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내려 놓는 즐거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이홍기 2016년 08월 414호
2015년이 마무리되는 12월 히말라야를 찾은 지 5일째. 3천 고지를 넘어 4천3백 하이롯지로 향해 오르는 길. “헉헉”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나는 누구인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본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홀로 걷는다는 것은 자연과 하나 되는 조화로움이자, 교감이고 우주적인 근원과 연결되는 기도인 것 같다. 이제 이명까지 울린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돌리고 눈을 감은 채 깊은 호흡을 한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뒷머리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나무를 가득 담은 망태기를 메고 서 계신다. 길을 막은 채 눈을 감고 앉았으니 내려가지도 못하고, 말도 없이 미소만 짓고 비켜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미안한 맘에 “나마스테” 인사하고 지나가는 분을 불러 작은 달러를 전하니 “나마스테”하며 그은 얼굴에 활짝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기쁨과 행복으로 다가온다. 순간 이명도 자취를 감추고 발걸음이 가뿐해졌다.(히말라야 여신이었나?)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를 찾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얻으러 간 걸까? 사자가 앉아있는 모습의 안나푸르나, 봉황이 솟아오르는 모습의 마추픽추 등, 설산의 장엄함과 신비함 속에서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나를 발견한다. 히말라야가 지리적 어떤 공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꽉 짜인 삶의 틀, 탐욕, 집착, 두려움, 이기심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홀연히 지켜보다가 이게 무슨 짓이었던가 싶어 한 생각 돌이켜 내려놓으니 ‘인생이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었음을 홀연히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런 일상적인 틀로부터의 떠남이 해탈이라는 자각과 함께 ‘깨달음을 만나기 위하여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쯤 한 달 정도의 히말라야와 네팔 기행을 마무리하고 부처님 성지를 찾아보기 위해 인도에 왔다. 병신년 새해 첫날을 갠지스강(강가강)에서 맞이하고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힌두교 성지인 바라나시로 왔는데 새벽안개 자욱한 갠지스엔 희미한 안갯속에서 나룻배를 젓는 사공들이 부지런하다. 한 줌 재로 남는 육신을 태워 떠나 보내는 그 강물에 몸을 씻고, 성수로 마시며 현생의 축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과정이며, 삶 그 자체이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의미도 되새겨본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고행으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으셨다는 불교 최고의 성지 보드가야. 넓은 마하보디 사원에 이렇게 많은 동·서양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온몸으로 참배하고 기도를 하는 것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기 때문 아닐까? 불교 신도가 아닌 내가
보아도 뭔가 있을 것이라는 의문에 들면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크게 솟구쳤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이곳 보드가야에서 내가 사는 거창에서는 한 번도 못 뵈었던 거창의 작은 암자에 계시는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티베트 불교 대학에서 공부를 오래 하셨기에 티베트 큰스님들을 친견하는 행운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스님의 도움으로 3일에 걸쳐 티베트 불교대학 교수 스님께서 펼치시는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마음 다스리는 특별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가피를 또 입게 되었다. 인간은 윤회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고통을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불법이며 그 고통을 부처님이 직접 구제해 줄 수는 없고 스스로 제거하여야 구제되는 것이라 한다. 절하고 보시하면 공덕은 쌓을 수 있어도 고통은 없앨 수 없고 고통은 불법을 이해하고 수행하여야 없앨 수 있다 한다. 고통은 마음으로부터 오므로 고통을 없애는 8가지 마음 다스리는 게송을 생활 속에 같이해야 큰 수행이 된다고 하신다. 그리고 티베트 스님들은 예비 수행의 과정으로 오체투지 절을 두어 달에 걸쳐 십만 배를 한다고 한다. 나도 오체투지 절을 열흘 동안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108배를 해보았다. 더 내려갈 수 없는 더 낮아질 수 없는 내 모습을 통해, 36년 공직생활을 뒤 돌아 보니 나름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맘으로 합리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외면의 나만 바라본 편중된 삶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교수 스님의 안내로 같이 강의받았던 프랑스 스님과 함께 보드가야 인근 AD3-4세기경에 설립되어 유명한 성인 보살들께서 공부하신 나란다 불교대학, 반야심경의 법륜 지인 영축산 등을 참배한 후 보드가야의 일정을 끝내고, 부처님께서 깨달은 후 처음으로 다섯 제자에게 설법했었던 사르나트 녹야원,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쉬바라스티 기원정사, 부처님의 열반지 쿠쉬나가르 등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부처님의 큰 가르침 따라 내려놓는 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중생으로 지금부터라도 살아가길 마음 다지며 두 달 간의 내려놓은 나를 찾는 여행을 마무리했다. 티베트의 큰 성자 밀라레파는 ‘여행은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된 것’이라 했던가.

뜰 앞에 능소화가 여름 장맛비에 힘없이 낙화하는 오후, 문득 생각나는 히말라야를 떠올리며 인도 영축산에서 발심한 작은 불자가 보리심으로 일체중생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중생이 되도록 원력을 세워 달라고, 내 맘속의 부처님께 가만히 합장하고 티벳 불교대학 교수 스님께서 불자가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지켜보라는 마음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 게송(랑리땅빠)을 암송해본다.
◆최상의 뜻 이루는 마음으로 일체중생을 여의주보다 늘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던지 나 자신 누구보다 낮추고 마음속 깊이 남을 가장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행에 자기 마음 살피고 번뇌 생기자마자 나와 남 해치기 전에 단호히 제거하게 하소서 ◆버림받고 불쌍하고 죄와 고통에 크게 짓눌린 존재를 볼 때 귀한 보석의 원천 만난 것처럼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 남이 나를 질투하여 헐뜯고 모함하여도 부당한 패배는 내가 받고 승리는 남에게 바치게 하소서
◆내가 도와주었기에 크게 기대했던 그가 매우 나쁜 해를 끼쳐도 바른 스승으로 보게 하소서 ◆직간접의 이익과 즐거움 모든 어머니에게 바치고 어머니의 허물과 고통 은밀히 내가 받게 하소서
◆또한 앞의 모든 행들이 번뇌의 세속팔풍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 신기루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집착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