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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선善은 물과 같다 -‘상선약수上善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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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상 목사님의 하화중생(下化衆生) - 유수상 목사님 2016년 10월 416호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의 횡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돈, 권력,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약하고 순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행한 ‘갑’질의 예는 입에 담기조차 싫습니다. ‘갑’에게 당한 사람들은 흔히 자조적인 말로 ‘물 먹었다’고 합니다. ‘을’은 먹고 싶지 않은 물을 먹어야 하는 서러움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면서 물처럼 시련과 역경을 만나도 조급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먹기 싫은 물을 먹인 사람은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갑’에게 ‘물’로 보이는 ‘을’은 물처럼 세상을 관조하면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지만, 물이 바다에 도달하면 하늘로 비상하는 것처럼 시련과 역경을 딛고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인류는 늘 이상 세계를 꿈꿉니다. 허나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이상향에 근접한 시절은 중국 은나라 시절의 ‘요순시대’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의식주 걱정을 않는 세상, 행복한 생활에 만족하기에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완벽한 이상향의 세계를 ‘요순시대’라고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요순임금이 이런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있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는 물(水)입니다. 특히 은나라가 위치한 곳은 황하강 주변이었기 때문에 홍수로 범람이 잦았고, 가물게 되면 전혀 사용할 수 없는 흙탕물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시절 임금의 자질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요임금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순임금을 권좌에 앉힌 것도 바로 순임금의 치수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2009년 6월 ‘치수를 통한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달나라 여행도 가능한 요즘, 수천 년 전에도 가능했던 치수(治水) 하나 제대로 못 해 4대 강들이 녹조와 오염으로 가득해 마실 물 뿐만 아니라 농업, 공업용수도 걱정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물의 장점은 참으로 많습니다. 우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몸의 70%는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물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주 탐사선은 항상 행성에 물이 있는가를 살핍니다. 생명수로써 물의 과학적 기능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에는 과학적인 기능 외에 감성적인 기능도 있습니다. 마음이 복잡할 때 계곡 물 소리를 들으면 금방 차분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물 흘러가는 소리는 머리를 맑게 하고 기분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체의 70%가 물인데 몸 안의 물이 몸 바깥의 물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가 물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노자가 ‘가장 위대한 선(善)은 물과 같다’라고 한 말 외에도 물을 인용한 사례는 많습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는 ‘거울과 같이 맑고 잔잔한 물’이란 뜻인데, 장자는 ‘무위(無爲)의 경지’를 이것으로 표현하였고, 불가(佛家)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해탈·열반의 상태를 표현할 때 쓰입니다. 해월 최시형은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의 물 덩어리다. 물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어미다. 모든 종교의 제식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 하니라!” 왜 청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빌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샤머니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인 것입니다.

왜 노자는 가장 위대한 선(善)을 물에 비유하였을까요? 물에는 다음과 같은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물은 유연합니다. 물은 사각진 곳에 담으면 사각진 모양이 되고, 세모진 그릇에 담으면 세모진 모양이 됩니다. 이처럼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순응합니다. 둘째,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식물을 키우고 목마른 짐승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한번 노하면 바위를 부수고 산을 무너뜨립니다. 셋째, 물은 겸손합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은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이지만, 언제나 아래로 흐르며 낮게 있는 모든 곳을 적셔 줍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물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입니다. 넷째, 물은 공평함을 나타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수평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물은 조금만 상·하의 차가 있어도 반드시 아래로 흘러서 수평을 유지합니다.
수평은 곧 공평이요, 평등입니다. 다섯째, 물은 완전을 나타냅니다. 물은 아래로 흐를 때, 아주 작은 구덩이가 있어도 그것을 완전하게 채우면서 흐릅니다. 그러므로 물이 수평을 이룰 때, 그것은 완전한 수평이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물은 남의 더러움을 씻어주면서 남을 더럽힐 줄 모릅니다. 아마도 노자는 물과 같은 삶을 추구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위대한 선(善)이 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삶, 아무리 작은 구덩이라도 메워 가는 삶, 그래서 물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옛 속담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에 지속 가능한 물 관리 방법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위에는 ‘높이’에 따른 ‘위’가 있고 ‘위치’에 따른 ‘위’가 있습니다. 지위에도 위, 아래가 있습니다. 산에 내린 빗물은 들판을 거쳐 강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아래 있는 강이 맑으려면 위에 있는 산과 들이 맑아야 합니다. 만약 산이 더러우면 강물도 더러워집니다. 강에서 아무리 잘 처리한다고 해도 상류의 오염은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종교계에서도 들려오는 소리는 안타깝다 못 해서 끔찍합니다. 물에게서 인간은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철학을 실천하는 물에게서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픔은 높은 곳에 앉아서 관망해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관심과 애정 없이는 상대를 알 수 없습니다. 물은 우리에게 한없이 낮아지라고 충고합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감싸 안는 하방연대야말로 가장 강력한 연대입니다. 다수의 힘없는 연대가 소수의 힘 있는 연대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자주야(君者舟也) 서인자수야(庶人者水也) 수칙재주(水則載舟) 수칙복주(水則覆舟),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물은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고 한 것입니다. 즉 군주(배)가 백성(물)을 제대로 다스리면 순항할 수 있지만 인심을 거스르면 전복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물처럼 부드럽고,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임한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라면 명심할 게 있습니다. 물은 순리에 따라 흐릅니다. 그러나 지도자가 물의 소통을 막는다면 둑이 터지고, 거센 풍랑에 천하를 잃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