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습하였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더위의 강도는 생애 최고였다. 나 스스로 우리 사회를 위해 청량한 그 어떤 일들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서 남까지 덥게 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주변을 둘러싼 작금의 상황도 힘들고 외롭다. 그럼에도 패기와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정의(正義)를 위해 험난한 수라(修羅)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다시 다져본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겨 낼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뎌 낸 채 부정한 악을 바로잡고 정의를 위해 싸우며 지옥 속으로라도 기꺼이 행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이….’힘든 나날이 계속되어도 주말에는 자연과 함께하며 재충전하는 것이 필요할 진데, 올해는 더위가 다 가도록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좋은 풍광을 찾아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도 중요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2010년 여름부터 2011년 여름까지 거창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해인사를 드나들면서 지금은 극락에 가 계신 성안 스님을 알게 되었고, 은산 스님을 알게 되었으며, 가야산, 지리산, 덕유산의 사계절 풍경을 알게 되었다.
2011년 8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때마침 인연을 맺게 된 지리산 사나이를 따라 지리산 자락의 삼정산에 있는 암자순례를 약속한 날이었다. 거창에 부임하며 알게 된 그는 지리산을 수백 번 오르내리고 멋진 풍광의 지리산 사진을 남긴 것으로 남들에게 으스대고 자랑할 법한 대가(大家)인데도, 늘 겸손하고 말이 없으며 싱긋 웃는 것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지리산을 꼭 빼닮았다. 더불어, 통기타와 멋진 노래 한 자락으로 세상 모든 사람에게 행복감을 주는 분들도 동행하였다.
기세 좋은 분들은 ‘지리산 칠 암자 순례길’이라며 도솔암을 출발하여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사, 약수암, 실상사에 이르는 구간을 하루에 순례한다고 한다. 저질 체력을 지닌 나는 지리산 사나이의 뒤꽁무니를 따라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보기로 하였다.
영원사(靈源寺)는 신라 진덕여왕 때 창건한 절이다. ‘영원’이 이곳에서 8년간을 수도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8년간 낚시를 했는데 아직 고기를 낚지 못했다. 2년만 있으면 큰 고기를 낚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지자 영원은 2년간 수도를 더 하여 큰 깨달음을 얻고 이 절을 지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몇 개월 전 성안 스님과 단둘이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행들과 영원사를 출발하여 다시 산길로 들어섰다. 지리산 이름처럼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와 함께. 8월의 숲은 소리와 색과 빛의 콜라보가 최고조에 이른다. 여름을 잉태한 빛은 우거진 나무숲을 뚫고 한줄기씩 들어오고, 푸른 물소리는 청명함을 더한다. 이름 모를 들꽃을 찍고 간다는 핑계로 바위에 앉거나 숲 속에 나지막이 몸을 낮춰 본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나 고귀하기 이를 데 없는 이름 모를 들꽃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숲 속에서 본 최고의 즐거움이다. 동행자는 무슨 풀이든 뜯어서 냄새도 맡아보고 씹어도 보는 재미를 느끼며 숲길을 걷는다. ‘독초를 잘못 입에 댔다가 큰일 날수도 있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느릿느릿 걷다보니 어느덧 점심 공양 시간대에 이르러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도착하였다. 절집에 공사가 한창인데다 부산하여 지나치려는데 때마침 알현하게 된 주지 스님이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공양을 내오셨다. 해발 1,000m 이상 산 중턱에서 맛본 정갈한 점심 공양은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밥상이었다. 필부의 입장에서 108배 기도보다 고요한 법당에서 앉아 수행하는 것보다 부처님의 고마움을 느끼게 한 것은 그날의 밥상이었다. 밥의 기운으로 또 길을 걷는다. 비가 후드득 떨어진다.
빗속에 다다른 ‘문수암(文殊庵)’은 말없이 홀로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속에 느릿느릿 걸은 탓에 애초 계획을 바꿔 문수암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하였다. 다음날은 월요일이었다. 새벽에 내려가면 충분히 출근할 수 있다는 일행의 유혹보다 문수암이 내민 따뜻한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비는 이제 멈추었으나 먹구름은 아직 하늘에 잔뜩 끼어 있다. ‘아름다운 밤하늘을 기대했건만, 초롱초롱한 별빛을 볼 수는 없겠구나!’라고 다들 낙담하며 이런저런 잡담과 더불어 저녁 공양을 마치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며 먹구름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 그때 나타난 하늘의 별! 쏟아지는 별빛! 문수암 마당에 누워 밤이 새도록 별빛을 보며 지나온 삶과 앞으로 다가올 삶을 생각했다. 건방지고 교만하게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요즘처럼 마음이 어지럽고 힘들 때면 문수암 하늘을 떠올려 본다. 언젠가 게으른 몸을 곧추세워 그곳에 가고 싶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불명의 나날이 계속되고, 그 시절은 그리운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힘들 때 다시 서는 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