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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열 달간의 -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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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일여(生死一如) – 생(生) - 김서리 2016년 09월 415호
빨강 터널을 지날 무렵부터는 기차가 제법 무거워져 천천히 달리고 있다. 차창 밖으로 흐드러지게 핀 홍매가 너무 아름다워,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어 본다. 그랬더니 바람이 지나갔는지 홍매 꽃잎 흩날려 아주 잠시지만 나비처럼 내 손에 내려앉았다 간다.
우리가 타고 있는 임신호가 지나가면 다른 기차들은 더 서행하거나 먼저 지나가도록 정차해준다. 더운 날엔 그늘 길이 열리고 추운 날엔 햇볕 길이 열린다. 출산역에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들르는 ‘배려’역. 고운 인연들이 만들어주는 수많은 ‘배려’역에서 한숨 돌리고 목도 축이고 배도 채우며 우리 기차는 ‘만삭’역으로 향해가고 있다.

어느 하루 그대들의 배려

울산 강의를 마치고 혼자 경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바스락대며 끄집어낸 건 남편이 준비해준 배즙 담긴 보온병과 따뜻한 떡 봉지이다. 울산에서 경주까지 버스로 40분도 채 안 걸리지만 떠들기 좋아하는 내가 2시간 강의 후에 쉽게 허기진다는 걸 익히 아는 남편은 임신 후기로 갈수록 내 간식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참 예쁘게도 잘랐네.’ 냉동실에 있던 떡을 쪄내 먹기 좋게 잘라놓아서 오물오물 씹을 때마다 감탄한다. “먹다가 목메면
배즙 마셔”라고 말해준 그의 목소리가 배즙 홀짝홀짝 마실 때마다 들리는 듯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마중 나온 남편에게 떡을 다 비운 봉지와 빈 보온병을 자랑하듯 보여주었더니 “잘 먹네? 그럼 딸기도 사줄까? 딸기농장이 여기서 멀지 않아”라며 딸기 농장으로 향한다. 농장 근처에 가득한 딸기향에 나도 모르게 들숨 날숨을 연이어 하며 농장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아주머니께서 마침 딸기 포장 중이셨다.
“어머, 새댁 배가 많이 나왔네요.” 하면서 싱싱하고 예쁜 딸기를 먹어보라며 주신다. 우리는 고작 딸기 한 팩을 샀는데 “순산하고 또 와요”라며 한 팩을 덤으로 더 주셨다. 내가 베푼 적도 없는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이 낯설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후한 인심은 세상을 한껏 살아내고 있는 생명이 곧 세상에 나올 새 생명을 향한 배려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떡과 배즙에 담긴 남편의 마음과 딸기에 담긴 농장 아주머니의 마음을 기록해두려고 일기를 열었다가 그간의 일기를 죽 읽어보는데 임신을 하면서부터 감사한 일이 참 많았다.
그건 누군가의 베풂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억 속 그대들의 배려

2010년 0월 0일
강의 시간은 다 되었는데 부른 배로 뛰지도 못하고 멀리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보다 계단으로 향하려는데 마침 나를 본 사미니 스님께서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 기다려 주셨다. “저희 두 사람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께 두 손 모아 인사드리니 아무 말씀 없이 해맑게 웃어주셨다. 꼭대기 층에서 함께 내린 후 스님의 뒷모습을 보고 한 번 더 합장 반배를 올리며 고이 희망했다. ‘어떤 인생이든 갓 시작된 모든 삶에 평안이 가득하기를. 스님의 삶도, 내 결혼 삶도.’ 그리고 나는 스님께서 가신 반대쪽 복도로 걸어갔다.

2010년 0월 0일
오늘도 교단 테이블에 떡과 유자차가 놓여 있다. 배가 부쩍 나오면서 내 임신을 눈치챈 학생들이 수업 때마다 간식을 준비해준다. 학생들의 사심 없는 작은 성의도 혹여나 내가 사심을 일으켜 성적에 반영을 할까 봐 “이런 것은 받지 않습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던 나였는데, 임신 후엔 이런 간식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거 저 주시는 것 맞나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배 속 아이에게 말한다. ‘..야~ 오늘도 스님들과 언니 오빠들을 위해 힘내서 강의하자!’

2010년 0월 0일
전북 고창에서 여는 아침. 밤사이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다. 남편이 눈 얼기 전에 아침 식사를 하고 오자며 길을 재촉해 식당을 찾아다니니 겨우 한 집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하필 장어전문점. “백반은 안 되나요?” 물으니 우리 머리에 앉은 눈발과 내 배 때문인지 아주머니가 일단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신다. 따뜻한 숭늉부터 내어주시고는 냉이된장국과 하얀 쌀밥, 그리고 갖가지 밑반찬을 차려 주셨다.
“원래 없는 메뉴인데, 새댁 배를 보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있어야지. 맛있게들 들어요.” 하얀 눈 덮인 세상에 인정이 소복소복 쌓이고 태어날 아이의 세상도 이러하기를 바라며 하얀 쌀밥과 국을 깨끗하게 다 비워냈다.

2010년 0월 0일
강의를 마치고 건물 현관을 막 나왔는데 뒤에서 속사포 같은 발걸음이 느껴졌다. “교수님!”하고 부르면서 두 학생이 살짝 내 양쪽 팔짱을 낀다. “어디 가니?” “교수님 몸도 무거우신데 가시는 데까지 모셔다드리려고요. 저희는 교수님의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예요!” 재미로 낀 팔짱과 농담 같은 말인데도 참 따뜻하고 든든했다. 누군가에게 손 내밀 때 수없이 망설였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망설이지 말자. 일으킨 내 마음이 순수하고 밝다면 그 마음 하나 믿고 다가가야지. 오늘 그 학생들처럼.

2010년 0월 0일
“사과 다 먹어가네? 사과농장에 갈까?” 아침마다 사과 타령하는 나 때문에 남편은 냉장고에 사과를 채우기 바쁘다. 차를 타고 보문관광단지 어디쯤 나 있는 산길을 따라 나뭇잎들 비비적대는 소리에 취해 가다 보면 덕동호를 끼고 펼쳐진 사과 농장이 있다. 내 배를 알아보신 주인아주머니, “벌써 다 먹었나 보네. 오늘은 몇 킬로?” 이렇게 인사를 하신다. 주문량보다 1kg을 더 넣어 상자에 꽉꽉 담으시고도 덤으로 몇 개를 더 챙겨 오시며 말씀하신다. “예쁜 딸 낳으려면 사과도 예쁜 거만 골라 먹어야 해~ 못난 거는 신랑이 먹고.” 배 속 아이 덕분에 요즘 내 눈과 입이 호강한다.

2010년 0월 0일
나를 차에 태우고 남편이 어디론가 가더니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고택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보여주는 것이 가지에 다소곳이 앉은 홍매였다. “생각보다 홍매가 잘 안 보여”라는 남편의 말. 내가 홍매 좋아한다는 걸 알고 꽃나무들 속에서 홍매를 찾아다녔었나 보다. “출산하러 병원 가기 전에 홍매를 보여주고 싶었어.” 그 마음 참 고와 내 거친 마음에 담기 아까워 어쩌누. 홍매 찾으며 그의 눈이 닿았을 허공 자리마다 아이와 나를 위한 그의 염원이 꽃을 피우겠지.

그 배려, 고이 세상에 돌려주기

“여보, 오늘 당신이 챙겨준 떡이랑 배즙, 너무 맛나서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어요~ 아침부터 번거로웠을 텐데 고마워요.” “아침에 그거 준비할 때 난 기분 좋던걸? 당신이랑 배 속 아기가 먹을 거잖아~.” 남편의 말을 들으니 《앙굿따라 니까야》의 〈보시경〉 내용이 생각났다. “비구들이여, 여기 베푸는 자는 보시하기 전에 마음이 즐겁고 보시할 때 마음이 깨끗하고 보시한 뒤 마음이 흐뭇하다. 이것이 베푸는 자의 세 가지 구성요소다.”(대림 스님 옮김) 정성에다가 즐거움까지 보태어졌으니 그 떡과 배즙이, 딸기가, 사과가, 유자차가, 냉이된장국이 맛없을 리가 없었다. 홍매가 어여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베푸는 이가 베푸는 것으로 기쁘다 하여 받는 이는 당연하게 받기만 해도 될까?
《앙굿따라 니까야》의 〈은혜를 아는 자의 경〉에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사람은 세상에서 발견하기 힘들다. 두 종류란 무엇인가? 은혜를 베푸는 사람과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이다.”(전재성 옮김) 라고 나와 있다. 베풀어주신 분들에게 어떻게 다 일일이 보답할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답은, 그들의 평안을 기도하며 현재에 내 할 일을 고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자리가 강단이면 최선을 다해 강의하고, 먹는 곳이면 꼭꼭 씹어 맛있게 먹고, 베푸는 곳이면 즐겁게 베풀면 된다. 받은 배려를 그렇게 세상에 돌려주면 되는 것이다.

홍매 피울 온기가 아직 세상을 채우지 않았다는 걸 기차 안으로 돌아온 남편의 언 손을 만지고 알았다. 그의 옷자락에 붙은 홍매 조화 조각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 손에 드리워졌던 그 붉은 꽃잎들이 온 곳을 알았다. “여보, 오늘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홍매를 보았어요!”라며 남편에게 모른 척 말했더니 “날이 많이 풀렸나 봐. 하하~”라며 그가 크게 웃는다. 그의 흐뭇한 웃음소리가 기차 안을 가득 메우고 온기는 그렇게 세상을 채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