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마을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해 홍류동 계곡을 지나 몇몇 암자를 지나고 해인사를 지나 산길을 오르고 오르자니 저 꼭대기에 고불암이 있다. 해인사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고불암, 가을 는개가 흩날리는 오후 그곳에서 적광 스님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가야산 높은 곳에 살아서 그런지 여기 사는 게 편하네요.”
스님은 지난 7월 이곳의 감원으로 왔다. 본사의 직영 암자이니 공개회의를 통해 적광 스님이 소임자로 온 것이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멀어요.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으니 정재(淨財)를 잘 써서 모두가 보람되게 해야지요.”
스님은 정재 관리를 잘해서 장학사업과 복지사업을 할 계획이다. 출가에서부터 열반까지, 가야산 스님들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행자 관리부터 시작해 내실 있는 승가 교육을 위한 지원, 그리고 각자의 근기에 맞는 수행을 위한 지원까지, 스님들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스님들의 노후 복지를 위해 힘쓸 계획이다.
“생사 해탈 이전엔 노후에 대한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몸을 갖고 있으니.”
언젠가는 해인사 스님들의 노후 문제를 점검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었다. 적광 스님은 고불암 정재로써 이것을 현실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욱 의지를 굳히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게 아니에요. 양질의 수행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죠. 수행 환경이 좋아지면 훌륭한 인재도 많이 나오고 그러면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하지 않겠습니까. 불법승 삼보(佛法僧 三寶) 중에 불보와 법보도 중요하지만 승보가 있어야 불보도 법보도 있는 것이지요. 스님이 없으면 절이 텅 비어요. 그러나 사찰의 복지가 잘 되어 있으면 출가자가 더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해인사에서 사회국장과 재무국장 소임을 보면서 구상하고 추진했던 일들이다. 그러나 시간도 재원도 받쳐주지 않아 중간에 멈춰서야 했던 일들이다. 적광 스님은 고불암을 잘 운영해 장학사업과 복시사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고불암의 역할을 다 할 생각이다.
적광 스님은 열다섯 나이에 지족암에 왔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는 세 남매를 어렵게 키우셨는데, 속가의 친형이 먼저 출가했다. 그다음엔 어머니가 출가하셨다. 그 후 적광 스님은 지족암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때부터 지족암에서 일타 큰 스님과 살았다.
“은사 스님께서 참 잘 해주셨어요. 이 동네 애들 중에 스케이트 있는 애는 제가 유일했지요. 탁구대도 사주셔서 동네 애들이 탁구 치러 놀러 오기도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했을 때도,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닐 때도 은사 스님은 큰 소리를 내지 않으셨다. 사형 스님들이 버릇없이 키운다 했을 때도 입 닫으라 하셨다. 학교를 그만두자 머리를 깎아 주시고 대구에 나가
새 승복을 맞춰주셨다. 기분이 좋았다. 법문하러 다니시는 큰 스님 뒤에서 걸망 메고 시자로
다녔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타고 함께 다니며 당신 살아오신 얘기도 듣고 지침도 들었다. 그렇게 스님 곁에 있는 것이 공부였다.
“많은 사람 가운데에 밥이 한 그릇만 있으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 밥그릇에 손을 못 내민다 하셨어요. 그게 교육인 거죠.”
굴뚝 뚜껑을 여닫는 게 귀찮아 일부러 깨 먹었을 땐 은사 스님이 호되게 매를 드셨다. 뒷산에서 울다 내려오니 은사 스님은 울먹이시며 마를 한잔 갈아 내미셨다. 매일같이 적광 스님이 은사 스님을 위해 갈아드리던 거였다. 그렇게 은사 스님을 시봉하며 적광 스님은 혼자서 천자문, 초발심자경문, 치문을 공부했다. 그러고는 큰 절에서 공부하며 가끔 올라가 인사 여쭈었다. 그럼 또 따뜻이 맞아주셨다.
“늘 따뜻하고 자상하셨어요. 저희에게도 신도들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지요.”
99년에 적광 스님이 강화 보문사에 있을 때였다. 일타 스님이 편찮으셔서 일본 병원에 가시게 되었는데 그 3일 전 적광 스님이 있는 보문사에 오셨다. 헤어지던 날, 스님의 차가 배에 실리기 위해 돌아서는데 눈이 마주쳤다.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렇게 작별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중노릇하면서 사는 건 은사 스님의 힘이에요. 제 삶의 모든 게 그분의
영향인 것 같아요.”
문경 봉암사 선방에도 살고 지리산 칠불사 운상선원에도 살고 통도사 극락선원에도 살고 칠불사 아자방에도 살았다. 그래도 그 어디보다도 해인사 선방에서 여러 철을 났다.
“다른 선방에 갔다가 가야산 홍류동에 들어오면 공기가 달라요. 가슴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요. 어려서부터 자라서 그런지 여기가 내 귀의처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 가야산에 애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야산에 터널을 뚫어 순환도로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적광 스님은 그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해인사를 산중의 절이 아닌 도로 위의 절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홍류동 계곡에 자동차 매연이 가득하고 관광객들로 인해 더럽혀지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선배, 후배 스님들과 함께 ‘가야산환경위원회’를 만들었다.
10여 년 걸려서 그 도로 사업을 막아냈다. 홍류동 계곡이 심하게 오염됐던 적도 있다. 바위에 시커멓고 미끄덩거리는 이끼가 껴서 심각한 상태였다. 오수처리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에 뛰어놀았던 계곡이 그렇게 오염되는 것을 보며 적광 스님은 화가 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오수처리 시설을 설치했다. 모든 암자와 큰절의 관로가 다 그곳으로 연결돼 정화되는 시설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홍류동 계곡은 다시 깨끗해졌다.
“수행도량이잖아요. 잘 수호해야 앞으로 천 년이 더 가지요.”
그런 청정한 자연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그런 좋은 수행도량에서 어찌 부처님의 꽃이 피어나지 않을까. 스님은 문득 어린 적광 스님이 살던 가야산을 떠올리신다.
“큰 스님들이 산을 꽉 채우고 계셨어요. 성철, 영암, 자운, 혜암, 일타 스님이 다 계셨으니. 그때의 수행 가풍은 서릿발 같았지요. 해인총림의 모범적인 수행 가풍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우리가 그걸 잇지 못하는 큰 허물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른들께 죄송스럽지요. 그 가풍을 자연스럽게 이어서 현대에 맞게 구축해야 했는데. 젊은 스님들이 그 가풍을 생각하며 자기 수행의 중요성을 알았으면 해요.”
적광 스님은 늘 ‘선가귀감’에 있는 서산 대사의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산다.
‘출가위승(出家爲僧) 기세사호(豈細事乎) 비구안일야(非求安逸也) 비구온포야(非求溫飽也) 비구이명야(非求利名也) 위면생사야(爲免生死也) 위단번뇌야(爲斷煩惱也) 위속불혜명야(爲續佛慧命也) 위출삼계도중생야(爲出三界度衆生也),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이 편안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불법을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의 중생을 구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만 품고 살면 뭐가 아쉽고 뭐가 자유롭지 못하겠어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적광 스님은 오늘도 가야산에 깃들어 늘 처음처럼 걸음을 내디딘다. 여전히 은사 스님의 품에서 뛰놀던 것처럼, 고불(古佛)의 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