 사업은 불교 강좌와 사회 봉사 활동등으로 요약되는데, 조직의 난맥과 행정의 미비 등으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각신도 단체들의 횡적인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중복되는 사업을 피한다면 새로운 연구 풍토의 조성에 큰 힘이 될 것은 틀림없다.
현재 승려들을 위한 전문 교육 기관에는 각 사찰의 선원, 강원을 제외하고 승가대학이 있다. 승가대학은 반드시 인가된 정규 대학 과정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4년의 이수 과정은 2년의 예과를 거쳐 본과로 진급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교과 과정, 교육 방법 등에 관해서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과감하게 혁신되어야 한다. 불교의 백년대계는 이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는 자각과 헌신으로 불교계는 승가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힘을 쏟아야 하리라고 본다.
셋째로, 사회사업의 확대 방안이다. 복지사업, 육영사업, 카운셀링, 휴게 시설의 확대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이것은 불교의 대사회적인 기여라는 관점에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조계종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대학 1개교, 중고교 22개교, 국민학교 1개교 등으로 그 절대수가 부족한 형편이고, 사회 사업의 경우 2개의 보육원과 1개의 유치원이 있을 뿐인데, 불교 병원, 유치원, 보육원 등의 운명을 범종단적인 차원에서 집행해야 할 과제다. 종단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각오와 개척정신으로 임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온 것이다.
넷째는 장-단기 발전 계획의 수립이다. 유휴 토지의 활성화 방안, 승가 교육의제문제, 외국 불교 기관과의 교류 모색, 사찰 문화재의 보호•육성, 종립학교의 운영, 불교의 과학화 및 확대 방안 연구 등 불교 현대화를 위한 불교 운동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장-단기 발전 계획이 필요하다. 장-단기 발전 계획에는 불교가 당면한 최대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포교사업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문제는 많은 이들에게 불법을 홍보한다는 의미보다는 기존의 불교 신도를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줄 안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1972년에 총무원에는 포교원이 설립되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포교원의 앞으로의 활동 방안이 좀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부분은 문서 포교라고 본다.
현재 간행되고 있는 불교 관계 포교지로는 주간으로 불교신문, 주간불교가 있고 월간으로는 법륜, 불교사상, 법회, 선사상, 불광, 법시, 여성불교, 대원, 그리고 해인이 있으며 계간으로는 불교연구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잡지들이 과연 불교 포교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는 일말의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시급한 일은 전문 연구지의 출간이다. 그 다음으로는 불교 안내 책자의 발간이다. 우리의 명산대찰을 찾는 그 수많은 대중에게 불교는 과연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소양을 갖춘 기획위원회와, 연구주제에 대해 충실하고 양심적인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소위원회가 구성되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행정적으로 이념적으로 좀더 완벽한 불교 현대화의 방안이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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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불교학의 현대적 수용 또는 조명이 활발해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와 같은 노력이 불교인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와 같은 관점에서 간혹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불교 전문인들에 대해 종단은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도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교 인력에 대해 종단의 손길은 과연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가. 그들 상호간에 횡적인 유대 관계를 맺어줌과 동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할 것이다.
1,400만의 불교도와 1,600여년의 찬연한 문화 전통을 자랑하면서도 오늘의 불교 현실은 그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지나온 발자취 속에 남겨진 불교문화의 영광을 되씹는 회고의 집단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과거처럼 현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낙관의 염(念)을 가진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현실을 올바로 가꿀 수 있는 가능성이 지금의 시대에 있기 때문이다.
맺음말
불교의 출발점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보고 실천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그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의해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할 때, 미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실을 벗어나 깨달음이 약속된다.
이것이 바로 현법열반(現法涅槃)이다. 다시 말해서 현법열반은 있는 그대로 바로보고 때를 격하지 않고 현재적 삶에서 바로 자기가 서 있는 현장에서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멀고 관념적이고 드높은 어떤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위에 구체성을 띤 행동의 완성인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곧 실천이다.
연기, 무상, 고, 무아 등 불교의 절대적 진리성과 상대적 진리성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것으로써 우리는 올바른 불교 사상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